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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시설 봄배추 주산지인 예산군 신원·탄중리에는 바다같이 펼쳐진 비닐하우스가 비에 젖어 있다. 오랜만에 내린 비 핑계로 밭주인들은 마을회관 골방이나 식당 구석방에서 낮술에 취하기도 했다. 농민들의 화제는 배춧값이다. "누구네는 너무 일찍 팔아 180만 원 밖에 못 받았고, 누구네는 끝까지 버티더니 300만 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 끝에 "정부가 비축물량을 확풀거나 중국산을 수입하면 절단 난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필자주>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리 현대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 본 창소·탄중리의 채소시설재배단지의 모습.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리 현대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 본 창소·탄중리의 채소시설재배단지의 모습.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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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봄배추 전국최대 주산지인 충남 예산군 신암·오가면과 신례원 일대 농민들은 요즘 배춧값이 올라 신명이 날만한데도, 근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언론매체들이 서민 물가 주범으로 봄 채소를 지목하고 있는데다 작년처럼 정부가 중국산 배추를 수입하는 등 시장개입을 해 수확기에 대폭락 사태를 몰고 올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더욱이 농민들은 농촌을 먼저 보살펴야 할 농림수산식품부(농식품부)와 농협중앙회가 상황실을 설치하고 봄배추 계약재배를 갑자기 늘리는 등 소비자 물가 안정을 위해 '감동적인 노력'을 펼치는 것을 보며 기가 막혀 하고 있다.

농민들은 "배추농사 10년 지어야 두 세 번 수지맞는데, 똥값이 돼 갈아엎을 땐 쳐다보지도 않던 농식품부와 농협(농협중앙회)이 배춧값이 오를만 하면 난리를 치고 있으니 농민처지가 참으로 고달프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들은 또 "배춧값이 폭락해 로터리 칠 때(갈아엎다) 농림부 장관이 출동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으면 얘기해 보라"고 반문한 뒤 "이번에도 작년처럼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가격을 떨어뜨리면 정말로 가만있지 않겠다"고 별렀다.

'봄배추 가격을 올려놓은 일등공신은 농식품부'라는 우스갯소리도 농촌현장에서 심심치 않게 나온다. 서규용 농식품부 장관이 예산군 배추재배 현장에 다녀간 뒤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배추 포전 매매(일명 밭떼기) 가격이 올라 '장관배추'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농민들과 상인들은 물가안정을 위한 급작스런 장관의 행보를 보고 봄배추 물량이 부족해 가격이 오를 것을 직감했고, 그것이 포전 매매 가격에 반영된 것이다.

시설 봄배추는 1월 초에 모를 키워 2월 초·중 순경에 정식 (밭에 옮겨 심음)하고 4월 중순에서 5월 초순까지 수확한다. 올해 2월 초 포전 매매 가격은 비닐하우스 1동(160여평)에 150만 원 안팎이었다. 예년에는 12월 말부터 상인들이 농가를 방문해 밭뙈기 계약을 했는데, 작년 수확기에 배춧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상인들의 손해가 컸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관망만 하던 상인들이 2월이 돼서야 서서히 밭뙈기 매매에 나섰다고 농민들은 말했다.

식품부·농협중앙회, "물가잡겠다"며 뒷북 행정만

 예산군 오가면 신원리에서 농민 박하선(49)씨가 배추밭을 보살피고 있다.
 예산군 오가면 신원리에서 농민 박하선(49)씨가 배추밭을 보살피고 있다.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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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물량이 적어 봄배추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마침 2월 18일 서규용 농식품부장관이 헬기를 타고 예산으로 날아왔다. 배춧값 폭등을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서 장관은 오가면 신원리의 한 농가를 방문해 배추작황을 둘러본 뒤에 "배추수급 안정을 위한 농협의 역할이 저조하다"고 질타했고, 농협이 적극 나서 계약재배를 하라고 주문했다.

서 장관이 다녀간 후 포전 매매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1동에 150만 원 하던 것이 곧바로 200만 원 선을 넘었고, 3월이 돼 300만 원에 거래가 형성됐다. 당시 서 장관은 물가안정을 위해 농협이 즉각적인 계약재배로 물량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지만, 이마저도 때를 놓쳤다. 이미 대부분의 배추가 상인들 손으로 넘어간 뒤였고, 농협이 제시한 가격(1동에 200만 원)으로는 배추밭을 살 수 없었다. 봄배추 최다 생산지 농협인 신암·오가농협은 3월 22일 현재까지 계약재배 물량을 4동(600여 평) 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두 농협 경제상무는 "어쨌든 장관이 다녀간 뒤에 공교롭게도 배춧값이 치솟았다. 1동에 150만 원 하던 것이 갑자기 250만 원으로 뛰었다"고 입을 모아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신암농협 손영승 상무는 "그 일(서 장관이 다녀간 후)이 있고 나서 농협중앙회에서 1동당 200만 원에 계약재배를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는데 그 돈 가지고는 거래를 할 수 없었다. 농협이 계약재배 물량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농민들이 가격을 높게 받았으니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물가관리부처도 아닌 농림식품부의 어설픈 '뒷북행정'이 현장에서 여지없이 실패한 것이다. 농협중앙회의 굼뜬 대응력도 도마에 올랐다.

오가농협의 한 직원은 "장관은 지역농협 보고 계약재배를 않는다고 호통치는데 지역농협 자체여력으로는 자금 때문에 계약재배를 할 수가 없다. 중앙회가 탁상회의만 하지 말고 최소한 1월 중에라도 보조해 줄 수 있는 물량을 확보해 지역농협에 물건을 사들이라고 시달했어야 했다. 장관이 헬기 작전(예산에 오고간 뒤에)을 한 뒤에 가격결정(1동에 200만 원)을 하면 장사꾼들이 가만 있겠냐"고 꼬집었다.

올해 시설 봄배추 30여 동을 심은 오가면 신원리 민병도 이장은 "(배춧값이 올라 상인들과) 흡족하게 계약을 했어도 출하가 끝날 때까지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정부가 작년같이 또 시장개입(비축물량 풀고 중국산 수입)을 하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올해같이 (배춧값이) 비쌀 때만 신경 쓰지 말고 싸서 갈아엎을 때도 신경을 써줘야지 농민들이 살 거 아니냐"며 정부의 꾸준한 관심을 촉구했다.

민 이장은 또 "농협이 계약재배를 통해 수급조절을 하려면 포전 매매 상인들보다 먼저 선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봄배추 파종시기인 12월부터 안정된 가격수준에서 계약재배를 하면 농민도, 소비자도 이로울 것"이라고 충고했다.

한편 농협중앙회 관계자에 따르면 "농업관측 속보를 통해 1월 초에 봄배추 수급불안이 생길 것을 예상했으며, 이때부터 수차례 대책회의를 했고, 3월 9일 계약재배 물량을 8만 톤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농협의 계약재배 노력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농업진흥청 자료에 의하면 예산군의 시설 봄배추 재배규모는 전국 주산지인 창녕, 나주, 영암, 정읍, 완주, 보령, 서산, 평택 중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1년에는 예산군에서 120㏊의 시설 봄배추가 재배돼 최고치를 기록했고, 4월 수확기에 대폭락해 많은 농가들이 밭을 갈아 엎었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시설 봄배추#장관배추#배추 계약재배#배추값 폭락#중국산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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