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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아직 철부지 미성년이었을 때,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에게서 구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 시기의 내 눈에 어머니는 숲속의 요정이었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기보다 나쁜 것은 하나도 알 필요가 없는, 오직 좋은 것만 생각하고 알아야 하는 요정이었다.

그렇게도 순진하고, 어여쁘고, 좋은 일만 생각하는 요정이 무지막지한 '야수'에게 걸려 고생만 죽어라고 한다고, 눈물로 세월을 다 까먹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서울에 셋방 한 칸을 마련해서 어머니를 탈출시키고자 했다. 나의 이런 기특한 발상에 어머니는 감격스러워했다.

"어무이, 내가 방 구해놓고 편지 하면 바로 와야 해, 잉?"
"알았어, 알았어."

기억한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때 어머니는 분명히, 틀림없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그런 말씀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방을 구해놓고 편지를 쓸 수 있었으랴. 2년이 걸렸다. 서울에 사글세방 한 칸 구하느라 2년 동안 공사장 막노동을 했다. 그렇게 겨우 방을 구해놓고 어머니에게 얼른 올라오시라고 편지를 썼건만 어머니는 아무 소식도 주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완행열차를 타고 밤중에 집으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따졌다. 그런데 어머니는, 기가 막히게도 "아따 너는 뭔놈의 그런 도깨비 같은 소리를 자꼬 해쌌는다냐?"하면서 나를 노려봤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내 어리석음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는지, 나를 배신(?)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 탓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나는 그때 알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천생연분이거나 최소한 그렇게 살게끔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거의 매일 반복되는 아버지의 술주정에 "아이그 징그러, 징그러"하면서도 다음 날 아침이면 숙취 해소용 약을 사 오라고 '새끼'들을 2킬로미터나 떨어진 면소재지까지 내보내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때 명확하게 알았다.

'아아, 맞다 참. 요정은 자신의 이익이나 안일을 위해 타인을 슬프게 하는 일은 절대로 못하지 참. 그런 요정이 어떻게 아버지를 슬프게 하며 혼자서만 편히 살겠다고 떠날 수 있었으랴.'

지금 누군가 나에게 요정이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하나도 없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내 의식에서 그렇게 하나의 전설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어머니가 아무리 고생을 해도, 그 어떤 눈물을 흘려도, 그것은 눈물이나 고생이 아니라 어머니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어떤 바람직한 과정으로만 여겨졌다. 그렇게 어머니는 눈물 속에서 중년 여인이 되었고, 할머니가 되었고, 병이 들었고, 그리고 돌아가셨다.

막둥이가 결혼하던 날.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어서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는 어머니
 막둥이가 결혼하던 날.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어서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는 어머니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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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한동안 허둥거렸다. 아주 극심하게, 중심을 못 잡고 갈팡질팡 허둥거리는 내 의식 속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생면부지의 완전 낯선 남자였고, 얼굴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어느날부터 나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 그는 누구였을까. 어머니의 어떤 사람이었을까.

90년대 중반이었던가, 서울에서 시골집을 내려갔는데 생선이 마당에 잔뜩 널려 있었다. 한눈에 척 봐도 어머니가 돈을 주고 산 것 같지는 않았다. 명절 때도 조기 스무 마리 한 두름을 다 사지 못하고 열 마리 정도만 사는 어머니가 글쎄, 서대니 병어니 박대 같은 생선을 바구니에 가득 쌓아놓고 끓여먹다 못해 햇살 맑은 마당에 내놓고 건조까지 시킨다는 것은, 이것은 아무리 봐도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었다.

"아니 이것이 다 뭐여-어?"
"쩌그 머시냐 군산서, 누가 줬어."
"그러니까 어무이가 군산까지 가서 이걸 가져왔다고?"
"아따 참말로, 내가 이것을 다 으떻게 가져온다냐."

그때는 그 정도에서 대충 끝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말씀 그대로, 누군가가 있어서 고창에 오는 길에 생선을 갖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나보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아버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려니 여겼다. 그리고 잊었다. 그리고 다시 십수 년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한참인 어느 하루 비슷한 일이 마당에서 벌어졌다.

어머니가 이제 막 독거노인으로 신분이 변동되던 무렵이었다. 함께 살다시피 해온 셋째 아들이 결혼해서 분가한 뒤로 어머니는 농촌이라면 어디에서나 유행병처럼 창궐하는 독거노인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색이 큰아들인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어머니를 찾아간다기보다 방문하는 것으로써 할 일을 다 한다고 여기는 효자(?)가 되어갔다. 그 시기의 어느 하루 어머니가 마당에서 다양한 종류의 생선을 손질하고 계셨다.

"이게 다 뭔 생선들이여?"
"아따 너 잘 왔다. 이것 좀 가져가라."

그 뒤로도 잊을 만하면 생선은 마당에 등장하곤 했다. 정확한 기억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일 년에 두세 차례 정도는 마당에 생선이 널려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날은 어머니가 아예 전화를 해서 얼른 오라고, 얼른 와서 생선 가져가라고 채근하기까지 하셨다. 눈치가 하나도 없고 미련스럽기까지 한 나는 그렇게도 자주 이상한(?) 생선을 얻어다가 먹으면서도 뭐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군산에 누군가가 있어서 그렇게 가끔 생선도 갖다 주고 하나보다, 하고 말았을 뿐, 그 누군가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못했다.

관심이 없으니 어머니에게 그 남자가 누구냐는 식의 질문은 당연히 해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결국 어머니에 대한 나의 관심이 그 정도였다는 반증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대목지만, 이런 정도의 반성조차도 어머니 살아 계실 때는 꿈에서도 해보지를 못했고, 돌아가신 뒤에야 겨우 할 수 있게 되었다. 중증치매 선고를 받고 한 달이 모자라는 삼 년이었다. 삼 년 동안 한 방에서 함께 살아온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나는 비로소 조금씩 사람이 되어갔다고나 할까.

어머니의 눈물을 있는대로 다 빼내기만 했던 아버지.  환갑날에 이르러서야 딱 한 번 그것도 주위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보여주었던 장면, 아버지의 등에 업힌 어머니의 표정은 기쁘다기보다 당혹스러움이었던가....
 어머니의 눈물을 있는대로 다 빼내기만 했던 아버지. 환갑날에 이르러서야 딱 한 번 그것도 주위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보여주었던 장면, 아버지의 등에 업힌 어머니의 표정은 기쁘다기보다 당혹스러움이었던가....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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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의 아들로써, 아니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으로써 기억을 모두 상실해버린 이른바 치매 상태의 어머니에게 할 일을 다 했는가? 이런 괴로운 의문으로 몇 달째나 뒤척이던 어느 하루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90년대 중반에 개봉된 이후 아직까지도 묻히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그 자식들이 어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일기장을 통해 어머니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처음에는 배신감으로 놀라고, 나중에는 어머니도 어머니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서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영화, 그 영화를 보다가 벼락처럼 생각난 게 예의 생선이었다. 잊을 만하면 생선을 가져다주곤 했던 남자, 그 남자가 누구였지?

생각해보니 이게 또 그랬다. 잊을 만하면 생선을 가지고 왔던 그 남자는 우리 어머니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들이 모셔갔다는 얘기야 물론 마을 사람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겠지만, '내가 나다'하고 찾아갈 수도 없는 관계(?)에서 얼마나 황망했을 것인가. 아니 그보다도, 그 남자는 대체 어머니의 무엇이었지?

하지만, 슬프게도, 유감스럽게도 어머니는 그 어떤 단서도 남겨놓지 않았다. 중증치매 진단을 받기 전의 어느 하루 당신의 사물들을 죄다 꺼내놓고 불에 태우다가 아들에게 들켜서 다 태우지 못하고 남게 된 몇 장의 사진이 있을 뿐이었다. 남아 있는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지만 이 사람이다 싶은 낯선 남자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을까? 아니었을까? 아니면 아버지가 어머니의 개인생활을 일정 부분 보장해 주었던 것일까? 그래서 남자 친구도 만들고 하라고, 그렇게, 부추기기도 하고 그랬던 것일까? 하긴 중년 여인으로 진입하던 시기에 어머니는 새마을 회관에서 사교춤을 배우기도 했었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의 '춤바람'을 걱정하는 아들보다도 오히려 태평했었다.

"냅둬라, 그것 뭐, 어쩐데?"

그때 아버지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아들이 다섯에 딸이 하나, 새끼를 둘 만큼 두었으니까 이제 바람이 나도 무서울 게 하나도 없다는, 지금 생각하면 아들놈에게 그런 얘기를 하셨던 아버지도 어지간하다 싶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그게, 그랬던 것일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묵인 하에 남자친구를 두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십삼 년이었다. 십삽 년 동안 5남 1녀 자식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어머니의 재혼을 거론하지 않았다. 재혼은커녕 남자친구가 있어야지 않겠느냐는 식의 발언도 없었다. 부부가 살다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등졌으니 그 아내는 당연히 혼자서 고독을 처절하게 씹어야 한다는 경건한 믿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도 경건한 자식들 앞에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쎄, 무엇이었을까.

돌아가시기 일 년여 전의 추석날, 아들을 오빠라 부를 정도로 모든 기억을 상실해 버린 상태에서도 송편을 빚는 솜씨는 사라지지 않았더랬다
 돌아가시기 일 년여 전의 추석날, 아들을 오빠라 부를 정도로 모든 기억을 상실해 버린 상태에서도 송편을 빚는 솜씨는 사라지지 않았더랬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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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삶과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 나는 영원한 철부지 아이인 채로 뒤척이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이 내게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자꾸만 어머니의 일생이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있는 나는 대체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하긴 이런 반성조차도 내 안에서 순수하게 일어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숱하게 들리는 말들, "자네가 효자였네." "집이가 효자였어라우."등등 이런 말씀들이 나를 온전한 정신으로 잠들지 못하게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효자? 내가? 아 이것 참, 어찌 이리도 엄중하게 지독한 형틀이 세상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인가. 어쩌면, 어머니는 어쩌면 생선을 중개자로 해서 그 어떤 남자인가를 내게, 당신의 큰아들에게 선보이고자 나름 애를 써왔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생각들이, 너무도 늦게 일어난 이런 생각들이 나를 밤중에도 깨어 있게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몽상가인 것일까.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어이 이런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어머니에게 만일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 남친을 자식들에게 내놓을 수 있었다면, 그런 긴장과 활력의 여건이 조성되기만 했었더라면, 치매 따위가 감히 어머니를 쓰러뜨리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덧붙이는 글 | 나의 어머니 응모글



태그:#어머니, #치매, #남자친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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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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