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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 겉표지
▲ <악화> 겉표지
ⓒ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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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

16세기 영국의 금융가 토머스 그레셤의 말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의미다.

16세기에 영국정부는 재정부담 때문에 기존 금화에 비해서 순도가 떨어지는 금화를 제조해서 유통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이 금의 함유량이 높은 금화는 집에 보관해두고 질 낮은 금화를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곧 시장에서 순도 높은 금화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이 현상을 보고 그레셤이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금의 함유량이 낮아진 동전이 예전과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통용된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화폐 위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지 이 금화를 만든 주체가 정부였기 때문에 '화폐 위조'가 아닌 '화폐 개혁' 정도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노숙자에게 다가온 행운

시마다 마사히코의 2010년 작품 <악화>에는 대규모 위조지폐범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위조지폐는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위조지폐 감별기도 이것을 감별해내지 못한다. 당연히 육안으로는 진폐와 구별이 안되고, 전문가가 첨단장비를 동원해서 여러 시간 동안 작업을 해야 간신히 진폐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의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많은 자본도 있어야 한다. 제지공장과 인쇄공장을 세운 뒤에 유지관리해야하고 위조지폐에 관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하기 위해서 보안대책도 필요하다. 즉 기술력과 자본력에 인력까지 더해져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막대한 돈을 들여서 위조지폐 생산시설을 만들었으니,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많은 양의 위조지폐를 오랫동안 만들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경찰에게 발각되지 않으면서 본전을 뽑고도 남을 만큼의 위조지폐를 만들고 생산을 중단하는 것. 완전범죄를 저지르려면 그 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악화>는 공원의 한 노숙자가 현금 백만엔이 든 비닐봉투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노숙자는 그 돈으로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 새옷을 사고 목욕과 이발을 해서 노숙생활의 때를 벗겨낸다.

그렇지만 행운도 잠시. 노숙자는 이발소에서 자신이 백만엔을 주웠다고 떠벌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이발소 직원은 친구와 작당해서 노숙자의 돈을 날치기 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백만엔이 생기면 폼나게 먹고 마시며 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은 어떤 사연으로 노숙자 앞에 오게 된 것일까?

위조지폐를 만드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위조지폐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곤 한다. 위조지폐를 만드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냥 호기심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화폐를 위조한다는 것은 한 나라의 경제를 뒤흔들 수도 있는 심각한 범죄다.

화폐를 위조, 변조하다가 적발되면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위조지폐들은 일반인도 주의 깊게 보면 감별할 수 있는 수준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악화>에서처럼 감별기가 인식못할 정도의 위조지폐가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커다란 경제문제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정도의 위조지폐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거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술은 사람의 눈길을 끌지만 위조지폐는 사람을 속인다. 그렇더라도 제작자의 기술과 열정이 담겨있다는 점에서는 예술이나 위조지폐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기술자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시험하고 싶어서 위조지폐에 손을 댈 수도 있겠다. 그 대가가 얼마나 커다란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유혹을 참지 못한다. 학력을 포함해서 많은 것들이 위조되는 세상이지만, 화폐를 위조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렵고도 위험한 그래서 더욱 끌리는 범죄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악화>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 양윤옥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악화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자음과모음(이룸)(2012)


#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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