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좋은 일 뒤에는 꼭 나쁜 일이 따라온다는 속설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아침... 아 햇살은 또 왜 이리 미치도록 푸르른가!"
헌정 사상 첫 진보정당의 원내교섭 단체 구성 가능성이 거론되던 20일 아침,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트위터에 아리송한 글을 남겼다. '좋은 일'이란 이정희 공동대표의 역전승을 비롯해 통합진보당이 야권 후보단일화 경선에서 거둔 기대 이상의 성적을 언급한 것으로 쉽게 해석됐다. 반면 '나쁜 일'은 해석이 분분했다. 유 대표도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글이 올라온 지 몇시간 뒤 온라인에서는 실제 '나쁜 일'이 터졌다. 트위터를 통해 이정희 공동대표 보좌관이 당원들에게 보낸 '여론조사 조작 지시' 문자 인증 사진이 퍼지면서 새 정치의 '아이콘'이었던 이 공동대표는 한순간에 '구태 정치'의 공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성추문·부정경선... 통합진보당에 터진 '나쁜 일''나쁜 일'은 꼬리를 물었다. 경기 성남중원에서 민주당의 양보로 야권 단일후보가 된 윤원석 전 <민중의소리> 대표는 성추문 논란에 휩싸였다. 이 매체 대표로 재직하던 2007년 계열사 기자를 강제로 껴안는 등 성추행을 한 전력이 드러난 것이다.
진통 끝에 결론을 낸 비례대표 후보 공천에서도 잡음이 일었다. 성폭력 2차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 논란이 일고 있는 정진후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이 비판 여론에도 당선권인 4번에 배치됐다.
게다가 청년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는 조작 가능성이 제기됐다. 경선 결과를 담았던 서버의 로그파일(접속기록)에 외부에서 접속한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당 진상조사위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허술한 경선 관리는 오점을 남겼다.
부정 경선, 성추문 등 온갖 구태가 불거지면서 도덕성을 최고의 무기로 삼아야 할 통합진보당은 창당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이대로 가다가는 원내 교섭단체의 꿈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의 대응 자세에서는 절박한 위기위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정공법 대신 대충 뭉개고 가려는 조짐마저 보인다.
새누리당을 닮은 통합진보당의 대처법이정희 공동대표는 '여론조사 조작'을 보좌관의 실수나 과잉 충성 탓으로 돌리면서 출마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성추행 전력이 드러난 윤원석 전 대표에 대해서도 당은 침묵하고 있다. 정진후 전 위원장은 피해자모임 등의 사퇴 요구를 외면하고 비례대표 공천을 받았다.
이 같은 태도는 통합진보당이 구태정치 세력이라고 비난했던 새누리당과도 명백히 대비된다. 새누리당은 '여성 구멍'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석호익 전 KT 부회장의 공천을 박탈하기로 했고 역사관이 문제가 된 박상일(강남갑)·이영조(강남을) 후보의 공천도 다시 거둬들였다.
과거 한나라당 시절에도 기자를 성추행 했던 최연희 의원은 사실상 출당 조치를 당했고,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을 했던 강용석 의원은 당에서 쫓겨났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에는 '성추문당'이라는 오명이 끝까지 따라다녔다. 당시 통합진보당 인사들은 이들의 의원직 사퇴까지 촉구한 바 있다.
만약 이정희 공동대표가 출마를 강행한다면 통합진보당은 비서가 '선관위 디도스 테러' 사건을 저질렀던 최구식 의원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더 근본적으로 당의 얼굴인 이정희 대표가 도덕성에 상처를 입은 채로는 앞으로 보수 정치의 부도덕성이 발견된다 한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장해제를 당할 수밖에 없다. 힘들게 성사시킨 전국적 야권연대마저 뿌리째 흔들릴 가능성도 크다.
또 윤원석 전 대표 등 성추문에 관련된 인사들이 당선돼 국회에 들어온다면 앞으로 또 일어날지도 모르는 '제 2의 강용석 사건'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다.
정치생명 위기 맞은 이정희 대표가 사는 길통합진보당은 올 신년사에서 "2012년 무능하고 부패한 구태정치 세력이 몰락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진보세력이 한국사회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며 "선명하고 힘 있는 진보정당으로 정치혁신을 주도하고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낼 것"이라고 밝혔다.
통합진보당이 "참신하고 유능한 진보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새누리당을 비판했던 잣대를 똑같이 당내에도 적용해야 한다. "선명하고 힘 있는 진보정당으로 정치혁신을 주도"하려면 고통이 따르더라도 당내의 구태를 먼저 털고 가야 한다.
"출마해서 심판을 받겠다"며 국민들에게 책임을 떠 넘겨서는 안된다. 국민들에게 먼저 제대로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게 통합진보당이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진보 정치를 싹틔우고 키워온 통합진보당 내에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인물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는다.
민주통합당보다, 특히 새누리당보다 더 느슨한 총선 후보자 검증 시스템과 도덕성 기준으로는 새로운 '2013년 체제'를 열 수 없다. 진보정당다운 정공법만이 정치 생명의 위기를 맞은 이정희 대표와 통합진보당을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