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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요금을 냈다는 증거로 붙이는 우표에는 그저 무궁화나 비둘기가 그려져 있는 것이 다 인줄 알았다. 편지를 붙이거나 받을 때 우표를 유심히 본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우표 그림이 무궁화나 비둘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우표의 역할도 단지 우편요금의 수취 증명만은 아니었다.

우표는 만들어진 당시의 정치, 사회적 정책과 이데올로기 같은 메시지를 담은 미디어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우편학자 나이토 요스케의 <우표, 역사를 부치다>를 통해서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우표라는 기록물을 통해 20세기 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책이다.

저자는 우취(philately) 즉 우표 수집이나 연구와 달리, 편지나 엽서에 붙은 우표와 찍힌 소인 등을 분석해 우표가 만들어지고 통용된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밝혀내는 학문을 우편학이라고 정의한다. 우표박물관 부관장을 맡으며 우표와 인연을 맺게 된 저자는 우표와 우편물을 통해 역사나 국제 정치를 해독하는 우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제창했다.

우표는 원칙적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발행된 만큼 거기에는 국가의 정치적 견해나 정책, 이데올로기 등이 자연스레 담겨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실제로 많은 국가가 전시에 국민의 사기를 높이는 방안으로 우표나 엽서를 발행하거나,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가 행사 시 기념우표를 발행해 선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역사상 주요 사건이나 인물이 우표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해당 국가의 역사관이 그대로 우표에 투영되는 것이다. '232개 우표가 담은 역사의 의문'이라는 부제를 단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북한, 베트남, 이란, 쿠바, 소련, 필리핀, 일본, 이라크 등 여덟 나라의 우표를 통해 20세기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이들은 모두 20세기 들어 미국과 전쟁을 했거나 혹은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나라들이다. '미국의 세기'라고 부를 만큼 미국은 20세기에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강력한 패권을 휘둘렀지만, 그 강력한 패권만큼 세계 곳곳에서 격렬한 반미주의의 불꽃도 뜨겁게 타올랐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이들 8개 나라에서 미국이 어떤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고, 그 나라의 반미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우표라는 작은 종이를 통해 당대의 정치, 경제 및 생활상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매우 새롭고도 흥미로운 책이다.

한반도에 원폭을?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1970년대까지 북한의 우표 속에 나타난 미국의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북한이 미국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부터다.

1946년 3월 북한임시인민위원회가 발행한 최초의 북한 우표를 보면 다른 아무런 문구도 없이 단지 '조선우표'라는 말만 인쇄되어 있다. 남한이 여전히 일본 식민지시대의 우표를 사용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은 독자적인 우표를 발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보름 만에 북한은 서울을 점령하고 이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우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방기념'이란 문구와 함께 서울 정부청사에 북한 국기가 꽂혀있는 그림이 들어 있다.

저자는 전시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보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우표를 발행한 점으로 보아 북한이 우표발행을 사전에 준비했고 바로 이것이 북한의 남침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밝힌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을 제압하기 위해 한반도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려 했다는 사실을 우편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잇따른 패배로 유엔군이 한반도 동남부까지 밀려나자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패퇴시켰던 것처럼 원폭을 사용해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키려 했다. 사회주의 진영은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우려했고, 이에 폴란드는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는 편지봉투를 제작한다.

 폴란드에서 발행한 핵무기 사용 반대 스탬프가 찍힌 편지봉투(본문 56쪽)
 폴란드에서 발행한 핵무기 사용 반대 스탬프가 찍힌 편지봉투(본문 56쪽)
ⓒ 나이토 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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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핵무기 사용을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을 최초로 사용한 정부는 전쟁 범죄국으로 국제사회의 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폴란드에서 발행한 편지 봉투에 스탬프로 찍혀 있다. (본문 55쪽)

결국 원폭 투하는 없었지만 전 세계에 불러올 재앙은 상관없이 '어떤 전쟁에서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말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본성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하마터면 한반도가 원자폭탄에 초토화되는 아찔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섬뜩하기까지 하다.

꼼수의 원조, 미국

미국은 항상 자신들은 결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며 식민지를 탐하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숭고한 프런티어 정신을 말하는 서부 개척의 다른 말이 원주민 학살과 땅뺏기에 지나지 않았듯 미국의 민주주의란 결국 미국식 꼼수의 정수를 보여준 제국주의의 발현이었다.

미국은 항상 식민 상태에서 독립하려는 나라들에게 자신들이 독립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것처럼 연출한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미국의 꼼수다. 쿠바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겉으로는 자유를 추구하며 싸우는 쿠바인들을 응원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미국의 이익 유지를 위해서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고 스페인이 나간 자리를 결국 그들이 차지했다.

 "메인 호를 잊지 말자"는 슬로건이 적혀 있는 애국봉투(본문 160쪽)
 "메인 호를 잊지 말자"는 슬로건이 적혀 있는 애국봉투(본문 160쪽)
ⓒ 나이토 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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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천안함 사건을 연상시키는, 왜곡과 과장 그리고 조작으로 만들어진 메인호 사건을 통해 미국 내 여론을 선동하고, '메인호를 잊지 말자!'라는 슬로건을 적은 애국봉투를 만들어 전쟁에 대한 지지를 끌어낸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 독립군의 혁명정부를 인정하고 쿠바를 식민지화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미국은 쿠바에서 군정을 실시한다.

거의 유사한 꼼수가 필리핀에서도 펼쳐진다. 필리핀에서 스페인을 몰아내기 위해 필리핀의 독립투쟁을 이끈 혁명정부를 후원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지만 결국 스페인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건 미국이었다. '우애적 동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덮기 위해 빈 라덴 사냥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무자헤딘의 투쟁을 오사마 빈 라덴이 지원하면서 미국은 빈 라덴을 요주의 테러 위협 인물로 지목한다. 그리고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미국 대사관 폭파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주모자로 빈 라덴을 지목하고 빈 라덴 사냥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 당시 클린턴 정부의 빈 라덴 사냥에 대해 저자는 클린턴이 탄핵 직전에 이른 자신의 섹스 스캔들을 무마시키고 미국 언론과 국민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꼼수였다고 말한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물론 국제사회도 미국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그 증거로 저자는 바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우표를 증거로 제시한다.

 클린턴과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를 희화화한 우표(본문 300쪽)
 클린턴과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를 희화화한 우표(본문 300쪽)
ⓒ 나이토 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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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아의 아브하지아 우편 당국 이름으로 발행된 뒤 전 세계에서 매매가 이루어진 이 우표는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보는 세계의 시선과 반응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저자는 말한다. 얼마 전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정치권 이슈를 무마시키기 위해 국내를 대표하는 MC들의 소환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뭔가 크게 덮어야할 것이 있을 때 관심을 돌릴 만한 다른 사건을 써먹는다는 음모론이 여기서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음모론의 성행은 그만큼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책을 갈무리하며 저자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던 20세기에 '반미'는 하나의 시대정신이자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정치노선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21세기 우표는 어떤 시대정신을 가지고 무엇을 기록하고 기억할지 궁금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12월 대선을 앞두고 각종 말들이 무성한 2012년 우리는 어떤 시대정신을 가지고 무엇을 생각하고 기록하며 12월을 맞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우표, 역사를 부치다>, 나이토 요스케 지음, 안은미 옮김, 정은문고 펴냄, 2012년 6월



우표, 역사를 부치다

나이토 요스케 지음, 안은미 옮김, 정은문고(2012)


#우표, 역사를 부치다#나이토 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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