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퓨 굿 맨(A few good men)>(1992)이란 영화가 있다. 쿠바령 미 관타나모 기지에서 벌어진 해병대원들 간의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치열한 법정 다툼이 아주 볼 만하다. 진실이 입증되던 순간 온몸을 타고 흐르던 감동도 잊히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 관객의 예상을 비껴간 판결로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울림도 지금까지 무겁게 남아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집단의 가치가 개인의 그것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두개의 문>(감독 김일란 홍지유)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20년 전의 이 영화가 떠올랐다.
<어 퓨 굿 맨>과 <두 개의 문>
잠시 이 오래된 영화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자.
두 명의 해병대원이 동료에게 '코드 레드'라 불리는 가혹 행위를 가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벌어진다. 현장에서 붙잡힌 두 대원은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지만, 명령을 내린 관타나모 기지의 사령관은 발뺌을 하며 군의관을 매수하고 부하들의 입을 막는가 하면 비행 기록까지 조작한다.
군 검찰은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군의 명예를 위해 모른 척하고, 오히려 사건을 서둘러 덮고자 두 해병대원에게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도)을 제안한다. 하지만 해병대원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고 싶던 두 사람은 이를 거부하며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들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코드 레드'를 지시한 사령관의 자백을 받아내는 길뿐이다. 결국 변호인단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기로 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들은 이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 또한 막강한 힘을 지닌 관타나모 기지의 사령관이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한 '코드 레드'가 군의 지휘 체계를 거쳐 가해자인 두 해병대원에게 전해졌을 때, 그것이 얼마나 거부하기 힘든 '명령'으로 변하게 되는지도 관객은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관객들이 모두 알고 있는 그 진실을 법정에서 입증해줄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마치 <두 개의 문>에 비친 우리의 현실처럼 말이다.
<두 개의 문>은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의 망루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5명의 농성자와 1명의 경찰특공대원이, 그것도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날 대체 망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또 6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는 어떻게 발생했는지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죽은 이들의 시신은 사건이 일어난 날 저녁 유족들의 동의도 없이 곧바로 부검대에 올려 졌고, 망루 안으로 밀고 들어간 경찰특공대원들이 채증을 위해 촬영한 현장 동영상의 일부와 자그마치 3000쪽에 달하는 검찰의 수사 기록은 사라지거나 공개되지 않았다. 특히 검찰이 법원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감춘 수사 기록은 전체 검찰 수사 기록의 1/3에 이르는 양이자,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초점을 맞춰 수사가 이루어지던 때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데 더 없이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일 주일 뒤 연쇄 살인범 강호순이 붙잡히자, 용산으로 쏠린 국민의 관심을 강호순에게 돌리도록 청와대가 일선 경찰을 통해 언론지침을 뿌린 사실까지 드러났다. 진실을 덮으려는 그 누군가의 노력은 영화에서보다 더 집요했다.
경찰 특공대원들의 눈으로 본 그날의 진실
사건의 실체는 이렇듯 모호했지만 대한민국 법원은 사건의 책임을 묻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2010년 11월, 대법원(주심 양승태 대법관)은 망루에서 살아남은 농성자 9명 모두에게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일반건조물방화·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농성자들이 망루에 불을 질러 경찰관 1명을 살해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농성자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목숨을 잃은 농성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 된다.
<두 개의 문>은 이러한 법원 판결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법원이 내린 결론대로 과연 그날 죽음의 모든 책임을 농성자들에게 묻는 것이 옳은가, 만일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면 또 다른 가해자는 누구인가, 또 농성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두 개의 문>은 생각지도 못했던 증인들을 관객들 앞에 불러 세운다. 바로 망루 안으로 밀고 들어갔던 경찰특공대원들이다.
"저희는 법정에서 경찰특공대원들이 그날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주간경향, 2012.6.26)공동 연출자인 김일란 감독의 말이다. 감독의 말대로 <두 개의 문>은 그날 그 죽음의 현장에 있던 경찰특공대원들의 법정 증언과 서면 진술 그리고 영상 등을 토대로 1월 20일 새벽 남일당 건물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관객의 눈앞에 집요하게 펼쳐 보인다. 그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뼈대다.
농성자들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과 용산참사대책위 인사들의 증언조차 대개는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장치들일 뿐, <두 개의 문>은 도시재개발 과정의 무수한 문제점이나 유가족들의 눈물 젖은 사연을 비추는 데는 인색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란 쉽지 않다.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판단이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 누가 가해자인지를 당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문>이 드러내고자 했던 또다른 가해자"망루 구조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시위대가 휘발유나 시너 같은 인화 물질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어느 경찰특공대원의 진술이다. 이 다큐멘터리가 가리키는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 <두 개의 문>은 법정에서조차 밝혀내지 못한,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 법원의 잣대로는 결코 가려낼 수 없었던 또 다른 가해자의 실체를 관객들 앞에 드러내려 애쓰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어디까지나 당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할 문제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영화에서처럼 당신의 예상을 비껴간 결론 따윈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가 끝나갈 무렵, 변호사가 증인석에 앉은 경찰특공대원에게 묻는다. 그날 목숨을 잃은 고(故) 김남훈 경사의 팀 동료이자 그 죽음의 현장에도 함께 올랐던 대원이다.
"진압 작전 중에 김남훈 경사가 사망했는데 사망 책임이 본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네, 농성자한테 있다고 생각합니다."영화와는 다른 다큐멘터리의 결말이다. 그러나 위의 대화에 미처 옮기지 못한 것이 있다. 5초간의 긴 침묵이 그것이다. 그 긴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들로선 물론 알 길이 없다. 어쩌면 글로 옮긴 그의 답변보다 진실에 더 가까운 그 무엇이 그의 침묵 속에 담겨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할 뿐이다. <두 개의 문>이 밝힌 진실은 여기까지다.
남일당 건물의 옥상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의 문만이 망루로 통했다. 연출자는 제목을 통해 이 사건의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론 해석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몫이다.
다큐멘터리를 본 뒤부터 내 앞에는 계속 '두 개의 문'이 나를 가로막고 서있다. 어느 한 쪽인가는 반드시 열고 들어가야 하는 문. 생각해보면 그런 선택은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두 개의 문>은 언제부턴가 어느 쪽이 옳은가를 따져가며 문을 여는 일이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저 덜 비겁한 쪽을 고르거나 때로는 아예 두 눈을 감고 아무 쪽이나 잡히는 대로 열어왔다는 사실도.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의 여운은 아주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