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0년 7월 7일 오후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는 발족식 및 토론회를 열었다.
 2010년 7월 7일 오후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는 발족식 및 토론회를 열었다.
ⓒ 최인성

관련사진보기


2011년 큰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려는 임금 세종과 어리석은 백성에게 글자라는 위험한 무기를 안겨줄 수 없다는 양반 세력과의 쟁투가 긴장감 높게 그려졌습니다.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에게 어리석은 백성이 글자를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지배 세력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고 비웃음을 전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에 대한 세종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승리가 예정돼 있지 않을지라도, 패배할지라도 "백성들은 그들의 지혜로 길을 모색할 것이고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엄청난 고난 끝에 마침내 한글이 반포되었을 때, 양반 세력은 그 글자를 하찮은 신분이나 여자들이 사용하는 비천한 존재로 만들면서 다음의 싸움을 준비합니다. 한글을 둘러싼 쟁투는 어쩌면 그리도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쟁투와 닮았는지, 무릎을 탁 쳤습니다.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쟁투

학생인권조례는 어느날 갑자기 진보교육감이 준 선물이 아닙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움트기 시작한 학생인권운동은 '학생도 인간이다!'라는 당연한 사실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학생인권 보장의 목소리는 늘 주변부에 머물렀고, 학교 현장의 변화나 사회적 논의 수준은 답답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10여 년이 넘는 노력 끝에 결실을 본 것이, 고작 2007년 말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에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선언적 문구가 들어가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교과부나 교육청 차원에서 마련되어 왔던 학생인권 관련 지침들이 '학교자율화' 조치라는 미명 하에 죄다 폐기됐습니다. 어떻게 이 국면을 돌파할 것인가라는 모색 속에서 나온 게 바로 지역별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었습니다.

2010년 진보교육감이 여러 지역에서 당선된 이후, 경기도에서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보수언론과 단체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학생인권조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학교'를 넘어 '인권의 학교'로! '학교폭력 희생자 추모 및 학생인권조례 시행촉구 촛불집회'가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빌딩앞 원표공원에서 학생인권조례제정서울본부, 곽노현교육감 석방·서울혁신교육지키기범대위 등 청소년·인권·교육관련 시민단체 주최로 열린 가운데, 흰 국화와 촛불을 든 참가자들이 학교폭력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죽음의 학교'를 넘어 '인권의 학교'로! '학교폭력 희생자 추모 및 학생인권조례 시행촉구 촛불집회'가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빌딩앞 원표공원에서 학생인권조례제정서울본부, 곽노현교육감 석방·서울혁신교육지키기범대위 등 청소년·인권·교육관련 시민단체 주최로 열린 가운데, 흰 국화와 촛불을 든 참가자들이 학교폭력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학생인권은 시기상조"라는 이야기에서부터 "교육이 아수라장이 된다" "'좌빨'들이 애들을 망친다"라는 터무니없는 공격까지.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온 공격들에 타 지역의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 꽁꽁 얼어붙을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학생인권과 교육의 변화를 열망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직접 보여주자!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암울한 현실, 역전 만루홈런을 치다

서울시민 유권자 1%(8만2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내야 하는 주민발의에 주어진 시간은 단 6개월. 하루 종일 차가운 거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며 설득해도 주민등록번호까지 자세히 기입해야 하는 서명지를 받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운동사회 안에서도 학생인권에 대한 고민을 미처 해보지도 않았거나 인식의 차이가 커서 조직 서명도 쉽지 않았습니다. 보수단체들이 '학생인권이 교권을 추락시킨다'는 프레임으로 끊임없이 공격해오자, 교사들의 마음도 얻기 어려웠습니다. 서명기간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도 서명자가 채 1만 명도 되지 않았음을 확인했을 때는 무척이나 참담했습니다.

'패배하더라도 덜 초라하게 패배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운동화 끈을 조였고, 놀랍게도 서명기간 종료를 얼마 앞두고 역전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덜 초라한 패배'를 꿈꾸었던 우리는 마침내 학생인권이란 '변방'의 의제로 주민발의를 성사시켜내는, 역전 만루홈런을 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주민발의는 성사되었지만, 조례안이 과연 의회라는 장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특히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되면서 상황은 더욱 암담해졌습니다. 서울시의회 의원들 중에서도 학생인권조례를 달갑지 않은 손님처럼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고, 교육위원들도 논란과 저항이 심한 조례안을 처리하는 데 부담감을 표했습니다.

그 틈을 타 보수단체들이 '학생인권조례 저지 범국민연대'를 결성, 조례 통과 저지를 위한 총력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교회까지 나서 '학생인권조례에 찬성하면 낙선시키겠다'는 협박으로 의원들을 하나하나 압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의회 안에서 '조례안 처리를 총선 이후로 미루면 어떻겠느냐' '이번에 통과되기를 원한다면 조례 내용을 후퇴시켜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조례 내용을 지켜내는 것은 물론, 조례가 제정될 수 있을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집중 포화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의회 점거농성까지 전개하고 절박한 호소를 전한 끝에 마침내 의회 다수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9일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시의회를 통과했습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바로 청소년활동가

곽노현 교육감 업무복귀 첫 출근 후보자 매수 사건으로 구속된 뒤 1심에서 벌금형을 받고 석방되어 업무에 복귀하게 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20일 오전 서울시교육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 곽노현 교육감 업무복귀 첫 출근 후보자 매수 사건으로 구속된 뒤 1심에서 벌금형을 받고 석방되어 업무에 복귀하게 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20일 오전 서울시교육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전국에서는 세 번째로 제정된 것이지만, 수도 서울에서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민발의를 통해 입법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학생인권이라는 변방의 의제로, 그것도 소수자의 인권을 앞세운 조례가 주민발의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많은 이들의 염려와 불신을 딛고 우리는 주민발의 성공이라는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

조례 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교육감이 부재한 상태에서, 의회 다수가 부정적이거나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조례를 통과시켜낸 것은 또 한 번의 기적입니다. 사실 너무도 극적이었다는 점에서는 '기적'이라 불릴 만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기적은 학생인권조례를 응원했던 이들의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결실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청소년 활동가들입니다. 유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이 온몸으로 추진했던 서명운동에 참여할 수조차 없었던 이들. 돈도 없고, 자원도 없고, '빽'도 없고, 힘도 없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이들 청소년 인권활동가들은 진정 어린 호소와 집념어린 활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서명을 모아냈습니다. 그리고 학생인권을 전국을 움직이는 중심적인 의제로 기필코 만들어냈습니다.

그럼에도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지명한 이대영 부교육감이 올 초 진보교육감의 정책에 제동을 걸기 위해 의회까지 통과한 조례의 재의결을 요구했습니다. 조례가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시의원 2/3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서울학생인권조례의 운명이 다시 바람 앞에 놓인 등불 꼴이 됐습니다.

다행히도 19일 곽노현 교육감이 벌금형을 선고받고 직무에 복귀함에 따라 부교육감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곽 교육감의 무죄를 믿어온 이들에게 선고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못할지라도, 일단은 직무에 복귀한 건 큰 다행입니다. 대법원 최종심까지 우선 시간을 벌었으니, 서울교육을 혁신하기 위한 대표 정책인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하고 정착시키는 데 힘을 기울일 것으로 보입니다.

부교육감의 재의 요구로 분노와 허탈감에 휩싸여 있을 무렵, 곽노현 교육감의 선고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당시, 조례본부가 '이돈명인권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사회에게 모욕당한 이들, 차가운 거리로 내쫓기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겨야 했던 이들을 변호하는 데 아낌없이 헌신하셨던 그분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돈명인권상'이기에, 그 상을 수상했다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 한해 주민발의운동을 이끌며 온갖 수모와 고난을 감수해야 했던 청소년활동가들, 이제야 겨우 인권운동의 한켠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청소년활동가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두 손 모아 큰 감사를 전합니다.

추진) 천주교인권위원회는 고 이돈명 변호사님의 인권운동에 대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인권상'을 제정했습니다. 이 글은 1회 수상자로 선정된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의 소감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배경내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공동집행위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학생인권조례#인권#주민발의#이돈명#곽노현
댓글

홈페이지 : cathrights.or.kr 주소 : 서울시 중구 명동길80 (명동2가 1-19) (우)04537 전화 : 02-777-0641 팩스 : 02-775-6267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