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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기 가 있노. 거기로 죽 내려 와야지."

어버이날(8일) 오전, 저는 엄니에게 전화를 해 "12시경 갈 테니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했습니다. 고희가 다 돼가는 늙으신 엄니는 자식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일을 다니고 있습니다. 건물 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파견업체에 등록해 이곳저곳 아파트를 다니며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8일에는 울산 공설운동장 뒤에 있는 한 아파트 지하에서 청소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도 처음이고 저도 처음 그곳을 찾아 가는지라 엄니를 찾는 데 애먹었습니다.

한글을 안다면 큰 건물에 있는 상호 이름을 보고 찾아 오라면 간단한 것을...  엄니가 글을 모르니 찾아가는 데도 불편이 따릅니다. 어디로 오라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2단지라고 해서 다른 분에게 물어 그곳에 찾아가니 엄니는 "왜 거기 가 있느냐"고만 합니다. "이리로 죽 내려오면 된다"고 하시지만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아들이나 엄니는 똑같이 서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엄마, 큰 건물 식당에 들어가서 다른 분 바꿔 줘봐요."

답답한 나머지 그렇게 말했습니다. 엄니는 어느 김밥집에 들어가 한 아주머니를 바꿔줬습니다. 그분에게 길을 물으니 그제야 감이 잡힙니다. 목적지에 닿고 보니 엄니는 큰 길에 나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이리로 죽 오면 되는데 어딜 갔드노?"

"우리 아들하고 딸은 100만 원 줬어"

 지난 2009년 9월, 가족들과 함께 고구마를 캐는 어머니
지난 2009년 9월, 가족들과 함께 고구마를 캐는 어머니 ⓒ 변창기

그렇게 만난 엄니는 그새 하얗던 머리가 까맣게 돼 있었습니다. 늙어 보인다는 소리 들을까봐 검은색으로 염색을 한 것입니다. 화장도 하고 립스틱도 빨갛게 발랐습니다. 젊어선 그러지 않으셨는데, 나이가 드니 불룩해지는 턱살과 처져가는 눈꺼플은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엄니와 저는 가까운 식당에 들어 갔습니다. 엄니는 "아무거나 먹으면 된다"면서 정식을 시켰습니다. 저는 5만 원을 내밀면서 "아내가 줬어"라고 했습니다. 엄니는 고맙다며 받았고요. 적어도 10만 원은 드려야 했는데, 사는 게 어려우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버스 운전을 하는 남동생이 있지만 이날 점심 식사에 오지는 못했습니다.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머리 속에 작은 혹덩이 같은 것이 생겼는데, 수술을 해도 위험하고, 하지 않아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월 한 차례씩 경기도에 있는 어느 뇌 전문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한 달치 약을 타다 먹나 봅니다. 엄니에게 둘째 아들이 못 온 이야기를 하니 많이 안타까워 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노인네들이 '우리 아들딸이 어버이날이라고 용돈 주더라'며 40만 원, 50만 원 되더라고 자랑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노인들에게 그랬어. 우리 아들하고 딸은 100만 원 주더라고."

엄니는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 속상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자식들 욕 먹일까봐 그렇게 둘러댄 것입니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화장 속에 가려진 어머니 실제 얼굴을 생각하니 괜스레 눈물이 났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다 먹고 나와 엄니가 좋아하는 고급 커피를 사드렸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엄니는 일하러 가시고, 저는 다시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엄니가 보내왔을 70여 년 모진 세월이 그려졌습니다.

엄니, 배우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다

4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난 엄니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여자는 배우면 안 된다'면서 어느 날 학교서 돌아온 엄니를 몽둥이로 엄청 때렸답니다. 머리를 맞고 실신한 뒤 엄니는 외할아버지가 겁이 나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초라고 들었습니다. 돈벌이 하라며 쫓겨나다시피 해 이집저집 식모살이를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합니다.

엄니 나이가 18세였던 무렵, 엄니가 전라도 광주 어느 병원에서 간호 보조로 일하고 있는데 외할머니가 찾아 왔다고 합니다. 외할머니는 "좋은 혼처 자리 났으니 가자"며 엄니를 데려가려고 했답니다. 엄니는 시집가기 싫다며 버텼지만 "혼기 놓지면 평생 시집도 못 가고 늙어 죽는다"는 말에 외할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외할머니를 따라 닿은 곳은 강원도 횡성의 어느 산골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미리 니 아비 사진만 한 번 봤어도 안 갔어. 그때는 사진이 없었잖아. 니 아비를 강원도 횡성에 가서 처음 봤는데... 무섭더라고. 나이가 10살이나 차이 나고, 무슨 그런 산도둑같이 생긴 사람이 다 있던지..."

엄니는 아버지를 처음 본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다음 날 바로 누더기 같은 결혼 예복과 쪽두리를 쓰고, 앞에 물그릇 하나 놓고 결혼식을 올린 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합니다. 정말 죽기보다 싫었지만 산속이라 어딘지도 모르고, 도망갈 수도 없어 그냥 지냈다 합니다. 며칠을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보니 배가 고팠고, 부엌에 나가 먹을 것을 찾아 먹으면서 그곳 생활을 시작했답니다.

"깊은 산골이라 도망갈 수도 없었어. 어딘지 알아야 도망이라도 가지. 그래서 독한 마음먹고 살아 보기로 했어. 그렇게 니 아비랑 같이 살게 된 거야."

배고파서 정신 나간 적도 있었던 엄니

아버지도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몇 개월은 잘해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본색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한날 술취해 와서 괜히 쌩떼를 쓰더구만. 노름도 하고, 술주정도 잘한다는 것을 몇 개월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거야."

엄니와 아버지는 횡성서 먹고 사는 게 힘들어 그곳에 살던 친인척들과 함께 평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불 보따리 지고 며칠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강원도 평창 대상리 산골짜기. 엄니는 화전민이 됐습니다. 엄니가 전해준 이야기에 의하면 먹을 게 없어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고 합니다. 하도 굶주려 한때 정신 이상이 됐다고도 하더군요. 반 미친 사람으로 변해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행동하니 큰 아버지가 복숭아 나무를 꺾어다 엎드리게 해놓고 때리며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나서는 제천에 가 살았다고 합니다. 거기서 남동생을 낳으셨고요. 엄니는 배고프고 먹을 게 없어 큰어머니댁에 보리쌀이라도 얻어 볼까 싶어 찾아 갔는데 구정물 세례만 받았습니다. 그때 많이 서러웠다면서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엄니가 생각납니다. 이후 단양에 가 살기도 했습니다. 마을 언덕에 짚으로 엮어 만든 집에 살 때였는데, 다른 거지떼가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자기 집처럼 차지해 버려 무서웠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은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빈 방을 얻어 살게 됐는데, 어느 날 보리쌀이라도 얻어 보려고 저와 남동생을 두고 품팔이를 나가게 되면서 일어난 일도 있었습니다.

"'창기야, 동생 잘 봐야 한다'고 말해놓고 일 다녀 오니 방 안에 재가 널려 있었어. 너희 둘은 자고 있더라고. 자세히 보니 둘 다 눈만 빼꼼하고 온몸이 재로 덮혀 있지 뭐야. '창기야, 왜 그랬어?'라고 물어보니 니가 '동생이 아야해서 약을 먹였다'고 했지. 동생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뭔가 먹였던 것 같더라. 알고 보니 아궁이에 있던 재를 퍼다 먹였더구만... 니 동생은 코 속이고 어디고 온통 재가 들어가 있었어. 니 동생은 며칠 동안 검은 똥을 쌌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엄니는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신세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니 아비가 돈이라도 잘 벌어오나... 술만 취하면 두들겨 패지, 만날 노름에 미쳐 집에도 안 들어오지... 사는 희망이 안 보이더라고. 그래서 니 동생이랑 죽어 버리려고 했지."

어느 날 엄니는 '죽는 게 났겠다' 싶었답니다. 저를 집에 두고 동생을 업고 나가 철길에 누워도 봤다고 합니다. 마침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가 달려와 밖으로 나가자 했고, 엄니는 사는 희망이 없으니 죽겠다며 철길을 움켜잡고는 놓지 않았습니다.

"그때, 고맙게도 동네 아저씨가 날 살렸어. 니 동생이랑 죽어 버리려고 철길에 누워 있는데, 그 아저씨가 달려와 날 말렸어. 난 울며불며 싫다고 했지. 남편이라고 있는 게 속만 썩이니 죽는 게 마음 편하겠다고 했어. 동네 아저씨는 아직 살 날이 많은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며 말리더라고. 그때 저만큼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지. 그 아저씨가 다급했던지 내 손목을 잡아 끌고 나갔어."

그 아저씨는 아버지를 호되게 혼냈습니다. "젊은 아낙이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자네가 그러면 쓰나"면서 말입니다. 그날 이후 아버지도 얼마 정도는 정신 차리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분에게 '울산에 가면 먹고 살 길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울산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 제가 6살이었는데, 그렇게 우리 가족은 울산 염포에 와 살게 됐습니다.

까막눈이라도 떠야 한다... 꼭 그래야 해

호떡 어머니는 한 때 호떡을 구워 팔아 우리를 먹여 살리셨지요(2011년 4월 촬영).
호떡어머니는 한 때 호떡을 구워 팔아 우리를 먹여 살리셨지요(2011년 4월 촬영). ⓒ 변창기

염포에서도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왜 그랬는지 알게 됐습니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월세가 밀려 쫓겨났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우리 가족은 산동네에 포장집을 짓고 살게 됐습니다. 월세를 줄 형편이 못되니 그렇게 산속에 포장집을 짓고 산 것이죠. 지금도 다니면서 포장마차만 보면 포장집을 짓고 살던 때가 생각납니다. 여름에는 벌레와 모기 그리고 더위 때문에, 비가 오면 방에 비가 새고, 겨울이 되면 얼음 같은 바람이 방안에 몰아쳐 잠을 설치기 일쑤였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잘 만들던 엄니는 혼자 연구해 호떡 장사도 하고 찐빵 장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오래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졌습니다. 엄니가 장사를 하면 손님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의처증 증세가 있었는지 다른 남자 손님 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어머니가 장사하는 데 와서 훼방을 놓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장사마다 몇 개월 못하고 그만둬야 했습니다. 자식들은 커가고 돈은 들어가니 엄니는 회사에 취직을 하기도 했습니다. 글은 모르지만 눈썰미가 있어 절단을 배웠고 전문가가 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엄니가 일하는 현장까지 찾아가 술주정을 하는 바람에 엄니는 다니던 회사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둬야 했습니다.

"너희들이라도 배워 까막눈이라도 떠야 한다."

엄니는 살면서 자신이 까막눈인 게 한탄스럽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못 다니게 한 외할아버지께 서운한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글을 모른 채 살다 보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만큼은 배워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습니다. 엄니는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 지독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난폭한 술주정에도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참고, 참고, 또 참아가며 독한 마음 품고 살아온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재혼한 엄니... 죄송합니다

엄니의 그런 희생정신으로 자식들은 글이라도 알게 됐습니다. 14년 전, 엄니 자식 셋은 모두 출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아버지의 주벽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엄니는 "자식들 다 출가 했는데도 내가 맞고 살아야 하냐"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렇게 2년 뒤, 아버지는 술에 만취한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2년 후, 어머니는 재혼했습니다. 솔직히 엄니는 능력만 되면 혼자 조용히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몸은 늙고 병들어 가는데, 벌어 놓은 것은 없기 때문에 재혼을 선택한 것입니다. 또, 엄니의 자식들 모두 엄니를 모시고 살 형편이 안 된다는 사실도 또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엄니는 자식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재혼을 한 것입니다.

저는 자식된 도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엄니의 모진 삶을 알기에 더 안타깝습니다. 제가 5만 원 드리니 엄니는 다시 2만 원을 주면서 손자 손녀 용돈으로 주라고 합니다. 돈이라도 많이 벌면 100만 원도 드리고 싶지만 현실이 받쳐주지 못하니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자식들 욕먹일까봐 5만 원 정도 밖에 받지 못하면서 100만 원을 받았다고 둘러댄 엄니. 가슴이 짠합니다.

'어머니,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어머니' 응모 글입니다.



#어버이날#고생한 어머니#화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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