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인 1123년, 송나라(북송) 사절단이 고려를 방문했다. 여덟 척의 배와 200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된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이때 사절단 중간 간부인 서긍이란 인물이 고려의 제도 및 실정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황제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중국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데다 관리마저 소홀했던 탓에 이 보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보고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1년. 멸망한 청나라의 궁중 서고에서였다. 이 보고서의 명칭은 <선화봉사고려도경>. '선화'라는 연호를 쓰던 시절에 황명을 받들어(奉) 사신(使)으로 다녀온 뒤 기록한 책이라 하여 선화봉사(宣化奉使)가 붙은 것이다. 지금은 그냥 <고려도경>이라고 약칭한다.
<고려도경>에서 서긍은 고려에 관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다루었다. 그중 하나가 고려의 '특이한' 의료문화였다. <고려도경> 권17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려는 본래 귀신을 숭상하여 음양에 얽매입니다. (그래서) 병이 나도 약을 먹지 않습니다. 부모자식이나 근친일지라도 눈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주술을 걸어 (질병을) 억누를 뿐입니다."고려란 나라에서는 책으로 의술을 배운 직업적 의료인이 아니라, 영적 능력을 보유한 무속인들이 주술을 걸어 질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자의 몸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워 병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오늘날 우리가 한의학이라고 부르는 합리주의적 의료가 있었다. 여기서 '합리'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란 뜻이지, 우주만물을 이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란 뜻은 아니다. 그런 합리주의 의료기구로서 왕립 의료원이자 의과대학인 태의감이 있었다. 또 직업적 의사를 선발하는 의과라는 시험제도도 있었다.
그런데도 서긍은 고려 사람들이 병이 나도 약을 먹지 않고 무속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고려에도 합리주의 의학이 존재했지만 그보다는 무속적 치료가 훨씬 더 만연했기에, 서긍이 보기에 고려는 무속에 의존해 질병을 치료하는 나라처럼 생각됐던 것이다.
조선시대 의료 분야에서 무속인들의 역할 지대해
서긍이 목격한 의료문화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다. 주술로 병을 치료하는 문화는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저 민간 차원에서 유행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적극 권장했던 것이다.
세종 11년 4월 18일자(1429년 5월 20일) <세종실록>에는 '조선은 유교의 나라'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나온다. 말단 행정단위인 리(里)별로 무속인들을 배치하여 주민들의 의료를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사극에서는 환자를 등에 업고 의원을 찾아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지만, 실상은 무속인을 찾아가는 예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무속인들은 '국민 주치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정에서는 리별로 무속인들을 배치한 뒤, 열병 같은 전염병이 돌면 지방 수령의 지휘 하에 의원과 무속인이 공동으로 환자를 치료하도록 했다. 환자 치료에 공을 세운 무속인에게는 종교세인 무세(巫稅)나 부역을 감면해주었다.
평상시에는 무속인이 국민건강을 책임지고 비상시에는 의원과 무속인이 공동으로 책임진 사실. 이로부터 우리는 당시의 의료환경 중 하나를 엿볼 수 있다. 질병 치료능력을 가진 무속인의 숫자가 의학을 배운 지식인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직업적인 의료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유교주의를 표방한 조선왕조로서도 무속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배층인 사대부 관료들도 무속과 불교에 대해 '전투 모드'를 취하긴 했지만, 막상 급하고 절실할 때는 이처럼 손을 내밀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유교주의 속에서도 무속이 여전히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무속인들이 국민보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서긍이 다녀간 고려시대에는 훨씬 더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그랬으니, 그의 눈에 비친 고려는 온통 주술에 의존해 병을 치료하는 나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허연우(한가인 분)는 궁에서 쫓겨나 활인서에서 일종의 '사회봉사'를 했다. 연우는 그곳에서 환자도 돌보고 아이들과도 놀아줬다. 일종의 간호조무사 역할을 한 것이다.
연우가 근무한 서민의료기관인 활인서. 이 기관은 특히 무녀들과 깊은 관련을 가졌다. 활인서의 재정이 무녀들의 재정적 참여로 충당되었던 것이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임금 때 편찬된 재정·국방 백서인 <만기요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수납된 무세(巫稅) 중에서 한성 무세만큼은 활인서의 재정 경비로 충당되었다. 서울 무녀들이 활인서의 재정을 책임졌던 것이다. 무녀들이 한편으로는 여의사로 활동하고 한편으로는 재정 지원자로 활동했으니, 조선시대 의료 분야에서 무속인들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무속인은 일반인보다 태양 에너지를 더 많이 보유한 사람?
조선 후기까지도 무속이 서민 의료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점은 정약용의 <촌병혹치>를 통해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정약용이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첫 번째 귀양지인 경상도 장기현(지금의 포항시)의 주민들을 위해서였다.
1801년에 정약용이 주군인 정조 임금을 잃고 장기현으로 귀양 갈 때만 해도, 이곳 주민들은 '합리주의 의료'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직업적인 의원이 사실상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잡아먹는 수준이었다.
정약용이 일종의 처방전인 <촌병혹치>를 저술한 것은 그들에게 '합리주의 의료'의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이때까지도 여전히 의료분야에서 무속인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속인들이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았지만, 이를 나름대로 설명하고자 한 시도가 있었다. 40년간 3천 명의 무녀들과 인터뷰를 한 민속학자·언어학자 서정범이 바로 그런 시도를 했다.
서정범의 <한국 무속인 열전>에 실린 사례들을 종합하면, 가장 대표적인 치료법은 무속인이 자기 몸 안에 있는 태양 에너지를 환자의 아픈 부분에 쏘아대는 것이다. 무속인의 손이 환자의 몸에 닿음으로써 무속인의 태양 에너지가 환부에 전달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약손'이 아이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연상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본다면, 질병 치유능력을 가진 무속인들은 일반인들보다 태양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 에너지가 '비정상적'으로 과도하게 축적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인들, 특히 고대의 샤먼(무속인)들이 태양을 숭배한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태양열이 없으면 생명체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고대인들의 눈에는 태양이 신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샤먼들 역시 태양 에너지를 빌려 인간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그들도 더욱 더 태양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무속적 치료보다는 한의학이나 서양의학 같은 합리주의 의학이 훨씬 더 많은 질병을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땅에서 무속인들이 국민보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소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