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가 좋아져 있다면 어떨까'한 번쯤은 해볼 만한 상상이다. 자신의 지능지수가 지금보다 2배 정도 높아진다면 세상살이에 편리한 점도 많을 것이다.
천재까지 되지는 못하더라도 일반인들보다 뛰어난 수재가 될 가능성도 많다. 남들이 헤매는 복잡한 공식이나 원리도 척척 이해하고 계산기가 필요없을 만큼 암산 능력이 빨라질 수도 있다.
자신의 과거도 빠짐없이 기억하고(이건 나쁠 수도 있겠다), 어려운 책도 술술 읽히는 데다가 글쓰는 실력(!)도 향상될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능지수만 높아졌을 때의 얘기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2배씩 지능지수가 높아진다면 그때는 자신의 머리가 좋아진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진다.
하긴 자신의 머리가 좋아지는 동안 남들의 머리는 그대로인 그런 행운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의 지능지수가 한꺼번에 향상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두 배로 변한 지적 능력열 살 짜리 아이는 혼자서 스스로 미분을 '발견'해내고 직장인들은 몇 달 동안 골치를 앓던 문제의 해결책을 떠올린다. 과학자들은 우주탄생의 원리를 밝혀내고 생로병사의 비밀에도 접근한다. 적은 동력으로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기관을 창조하고, 광속을 뛰어넘어 우주를 여행하는 방법도 깨우친다.
이런 일들만 있다면 지능지수의 향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부작용이 있다. 좋아진 머리를 범죄에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좀처럼 꼬리를 밟히지 않는 연쇄살인범이나 희대의 사기꾼도 탄생할 수 있다. 천재적인 군사전략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인물도 나올지 모른다.
SF 작가 폴 앤더슨의 1954년 작품 <브레인 웨이브>는 바로 이런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작품 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신경체계가 엄청난 속도로 발달하게 된다. 인간의 대뇌피질에서 발견되는 뉴런의 기능이 아주 빠르고 정밀하게 흐른다. 이것은 지능지수의 급격한 향상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로 과학기술과 의학, 정치, 경제가 발전한 유토피아가 만들어진다면 좋겠지만 작품 속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하지 않던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 노무직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나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지능이 높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둔다.
공장과 농장에서 사람들이 떠나고 식량을 비롯한 많은 생필품들을 구하지 못하게 된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정부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변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도 나뉜다. 인류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렸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갑자기 높아진 사고력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붕괴된 사회정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인류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변화에 직면하는 셈이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가장 커다란 무기인 '지능'을 증폭 시킨 것이다. 어쩌면 늘어난 지능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한 인물은 "인간은 더 이상 영리해질 필요가 없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리해진 인간들 때문에 사회는 위기를 맞는다. 체제의 붕괴는 여러가지 방법과 원인으로 일어날 수 있다. 폭동이나 전쟁, 경제파탄, 기후변화 등. 대신에 <브레인 웨이브>에서는 사람들의 이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질서가 무너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보잘것 없으며 부족한지, 자신의 일이 얼마나 초라한지, 자신의 신념과 관습의 한계가 얼마나 협소하고 무의미한지 깨닫는다. 평생 신문 한 장 읽어본 적 없던 노인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가 되면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인간성이나 사고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지능만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라면 변화가 꼭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가능성도 많다. 지능이 높아진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브레인 웨이브> 폴 앤더슨 지음 / 유소영 옮김. 문학수첩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