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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맞는 필리핀 여심 로웨나씨는 필리핀에서 한국에 온 지 17년째 되지만 늘 겨울이 힘들다. 따뜻한 봄을 맞은 로웨나 씨에게 활짝 핀 개나리 꽃은 마냥 반갑다.
▲ 봄을 맞는 필리핀 여심 로웨나씨는 필리핀에서 한국에 온 지 17년째 되지만 늘 겨울이 힘들다. 따뜻한 봄을 맞은 로웨나 씨에게 활짝 핀 개나리 꽃은 마냥 반갑다.
ⓒ 허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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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더 잘 되기를 바라고 희생적으로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마음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필리핀 출신 다문화가족으로 한국 생활 17년인 로웨나 라콘사이(Rowena Laconsay, 40)씨. 그녀의 부모도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특별히 큰딸이었던 로웨나는 머리가 좋아 부모님에게는 큰 희망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코 부자가 아니었다. 산골에 사는 매우 가난한 농부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로웨나를 일찍부터 유학을 보냈다. 비교적 환경이 좋은 먼 도시로 보내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했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 번 돈으로 대학에도 보내줬다. 어버이 슬하에 딸만 셋이었지만 모두가 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두 동생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도우며 가까운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로웨나는 대학에서 행정학과 금융재정학을 전공했다. 그녀의 꿈은 졸업한 후에 은행원으로 취직하는 것이었다. 필리핀에서도 은행은 화이트 컬러로서 남녀 누구에게나 최고의 직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턱이 너무 높았다. 로웨나는 졸업하고 은행 대신 조그마한 회사에 취직했다. 이제 조금씩 받는 월급으로 동생들의 학업을 도와야만 했다. 부모님도 그 동안 힘들게 공부시켰던 큰딸에게서 이제 집안을 도와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졸업하고 취직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로웨나가 덜컥 결혼을 해버렸다. 그것도 국제결혼이었다. 신랑은 6살 연상의 한국 사람이었다. 부모님은 기가 막혔지만 딸의 선택을 막을 길이 없었다. 1995년 아버지는 무척 서운해 하시면서 딸을 멀리 한국으로 시집을 보내고 말았다. 그 사이 큰딸의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했던 둘째 딸은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1학년만 마치고 중퇴해야만 했다. 언니가 필리핀을 떠난 후에는 가세도 기울어 학비를 조달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벌어서 동생들을 공부 시켜야 했는데 갑자기 결혼하면서 부모님께 너무너무 죄송했어요. 한국에 시집온 후에도 친정 집에 가기가 두려웠죠."

물론 이역만리에 떨어진 조국에 자주 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늘 부모님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면서 시집 식구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한국 사람이 되어갔다.

그녀가 처음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은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이다. 다행히 같은 도시에 필리핀에서 같이 시집온 동포가 있었다. 그녀도 같은 시기에 로웨나씨와 함께 한국 사람과 합동결혼을 해 평택시 도일동으로 시집을 왔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는 필리핀 사람이 흔하지 않았다. 우연찮게도 같은 도시에서 살기 시작한 두 여인은 자주 만나 향수를 달래며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었다.

"그 언니에게 자주 놀러갔어요. 언니네 집은 넓은 텃밭도 있고 나무며 숲도 볼 수 있어서 절로 고향 생각이 나곤 했죠. 제가 사는 서정동은 도심이라 답답하잖아요. 그래서 언니네 집에 가면 하루 종일 놀다가 오후 늦게 돌아오곤 했어요. 그래도 시집 어른들께서 이해를 해 주셨죠."

그러나 그 필리핀 언니는 얼마 전 이충동의 아파트단지로 이사를 나와 아쉽단다.

"신랑은 장남이었어요. 한국에서는 장남이 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지만 막상 시집에 오니 손아래 시누이 둘, 시동생 하나 이렇게 모두 일곱 식구가 같이 살게 됐죠."

그녀에게는 전혀 생소한 결혼문화였다.

"필리핀에서 결혼하면 자녀와 부모는 완전히 독립해서 살아요. 저는 처음에 너무 힘들어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지요. 하지만 시댁 식구들이 저에게 너무 잘해 줬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어요. 어머니께서는 저를 친딸처럼 여기시고 잘 대해 주셨어요. 심지어 시누이가 질투할 정도였죠."

남편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들어왔지만 낮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시어머니와 고부간의 정은 날로 두터워져 갔다. 비록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로웨나씨를 데리고 나가 외국인 며느리를 소개하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지역에 한글을 무료로 가르쳐주는 다문화센터 같은 것이 없었잖아요. 수원이나 서울까지 나가서 대학에 개설된 한글강좌를 들어야 하는데 비용도 제법 들고 거리도 멀어 아무나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TV 드라마를 즐겨보면서 한글을 익혔지요. 어머니와는 간단한 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한국을 찾은 동생과 함께 이번 봄에 동생을 한국에 초청했다. 한결 따뜻해진 4월의 봄날씨도 동생 로날린씨에게는 춥다. 동생은 3개월간 평택 서정도의 언니집에 머물 계획이다.
▲ 한국을 찾은 동생과 함께 이번 봄에 동생을 한국에 초청했다. 한결 따뜻해진 4월의 봄날씨도 동생 로날린씨에게는 춥다. 동생은 3개월간 평택 서정도의 언니집에 머물 계획이다.
ⓒ 허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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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에서 한류 바람이 강하게 불기 전이었지만 한국 드라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에게 여전히 재미있다고. 당시 기억나는 드라마로는 '짝사랑', '정 때문에', '겨울연가' 등을 꼽았다. 처음 3년 동안 아기가 없이 지내면서 그녀는 열심히 혼자 한글을 독학했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 한국의 가족관계나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첫 아이를 낳은 후에 한국말을 가르치며 기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죠."

지금까지 그녀는 딸 셋을 낳았다. 그 사이 시누이들과 시동생을 모두 출가시켰다. 지금도 여전히 칠순 시부모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 일곱 식구의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착한 며느리답게 로웨나씨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점으로 젊은이들이 어른을 대접하는 경로효친 사상을 꼽았다.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도 조국 필리핀이 본받을 만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가족끼리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로 너무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이 좋지만 않다고.

"부부가 맞벌이하면서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니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도 없어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에게 좋은 옷이나 장난감을 많이 사주지 못해도 시간을 내어 같이 영화도 보러가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녀도 요새 가까운 곳에 있는 보일러 부품회사에 다니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세 아이들은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1학년에 각기 다닌다. 학습지로 영어, 국어, 수학 과목을 보충하면서 학교에서 실시하는 방과후 교실에 보내는 정도다. 그러나 앞으로 점점 늘어날 교육비를 걱정하는 그녀는 자녀들을 위해 충분히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듯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평택시사신문>에도 실렸습니다.



#로웨나#다문화가족#필리핀#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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