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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송유미  시인 송유미. 그가 세 번째 시집 <당나귀와 베토벤>(지혜)을 펴냈다
▲ 시인 송유미 시인 송유미. 그가 세 번째 시집 <당나귀와 베토벤>(지혜)을 펴냈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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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끊고 맺음에서 생기는 고통이었다
숫돌 위에서 무뎌지는 감성을 갈고 갈다가
다 닳아지는 생이었다

무엇이든 성큼성큼 썰어버리는 식욕이
까짓것, 캄캄한 절망쯤은 가볍게 썰었다
상처를 도려낸 자리마다
생살이 돋아나기도 하였다
칼집 속에 갇힌 어두운 시절은
스스로 빛나기 어려웠지만
누가 내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다면
상현달이 환히 보일 것이다
- 12쪽, <보이지 않는 칼-서시> 몇 토막

시, 시조, 연극, 아동극, 무용극 등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꽤 잘나가는 글쟁이'(?)인 시인 송유미. 그가 세 번째 시집 <당나귀와 베토벤>(지혜)을 펴냈다. 2000년 한국해양문학상을 받은 첫 시집 <백파를 찾아라>를 펴낸 지 11년, 두 번째 시집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오마이뉴스 2011년 7월 14일 보도)를 펴낸 지 6개월 만이다.

이번 시집은 모두 4부에 시 59편이 가대기처럼 이 세상 곳곳을 갈고리로 찍어 나르고 있다. 제1부 '가대기 시인', 제2부 '라면 끓이는 낙타', 제3부 '가지치기', 제4부 '빈집'에 실려 있는 '보이지 않는 칼', '콜라병 속에 새 한 마리 산다', '우물과 무덤 사이 집이 있었다', '태양이 숙박하는 민둥산의 하룻밤',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땅에서 비가 내리다', '어머니의 모래 만다라', '명당' 등이 그 시편들. 

시인 송유미는 '시인의 말'에서 "나는 나 아닌 것으로 / 연꽃은 연꽃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늘 성찰케 한다"고 적었다. 이 말은 곧 '나는 나가 아니지만 곧 나'이며 '연꽃은 연꽃이 아니지만 곧 연꽃'이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이 세상 곳곳에 있는 모든 것은 제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연'(然)으로 이어져 있다는 그 말이다.

"팔 없는 비너스 생각으로 날이 저문 적이 있다 // 그의 잘린 팔을 따라가다 보면 만질 수 없는 나무, 풀, 바람이 만져진다 만져지는 나무들이 말을 한다 가끔 팔이 있어도 팔이 없다고, 때로는 팔이 있으나 느낌이 없다고 나는 바람에 팔을 맡긴다... 이제 나는 비너스를 바라보는 일에 팔을 달지 않는다 다리를 달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두 팔 없는 슬픔에 천 개의 팔을 단다 천 개의 다리를 단다 그 창백한 팔 없는 몸속으로 고개를 들이밀다 풍덩 빠진다" -51쪽 '궤도' 몇 토막

시인 송유미는 3일(토) 전화통화에서 "김철수 감독이 만든 영화 '궤도'의 주인공은 두 팔 없는 장애인 철수였다"라며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자꾸만 팔이 없는 비너스가 떠올라 그 생각을 다듬은 시가 '궤도'"라고 귀띔했다. 이 시를 곱씹으면 시인 송유미가 '시인의 말'에서 왜 "나는 나 아닌 것으로 / 연꽃은 연꽃 아닌 것으로"라고 생각하는지 그 뿌리를 더듬을 수 있다.

시인은 "팔 없는 비너스"를 날이 저물도록 생각하다가 "그의 잘린 팔을 따라가다 보면 만질 수 없는 나무, 풀, 바람이 만져진다"고 쓴다. 이는 곧 팔이 없는 비너스는 팔이 없기 때문에 팔을 가진 이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알고 있어 팔을 가진 것과 같고, 팔을 가진 이는 팔이 있기 때문에 팔이 없는 이들이 지닌 아픔과 슬픔을 모르고 있어 팔이 없는 것과 같다는 그 말이다.      

시인 송유미는 그 어떤 사물을 겉만 대충 훑지 않는다. 시인은 그 속내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 속내 저편에 숨겨진 또 다른 모습(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파헤친다. "너는 모래였던 나를 그리워할까"(모래거울)라거나 "거울이 깨졌다 박쥐 떼 날아올랐다"(있을 수 없는 풍토), "오후의 햇살이 자글자글 라면처럼 끓는 사막"(라면 끓이는 낙타), "길의 내장 속에 길이 있고"(길의 두껑), "마지막 지하철은 / 달의 귀를 잡고 달린다" 등에서 잘 드러난다.   

희망과 절망을 '보이지 않는 칼'인 시로 썰고 있는 여자

시인 송유미 <당나귀와 베토벤> 이번 시집은 모두 4부에 시 59편이 가대기처럼 이 세상 곳곳을 갈고리로 찍어 나르고 있다.
▲ 시인 송유미 <당나귀와 베토벤> 이번 시집은 모두 4부에 시 59편이 가대기처럼 이 세상 곳곳을 갈고리로 찍어 나르고 있다.
ⓒ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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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유인지 아버지는 교도소에 가셨다 볼 일이 있다고 집을 나간 엄마는 며칠 째 소식이 없었다 수도관이 터지고 하얀 밀가루 같은 눈이 내렸다 산동네 무서운 바람은 지붕을 밤새도록 뜯어냈다 / 나는 오빠의 털모자를 쓰고 오빠는 아버지의 작업복을 입고 면회 가는 길, 이웃사람들은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 몇 장을 주머니에 넣어주며 꼭, 사식을 차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 92쪽, '엄마 걱정' 몇 토막

시인은 나이 일곱 살 때 몹시 아프고도 쓰린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 멀쩡한 아버지가 갑자기 교도소로 끌려갔다. "볼 일이 있다"고 집을 나간 어머니는 소식조차 없다. 아빠, 엄마를 부탁할 사람도 없는데. '사식'이 뭔지 '차입'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오빠와 함께 아버지 면회를 간다. "송송 구멍이 난 유리창 앞에서 아버지와 오빠는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닭똥눈물"만 뚝뚝 떨구다 맥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밤마다 우리 집 지붕을 뜯어내"는 "산동네 무서운 바람"만 거칠게 부는 그 집으로. 오누이는 부모가 없는 집 "지붕을 뜯어내다, 벽을 뜯어내기 시작한" 그 매서운 바람을 피해 통장집 행랑에서 잠을 잔다. 그때 "너희 아버지는 아무 죄가 없고, 너희 엄마 걱정도 절대 하지 말"라는 통장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통 알 수 없다.

시인 아버지는 무슨 죄로 잡혀갔을까. 시인 어머니는 또 어디로 가셨을까. 송유미 시인이 지닌 시세계는 어쩌면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몸이 짐일 때가 있었다"(가대기 시인)라거나 "내용이 환한 삶처럼 병 속의 새는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콜라병 속에 새 한 마리 산다), "시인과 혁명을 좋아했던 아버지"(아버지 꽃 핀다), "나의 등대는 떠날 길을 비출 뿐 길을 떠나지 않는다"(등대에게 길을 배우다) 등도 그 아픈 기억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시인 송유미가 펴낸 세 번째 시집 <당나귀와 베토벤>은 이 세상이 지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보이지 않는 칼'인 시로 썰고 있다. 시인은 기쁨을 썰면 슬픔이 되고, 슬픔을 썰면 기쁨이 되고, 희망을 썰면 절망이 되고, 절망을 썰면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이 늘 마음에 앉아 이 세상을 흔들고 있기 때문에.    

시는 저만치 아침이슬을 빛내는 햇살이 아니다

"산더미같이 쌓인 그릇을 씻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선다 / 밥공기들을 하나하나 '퐁퐁'을 묻혀 닦아내다가 / 문득 씻지도 않고 쓰고 있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진다 / 먹기 위해 쓰는 그릇이나 살기 위해 먹는 마음이나 / 한번 쓰고 나면 씻어 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 /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 더렵혀지고 때 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 없다" -70쪽,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몇 토막

그릇을 씻으며 스스로 마음을 '퐁퐁'에 비춰보는 이 시는 작가 양귀자 장편소설 <천년의 사랑>에도 실려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흔히 시라고 하면 저만치 아침이슬을 빛내는 햇살쯤이나 되는 줄 착각한다. 이는 시를 유리박스에 가두는 일에 다름 아니다. 송유미 시가 더욱 빛나는 것은, 시는 그런 보석 진열장 같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꼼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가 양귀자는 "아주 오래 전의 일인데도 송유미의 시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를 우연히 발견했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라며 "단지 설거지만 하고 있을 뿐인데, 시의 언어들이라고 해야 냄비거나 '퐁퐁'이거나 솥이 거의 전부인데, 난해한 반전 한번 주자 않았는데, 그럼에도 송유미의 시를 읽는 순간 그냥 물처럼 스며들었다"고 썼다.

시인 김종길(전 고려대 영문과 교수)은 이 시집 표4에서 "시인 송유미의 시는 치밀하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이러한 특성은 자연과학자나 분석철학자에게서 흔히 보는 바로 시인에게는 드물게 밖에 볼 수 없는 특성"이라며 "이 특성이 송유미 시인의 다정다감한 시의 짜임새를 지탱하고 있다"고 적었다.

시인 송유미는?
서울에서 태어나 <시조문학>과 월간 <에세이>, <부산일보>(1993년 시조), <동아일보>(1997년 시조), <경향신문>(2002년 시)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연극 '태자 햄릿', 동극 '지하철을 타고 온 아기 예수', 무용극 '분홍신 그 남자', '벌교의 달', '역' 등을 쓰면서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제16회 국제영화제 비프평론가로 뽑혔으며, 시전문지 <시와 사상>, 문화예술잡지 <예술부산>, <게릴라-관점 21> 등에서 편집장 및 책임 편집위원을 맡았다. '수주문학상', '전태일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받음.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당나귀와 베토벤

송유미 지음, 지혜(2011)


#시인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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