1988년 5월 15일, 1987년 민주항쟁의 열망을 담아 창간한 <한겨레> 신문에서 많은 기자들을 좌절감에 빠뜨린 화가가 있었다. <한겨레>에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보는 것은 1면 톱기사도, 사설도 아니었다. 신문을 받아들고 처음 찾는 것은 한 칸의 만화였다. 고상하게 만평(漫評)이라고 불렸지만, 이 그림을 담당한 박재동 화백은 순우리말로 '한겨레그림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박재동은 그렇게 오랫동안 한 칸의 그림으로 사람들을 유쾌, 통쾌,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림판'이라는 이름에도 이미 어느 정도 그 뜻이 담겨 있지만, 그의 그림을 단순히 만화나 만평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대개 다른 신문 만평이 정치권력이나 사회 부조리,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 그리고 촌철살인의 풍자만을 담았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독재 권력과 재벌, 부패세력에 대한 비판의 이면에 항상 따뜻한 시선과 인간애가 묻어나는 감성이 배어 있었다. 사회적 약자와 서민들의 삶과 희망을 절절하게 형상화한 그의 작품은 치열한 현실과 삶을 반영한 하나의 리얼리즘 예술이었다. 신문 만평은 그의 손에서 예술작품이 되었고, 한국 신문 만화를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했다.
그는 영향력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문화 권력화된다는 점을 인식한 듯, 홀연히 <한겨레>를 떠났다. 더 이상 그의 만평을 볼 수 없었다는 아쉬움은 컸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후학을 위해서 잘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에 대한 갈증은 존재해왔다. 그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손바닥 아트>(한겨레출판)이다.
수많은 '소년 강풀' 만들어낼, 만화의 새로운 고전그의 날카로운 사고와 따뜻한 감성은 여전히 창발적으로 살아 있었다. 하루하루 신문 만평을 통해 세상을 형상화하던 그는 이제 매일매일 일상을 손바닥 그림에 담고 있었다. 신문만평이 사건 사고의 보도에 따라 그리는 것과 달리 손바닥 그림은 자신이 직접 만나고 보고 겪은 일들을 중심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람들의 얼굴과 모습을 가장 우선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잘나거나 부유한 사람들보다는 착하고 성실한 서민과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한 희망의 손길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노숙자에서부터 노점상, 학생, 스님, 택시기사, 동네주민 그리고 하찮은 바퀴벌레라는 미물의 육성도 들려준다. 그러나 자칫 감성적인 위안에만 빠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의 얼굴에서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대안 모색을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 대 머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은 그의 예술적 실험정신에서 왔다. 박재동은 하얀 도화지를 채우는 손바닥 그림에만 머물지 않고 영수증, 전단지, 포장지 같은 찌라시 위에도 그리고 있었다. 찌라시 아트는 예술이 본래 일상의 하찮고 미미한 것에서 출발한다는 창작정신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 한겨레그림판 이후의 대안모색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로워졌다.
만화예술을 사회적 참여와 결합시키는 그의 작업은 팝아트의 한국적 모델임에 분명하다. 또한 그는 다시 이 책을 통해 박재동은 평범한 이들에게도 다시 붓을 들게 한다. 그의 첫 만평 모음집 <환상의 콤비>(친구, 1989)가 시사만화가 지망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듯이 그의 책 <손바닥 아트>는 손바닥 그림 혹은 찌라시 아트 지망생들의 고전이 될 것이다. 박재동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소년 '강풀'이 다시 수없이 탄생하리라.
덧붙이는 글 | <손바닥 아트> 박재동 씀, 한겨레출판사, 2011년 11월, 289쪽,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