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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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고전적으로 얘기하자면 선거란 선거권을 가진 이들이 공직에서 일할 이들을 투표로 뽑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투표로 뽑는다'는 행위에 있다. 두말할 것 없이 투표행위에는 선거권을 가진 자의 정치적 의사가 전제되어 있다. 이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는 두 개의 준거(準據)가 있다. 하나는 '심판'이라는 잣대고, 또 다른 하나는 '판단'이라는 잣대다.
유권자의 심판은 일반적으로 현재 집권하고 있는 정치세력 즉 여당에 대한 심판을 기본으로 한다. 정부와 집권여당의 공과를 따져서 채찍질할 것인지 힘을 더 모아줄 것인지 스스로의 정치적 의사를 결정해나가는 과정이 '심판'이다. 심판 결과가 좋으면 여당은 더 많은 지지의석을 확보할 수 있고, 심판 결과가 나쁘면 확보하고 있던 의석을 내놓아야 한다.
유권자는 또 '판단'을 통해 정치적 의사를 만들어 가는데 이 판단의 소재가 이른바 '이슈(선거쟁점)'다. 유권자는 선거이슈로 등장한 사회적 의제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궤를 같이하는 정치세력에 표를 준다. 선거이슈는 매우 민감한 휘발유 같다. 한번 불 붙으면 좀처럼 진화하기 쉽지 않다. 여야가 선거이슈를 선점하려고 기를 쓰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19대 총선은 참 희한한 선거다. 선거라는 정치적 이벤트에 전제되는 '집권세력 심판론'이 희석되고, '이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현재의 집권세력은 당의 간판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극렬한 심판의 대상이었다. 오죽했으면 새누리당 고위 당직자들이 "야당을 심판해야 한다"며 듣도 보도 못한 '야당 심판론'까지 들고 나왔겠는가. '심판론'이 확산되면 총선 참패는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위기를 모면하려는 집권여당의 '정치적 수사'였다.
또 불과 2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한미FTA'와 '제주해군기지문제'로 날 선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서 한명숙 대표 등 야당 지도부의 지난 발언까지 '복기'하며 공격할 정도였다. 두 사안은 가장 첨예한 선거이슈였고, 안보와 민주주의, 국익과 외교 등 굵직한 사회적 의제를 현실에 맞춰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한미FTA'와 '제주해군기지문제'라는 치열한 선거이슈가 사라진 자리엔 생뚱맞게 '공천 잡음'이 똬리를 틀었다. '심판론'은 '공천 책임론'이 대신했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던 2000년 총선의 최대 이슈는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발표한 것이 논란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당해 치러졌던 2004년 총선에선 '탄핵세력 심판론'이 모든 쟁점을 압도했다. '탄핵 역풍'을 맞은 당시 한나라당은 1당의 지위를 처음으로 내주는 시련을 겪었다.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2008년 총선을 '뉴타운'으로 도배하며 압승했다. 야당이 '뉴타운은 사기공약'이라고 버텨봤지만 살림이 힘들었던 서민들은 재개발의 꿈이 설령 '거품'이라도 좋았다. 물론 그 거품은 곧 터져 사라지고 말았지만.
'공천 잡음'이라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득 본 정치세력은?
아무튼, 후보자 등록 마감일인 23일 현재까지 4·11 총선의 최대 이슈는 '공천 잡음'이다. '공천 잡음'이 선거 이슈로 부상한 첫 선거가 되고 있다. 공천 잡음도 선거이슈가 될 수 있겠지만, 국민의 삶과 생활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는 '사회적 의제'는 아니다. 말 그대로 '잡음' 때문에 강정마을 주민들이 5년 동안 흘려온 피눈물이 묻히고 있고, 100년 나라 살림을 좌지우지할 '한미FTA'가 잊히고 있다.
안타깝게도 '공천 잡음'을 4·11 총선의 최대 이슈로 만든 장본인은 언론이다. 언론은 총선 이슈를 통해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고 점검하는데 인색했다. 여야의 공천 잡음을 마치 나라의 운명을 규정할 큰 사건처럼 만들어놓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경마식' 보도를 연일 남발했다.
그렇다면 '공천 잡음'이라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득 본 정치세력은 누구일까? 단연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끄는 새누리당과 이명박 정부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22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 시장을 방문한 박근혜 위원장은 한 손엔 동태전을 들고, 한 손으론 등을 토닥이며 인사했다.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다.
'공천 잡음'이라는 뜻하지 않은 노이즈 마케팅은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이명박 정부 심판론'으로부터 새누리당을 탈출시켜주었다. 더불어 '한미FTA'와 '제주해군기지문제' 두 현안을 '국익'과 '안보'라는 단어로 대충 뭉갤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렇게 여유를 되찾은 새누리당은 YTN이 한국선거학회와 공동으로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일과 2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0%에 가까운 지지율을 기록했다(새누리당 48.8%, 민주통합당 35.9%, 통합진보당 10.9%, 조사의 표본오차는 96% 신뢰구간에 ±1.54%).
선거는 여당이 이길 수도 있고, 야당이 이길 수도 있다. 여야의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선거쟁점을 통해 드러난 사회적 의제를 국민의 요구에 맞게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타당성을 떠나 주민의 인권이 공권력에 의해 유린되고, 법을 무시하며 자행되는 불법공사를 제어하는 사회적 강제가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미FTA'를 백지화하건 재협상하건 간에 나라에 손해를 끼칠 독소조항은 제거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는 국가의 자존 문제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이슈'가 중요하다. 이슈를 통해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승부를 겨루고, 그 승부의 결과에 따라 나라의 중요한 정책과 사회적 의제들을 국민의 이익에 맞게 깎고 다듬어야 한다. 이는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대의민주주의 체계를 유지하는 '민주공화국'이 유지되는 비결이기도 하다.
내일 아침엔 '공천 잡음'이 아닌 '선거 쟁점'을 비교 분석한 뉴스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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