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청와대와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등 민간인 불법사찰세력과 영화 속 조직폭력단은 꼭 닮았다.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주무관의 순차적인 폭로 내용을 접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조폭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나오는 내용이 '덮어쓰기'다. 두목은 살해할 대상을 지목하고, 하급 조직원이 이를 실행한다. 경찰에 체포된 조직원은 아무도 믿지 않는 '나 혼자 결심하고 실행한 일'이란 진술을 반복하고, 두목은 '나는 전혀 몰랐다'고 둘러대고, 경찰은 살인교사의 증거를 찾아 헤멘다. 혹은 범행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조직원이 '형님' 대신 모든 혐의를 덮어쓰는 경우도 있다.
청와대와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증거 인멸과정에도 바로 이 '덮어쓰기'가 등장한다. 대포폰을 지급하고 증거인멸을 지시한 청와대가 이 사건을 총리실 직원이 처벌받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다는 정황은 장 주무관이 <오마이뉴스> 팟캐스트 방송 '이슈 털어주는 남자'(이털남)를 통해 공개한 최종석 전 행정관과의 대화 녹음에서 이미 드러났다. 조폭 두목의 혐의를 일개 조직원에게 덮어씌우듯, 청와대의 증거인멸 개입을 총리실 직원들에 몽땅 덮어씌우려 한 것이다.
문제는 불법사찰 사건 수사가 조폭 사건 수사만도 못하다는 점이다. 장 전 주무관에 따르면 검찰 수사 과정에서 그는 대포폰 지급과 증거인멸 지시가 청와대로부터 왔다는 걸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해당 내용이 담긴 신문조서를 법정에 제출하지 않았다. 조폭수사에 비유하자면, '형님이 살인을 지시했다'는 피의자의 진술이 있었지만 수사관이 "못 들은 걸로 할게"라며 넘겨버린 상황이다.
조폭처럼 '뒤 봐주겠다' 약속해놓고 미국 도피조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또다른 장면은 '형님'이 범행을 대신 저지른 조직원에게 '출소 뒤엔 내가 널 책임질 테니, 맘 편히 있다 와라'고 약속하는 대목이다. 몇몇 영화에서 하급 조직원은 복역하다가 출소 뒤 행동대장 같은 중책을 맡는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조직원의 가족은 '형님'이 보살펴준다. '형님'의 혐의를 덮어쓰고 감옥에서 썩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요 '뒤 봐주기'다.
장 전 주무관이 공개한 녹음에서 증거인멸 혐의를 덮어쓰도록 '권유'한 청와대 최 전 행정관도 장 전 주무관의 취직자리를 보장하겠다거나 필요하면 현금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하며 끝까지 입을 다물라고 회유했다.
장 전 주무관은 2억 원을 준다던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으로부터 2000만 원을 건네받았다가 돌려줬다고 주장한 바 있고, 19일엔 "작년 4월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윤리비서관이 마련했다는 5000만 원을 받았다"고도 폭로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폭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 '뒤를 봐주겠다'던 최종석 전 행정관은 작년 8월 미국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 주재관으로 가버렸고 장 전 주무관의 폭로가 시작된 시점부터는 잠적해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이영호 청와대 전 고용노사비서관은 불법사찰 사건 수사 당시 퇴직해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재수사 시 신병 확보부터 서둘러야 할 판이다.
조폭 조직문화가 그대로... 국민 세금으로 상납
'조폭 생태계'를 떠받치는 경제적인 토대는 상납금이다. 각 조직원들이 구역 내에서 불법적으로 거둬들이는 '보호비'를 모아 '형님'에게 보내고 그 '형님'은 그 위의 '큰 형님'에 보낸다. '큰 형님'은 이 돈으로 조직을 유지한다.
장진수 전 총리실 주무관에 따르면, 이 상납의 고리는 민간인 불법사찰을 지시하고 행한 이들 사이에도 일상적이었다. 공직윤리지원실로 나오는 월 400만 원의 특수활동비 가운데 280만 원이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로 가서 이영호 비서관에 200만 원, 조재정 행정관에 50만 원, 최종석 행정관에 30만 원씩 분배됐다고 한다. 400만 원 중 나머지 120만 원은 이인규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에게 갔다는 게 장 전 주무관 주장이다.
결국 어떻게 쓰여졌는지 불명확한 상납금의 출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민이 내는 세금이다. 결국 국민으로부터 거둔 세금을 자기들 멋대로 상납해 공무집행이 아니라 불법사찰 행위에 악용됐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조직문화에서도 비슷하다. <이털남>에 출연한 이석현 의원에 따르면 조직 내에서 '이비'로 호칭됐던 이영호 전 비서관이 불참한 상태에서 회식이 열리기라도 하면, 전 참석자가 부동자세를 취하고 이인규 전 지원관이 '이비의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조폭의 행태다.
아무런 말이 없는 뻔뻔한 청와대
이런 상황인데도 청와대는 아무말이 없다. 지난 2010년 7월 김종익씨의 폭로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터진 뒤 청와대는 이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검찰이 밝힐 것', '재판 중인 사안이다', '재수사 여부는 검찰이 결정하는 것' 등의 이유로 아무런 언급을 내놓지 않고 있다.
최종석 전 청와대 행정관의 입에서 '장진수 주무관이 입을 다물지 않으면 민정수석실도 무사할 수 없다'는 언급이 나왔지만, 청와대는 사과는커녕 진상조차 파악할 생각도 없다.
다시 조폭 얘기로 돌아가자면, 친구들의 우정과 갈등을 그리는 성장영화에서 조폭영화로 전환되는 2001년 작 영화 <친구>에서 준석(유오성이 연기)은 조직원에게 상대 조직의 맞수로 떠오른 친구 동수(장동건이 연기)를 살해하라고 지시한다. 동수는 준석의 조직원의 칼에 수십 차례 찔려 결국 죽는다.
준석은 자수를 하긴 했지만, 법정에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의를 입은 준석은 법정에서 "네, 제가 지시했습니다"라고 시인한다. 그렇게 진술한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준석은 "쪽팔리서…"라고 답한다. 이 대사가 가진 속뜻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적어도 준석은 '건달이 거짓말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명분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정부 최고위층에서 불법사찰을 벌이고, 이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려는 조폭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도 청와대가 이를 그저 외면만 하고 있다면, 건달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국가기관을 악용해 범행을 저지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이게 들통난 뒤에도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