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2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4·11 총선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새누리당의 단독 과반으로 끝난 지 열흘께 지난 23일부터 대선예비후보등록이 시작됐다. 이제는 올 12월 대선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에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박근혜라는 절대강자가 군림하고 있는 집권당에서는 벌써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정몽준 의원 등이 대권도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에 비하면 야권은 상대적으로 물밑에서 이른바 '잠룡'들이 정중동의 행보를 취하는 듯하다. 아직도 총선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민주통합당은 민주통합당대로, 통합진보당은 통합진보당대로 총선 후폭풍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다.
선거가 끝나고 뒷말이 많기로 치자면 아무래도 이긴 쪽보다 진 쪽이겠지만, 지금 야당에서 나오는 뒷말을 들어보면 총선결과에 대한 이런 분석으로 연말 대선에서 야권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앞선다.
그 중 가장 첨예한 의견대립의 예를 들자면, 야권연대의 과정에서 좌편향이 있었고 그 때문에 중도층을 놓쳤다는 주장과 확실한 개혁적 진보성향을 보이지 못한 탓에 원래 지지층을 결집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양쪽 모두 일리가 있지만 심층적으로 보자면 둘 다 틀렸다.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의 모든 현안을 좌-우 혹은 보수-진보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은, 말하자면 <조선일보>의 프레임이고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87년 체제의 잔재다.
좌우개념으로 설명한 수 없는 '한국사회'2012년의 대한민국은 박근혜와 새누리당에서 (그 진정성은 차치하더라도)경제민주화나 무상보육을 들고 나오는 그런 나라다. 진보적인 인물로 알려진 시민단체 출신의 송호창 변호사(민주통합당, 의왕·과천 초선 당선자)는 지난 23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실제 나는 환경 문제나 교육 문제에 보수적이다, 그러나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진보적이다"라며 "이런 나를 두고 진보 혹은 보수라고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관련기사:
"민주당 감동인물 없으면 대선도 필패")"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자신을 보수도 진보도 아니라고 했던 안철수는 어떤가? 지금의 한국사회에는 기존의 좌우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너무나 많아졌다.
좌우대립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세력은 당연히 보수, 즉 '우'에 있는 세력이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약간이라도 '좌'에 속했던 사람들은 적어도 남한에서는 거의 씨가 말랐던 탓이다. 대표적인 예가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었다. 정부의 어설픈 수입개방에 반대하던 여론은 <조선일보> 등에서 이 문제를 좌우대립으로 몰고 가면서 4:6 정도의 균형을 이루었다. 안전한 먹을거리와 검역주권의 문제도 좌-우 혹은 보수-진보의 패러다임에 들어가면 절대보수 지지층 35%의 벽을 넘기 어렵다.
물론 좌-우나 보수-진보를 따져야 할 때도 있고 그것이 유익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방송인 김제동의 이 유명한 어록을 벗어나지 않는다. "웃음에는 좌우가 없습니다."
야권 스스로 이번 총선결과를 좌-우나 보수-진보의 대립이라는 틀로만 보는 한, 올바른 총선평가는 고사하고 지난해부터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안철수 현상'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대개의 경우 좌-우나 보수-진보는 일부 정치인과 일부 언론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경제문제, 경제·복지정책만으론 해결 안 된다
또 다른 논란의 축은 민생이다. 야권이 이번 선거에서 지나치게 반MB 혹은 정권심판론에만 매몰된 나머지 민생문제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표심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민생 우선론'은 특히 진보당이나 진보인사 혹은 '좌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 또한 표면적이고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이다. 2년 전 6·2 지방선거 때 가장 훌륭한 민생복지정책을 들고 나왔던 심상정 후보가 MB심판론에 밀려 중도 사퇴했던 사건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이번 선거에서 민생을 가장 많이 외친 정치인은 오히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었다. 게다가, 소위 '좌파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경제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조차 정치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 '좌파운동'의 출발점이다. "문제는 정치가 아니고 경제야"라는 언명은 적어도 좌파운동 혹은 진보운동과는 양립하기 어렵다. 경제문제 혹은 먹고 사는 문제조차도 가장 고도화된 정치의 문제 혹은 권력의 문제로 접근해야만 근본적으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인류의 오랜 노력은 모두 고도의 정치투쟁이었고 첨예한 권력투쟁이었으며 따라서 결국에는 민주주의의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것이 '진짜 좌파'다. 경제문제는 경제정책이나 복지정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MB만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MB 치하에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뿐더러 새로운 문제만 더욱 불거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따라서 이번 총선 결과를 민생우선론과 정권심판론의 선택의 문제로 환원하는 분석은 본질적이지 않으며, 이런 구도로는 대선에서도 필패를 면하기 어렵다.
추악한 모습 드러나도 잘 버티는 그들...구조 문제그렇다면 이번 총선에서 야권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떤 교훈으로 대선을 준비해야 할까? 무엇보다 야권은 시대를 읽어야 하고 시대에 도전해야 한다(부조리한 현실에서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 보수 세력은 부조리한 시대에 도전할 이유가 없다). 예컨대 MB시대는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았다. 가까이는 김대중-노무현 집권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며 벼르던 사람들이 있었다.
참여정부 5년 내내 이들은 노무현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패악스런 짓도 서슴지 않았다. 멀쩡한 경제가 갑자기 사망했고 말 한마디에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검찰, 고급관료, 선관위, 군 장성, 언론, 재벌 등 한국사회에서 힘깨나 써 오던 자들은 대부분 이 음모에 가담했다. 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이 "시대를 바꾸자"고 입 바른 소리하는 대통령 한 명 때문에 위협받는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광운대 BBK 동영상'까지 억지논리로 덮으면서 MB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했던 그들에게는,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병폐 속에서 자신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을 지켜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
MB정권이 선출 권력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폭정으로 치달은 데에는 권력을 적절히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야 할 기득권세력이 오히려 그에 빌붙어 탐욕을 취한, 그리고 그것이 수월하게 작동했던 구조적인 요인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선거로 뽑힌 권력이 얼마나 부패할 수 있는지 또 국가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지 그 구조화된 내면을 우리는 읽어야 한다.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은 뒤, 온갖 추악한 권력형 범죄행위가 드러나도 여태 굳건히 잘 버티고 있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다.
예컨대 정상적인 민주국가라면 총선일정이나 그 결과와 무관하게 민간인 사찰과 증거인멸 사건만으로도 MB는 탄핵되었어야 한다. 청와대와 함께 범죄행위에 가담한 검찰이 제대로 이 사건을 수사할 리 있겠는가. 집권당이 선관위를 사이버테러해도, 불법대선자금의 정황이 새로이 드러나도,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가 연일 쏟아져도, 정부부처가 광우병 관련해서 국민의 안전보다는 미국 농무부의 눈치나 보고 있어도, 언론이든 국가기구든 어느 하나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 새로운 파시즘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아마도 집권여당이 이번 대선에서 정권을 재창출한다면 이런 추세는 더욱 교묘하게 강화될 것이다.
야권, 노무현이나 박원순 모델 따라 하기 힘들 것그러니까 정권심판론은 단순히 MB 개인이나 권력핵심부의 패악질에 대한 심판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MB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한국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개혁으로까지 이어져야만 한다(지난 기사의 표현을 빌자면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을 깨야만 한다. 관련기사 :
2개나 가진 박근혜, 이대로면 대선도 이긴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의 정권 심판론이 다소 공허하게 들린 이유는 시대와 구조에 대한 통찰과 그것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노력,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대에 대한 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말했던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600년의 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무현의 실정이 MB정권을 불러왔다'는 세간의 통설 뒤에 숨겨진 그 모순과 반역의 시대까지는 꿰뚫어보아야 진정한 정권심판이 가능하다.
요컨대 선거구호로서의 정권심판은 그 내용면에서 실질적으로는 '시대의 심판'을 담지해야 했다. 이번에 다시 국회로 들어간 노회찬 통합진보당 의원이 처음 국회에 들어갔던 8년 전 "불판을 갈아야 한다"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8년이 지난 지금에는 다시 불판을 갈자고 하지 않았을까? 그새 불판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오히려 그새 우리의 불판은 고기 한 점 구워 먹기 힘들 정도로 더욱 새카매졌다.
아마도 이번 대선에서 야권은 2002년의 노무현 모델이나 심지어 지난해의 박원순 모델조차도 그대로 따라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점은 시대에 맞서 싸웠던 노무현의 정신이 2002년 기적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이다(박원순 또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지금 시대에 도전하며 서울시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 점만큼은 2012년 대선에서도 여전히 사실이다. 심판론이나 복지론 혹은 그 어떤 복잡하고 세세한 선거공학이 난무하더라도 시대를 정확히 읽고 거기에 응전하지 않는 정치인이라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없고 마음을 얻기도 어렵다.
따라서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한국사회의 기득권의 교체, 주류의 교체, 세력의 교체, 낡은 시스템과 병폐적인 구조의 교체라는 관점을 가져야만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길 수 있는 대선을 치를 수 있다. 정권을 바꾼 뒤의 상황을 예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세력과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권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야권이 박근혜 위원장과 새누리당을 뛰어넘어 확실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최상의 '선거공학'이라고 확신한다(박근혜 위원장이 당선되면 정권이 바뀌었다는 착시효과를 줄 수는 있으나, 세력이 바뀌었다는 착시효과를 줄 수는 없다).
탈바꿈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12월 대선돌이켜보면 우리는 아직도 20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친일청산도, 완전한 독립도, 내전의 치유도, 냉전의 종식도, 독재청산도, 어느 것 하나 철저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 21세기로 들어와 버렸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지난 세기의 낡은 때를 벗고 진정한 '21세기의 공화국' 혹은 '신세기 대한민국'으로 다시 태어날 때가 되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력과 구조와 시스템의 교체를 다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번 대선은 그 탈바꿈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담보하기에 현재의 야권은 대단히 협소해 보인다. 이번 총선에서 여실히, 그리고 또다시 드러났듯이 기존의 민주당이나 진보당의 틀만으로는 시대의 과제를 받아 안기에 벅차다. 기존의 틀과 기득권을 과감히 내다버리고 완전히 새롭고 창의적인 판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시대정신을 담지하기도, 그것을 실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물과 세력이 대거 활발하게 소통하고 융화되는 틀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번 대선을 한국사회 주류세력의 교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조국 교수가 한때 말했던 이른바 '드림팀 놀이'도 이 관점과 틀에서 새롭게 조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섀도우 캐비닛(예비내각)을 꾸리는 데서 더 나아가 아직도 재벌과 검찰과 언론을 둘러싸고 있는 성역을 해체하고, 비선출 고위관료와 군대를 확실하게 제어하는 등 구조전변을 위한 계획까지 마련한다면 그만큼 국민의 관심과 신뢰는 높아질 것이다.
뜻하지 않은 총선패배로 야권의 대선승리, 말하자면 '야권V(브이)'가 쉽지는 않겠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만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한다. 지금의 야권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쉽지 않은 길을 갈 수 있을지, 그렇게 맨몸으로 시대와 맞서 응전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지켜봐야겠지만, 나는 올해가 백년 쯤 뒤의 역사책에 "대한민국의 21세기는 2012년에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