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때 한국인들은 한국이란 집의 주인이면서도 행랑채로 밀려났다. 강탈자인 일본인들은 한국의 안방을 차지하고 사랑방에서 손님을 대접했다. 주인은 음지를, 강도는 양지를 차지한 모순의 시대였다.
이 같은 음지와 양지의 대조가 드라마 <각시탈>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나마 시장 상권마저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한국인의 초라한 모습과 조선의 돈을 제 살 주무르듯 하는 일본인 및 친일파의 화려한 모습이 대비되고 있다.
음과 양의 차이는 의료 혜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총독부 부설병원은 명색이 총독부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한국 땅에서 한국 돈으로 한국인의 피땀으로 지은 한국인의 것이다. 그런데도 이 병원은 아무리 위급한 환자일지라도 한국인은 받아주지 않는다. 피해자와 주거침입 강도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다.
강도죄는 폭행이나 협박을 통해 상대방의 재물을 빼앗거나 재산상 이익을 취하는 행위다. 이 범죄의 행위자는 범행에 착수하기 전에 폭행·협박에 필요한 준비를 하거나 공범과 사전 모의를 한다.
우리 형법 제343조에서는 이런 준비행위를 강도 예비·음모죄로 처벌하고 있다. 강도행위의 전 단계까지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1948년에 대법원에서는 강도에 사용할 흉기를 사는 행위나 흉기를 휴대하고 통행인을 기다리는 행위도 강도예비죄가 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상대로 강도 범행에 착수하기 전에도 그 같은 예비·음모 행위가 있었다. 범행에 필요한 흉기(군사력)를 사들이고, 그 흉기를 품고 기회를 노리며, 영국·미국과 밀약을 맺어 협조를 얻어내는 등의 예비·음모가 있었다. 이런 문제를 고려해보자. 개인 주택에 침입해 강도 행각을 벌이는 데도 준비 자금이 필요하다. 범행 장비를 갖추거나 사전 답사를 하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한 국가를 상대로 그 같은 행위를 벌이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든다. 일본은 대체 어디서 돈이 나서 그런 일을 벌인 걸까?
일본이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인 정조 임금 때였다. 이 점은 조선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일본의 열의가 그때부터 시들해진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 정조 이전 만해도 일본은 큰돈 쓸 수 없었다
정조 이전만 해도, 일본은 조선과의 경협을 목적으로 통신사를 에도(동경)까지 초대해서 성대하게 대접하곤 했다. 옥스퍼드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통신사를 한번 초대할 때마다 일본은 연간 쌀 수확량의 12% 정도를 쏟아 부었다. 그러던 일본이 정조 집권 후반기인 1794년부터 조선·일본의 공동 속국인 대마도에서 통신사를 대접하겠노라며 태도를 바꾸었다. 더이상 에도까지 불러 큰돈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무신정권인 도쿠카와 막부 내에서 조선 멸시 풍조가 고개를 든 탓이었다. 일본이 돌변한 것은 자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병자호란에 패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사이에, 일본은 막부의 주도로 신속히 경제성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축적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근대화에 나선 후에도, 일본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1869년에 대마도를 합병하고 1879년에 오키나와까지 합병했지만, 소규모 섬나라들을 확보한 것만으로는 '범행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런 일본에게 행운이 생긴 때가 1894년이다. 1876년부터 일본에 시장을 개방하고 1882년부터 미국·영국·독일 등 서양열강에 시장을 내준 이래, 조선의 상권은 영국제 면직물을 앞세운 일본·중국 상인들에 의해 급속도로 잠식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5백 년 조선왕조의 내부 모순도 함께 심화하여 갔다.
안과 밖으로부터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궐기한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군이다. 농민군과 정부군의 전쟁은 전자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고종 임금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면서부터, 상황은 농민군과 고종 어느 쪽도 손을 쓸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청나라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군도 덩달아 조선에 들어왔다. 청나라군은 농민군을 진압하러 왔지만, 일본군은 농민군과 조선 정부군과 청나라군을 죄다 진압하러 왔다. 이렇게 조선에서 만난 두 나라는 서로 전쟁을 벌이고 결판을 낸 뒤에야 돌아갔다(청일전쟁).
청일전쟁 이전만 해도, 일본은 외형상으로 청나라에 뒤졌다. 1884년에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에서 청나라군이 일본군을 꺾고 조선 정국을 장악한 이래, 일본은 청나라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일본이었다. 농민군과 조선 정부군이 합심해서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고 청나라 역시 전쟁을 꺼리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청나라를 전쟁으로 끌어들여 승리를 거두었다.
1886년 이래 집중하여 육성된 일본 해군이 청나라 정예 함대인 북양함대를 서해에서 격파한 것이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아시아 이류에서 세계 일류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 후 마관조약 체결... 전쟁배상금 3억 6천만엔
1895년에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마관조약(하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두 가지 수확물을 거두었다.
마관조약 제2조는 청나라가 일본에 대만(타이완)을 할양할 것을 규정했다. 일본은 대만을 얻어냄으로써 조선-대마도-일본-오키나와-대만 라인을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도 이 라인에 설치한 핵우산 (핵무기 보유국의 핵전력(核戰力)에 의하여 국가의 안전보장을 도모하는 것)을 바탕으로 중국·북한을 견제하며 지역 패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얻어낸 또 다른 수확물은 2억 량의 전쟁배상금이었다. 마관조약 제4조에 따르면, 청나라는 조약 발효 시점으로부터 7년 이내에 총 8회에 걸쳐 배상금을 분납하고 기일을 지키지 못하면 5%의 연체이자를 지급해야 했다. '8회 할부, 5% 연체이자' 조건으로 2억 량의 배상금을 카드로 결제한 셈이다.
일본이 배상금 등의 명목으로 받아낸 금액을 일본 돈으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이다. 청나라의 3년 치 예산, 일본의 4년 반 치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이 돈은 일본의 군비와 산업을 일으키는 밑천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이 아시아의 변방을 벗어나 세계 강국으로 뻗어 나가는 데 종잣돈이 된 셈이다.
4년 반 동안 쓸 돈이 공짜로 생긴 데 힘입어, 일본은 조선 강탈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그 후 일본이 한편으로는 조선 강탈을 위해 자금을 투입하고 한편으로는 경제개발을 위해 자금을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은 청일전쟁 덕분에 생긴 금전적 여유 때문이었다.
'공돈'이 생기지 않았다면, 일본은 조선 강탈보다는 경제개발 쪽에 돈을 집중 투입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신속히 조선·만주·중국본토를 공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둑한 범행자금이 일본의 스피드와 파워를 높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청나라를 꺾고 배상금을 뜯어내는 순간부터 조선의 운명은 위태로워진 셈이다. 조선의 재물에 욕심을 품고 있는 나라가 거액의 범행자금까지 입수하게 되었으니, 조선을 상대로 한 일본의 강도 예비·음모는 그때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