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온 국민이 피부로 느낄 만큼 명확한데도 이에 대한 논의는 생산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전경련을 앞세운 재계는 헌법을 들먹이며 재벌개혁이 위헌이라고 반박한다. 어떤 이들은 재벌개혁을 무조건 재벌해체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제 재벌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을 두고 토론해야 한다. 무엇을 목표로 하여,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나 규제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새사연이 먼저 재벌개혁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 기자말재벌.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오른 몇 안 되는 한국어 중 하나다. 사전에는 한국 대기업의 형태로, 특히 가족소유의 것(In Republic of Korea a large business conglomerate. esp. family-owned one)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세계가 인정한 한국의 재벌, 법적 실체 없어
세계가 한국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재벌이지만, 막상 현재 우리나라 법 체계에는 재벌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정거래법에서 자산총액 5조 원 이상이며 동일인이 사실상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회사의 집단을 '대기업 집단'으로 정의하고, 상호출자와 채무보증을 제한하고 있을 뿐이다.
대기업 집단은 2012년 7월 기준 63개인데, 이들이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재벌의 성격에 완전히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도로공사와 같이 공기업도 포함되어 있으며, 사실은 같은 계열사라고 볼 수 있는 재벌의 파생그룹들, 예를 들어 삼성과 CJ나 신세계의 관계들은 파악되지 않는다. 재벌이 문제를 일으키고도 총수들이 처벌받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재벌 내에 특수하게 존재하지만 법적 실체는 없는 '구조조정본부(구조본)'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따라서 재벌을 규제하고자 한다면 우선 이들을 법적 실체로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한 한국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한국경제의 성격을 논한다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를 장악한 신자유주의 체제와 함께 재벌 체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재벌개혁은 향후 한국경제의 성격을 바꾼다는 생각으로 장기적이고, 구조적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도 재벌에 관한 별도의 법률이 필요하다.
그래서 최근 학계와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것인 기업집단법(재벌규제법) 제정이다. 잠재적 대권 후보인 안철수 교수 역시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재벌개혁과 관련해 기업집단법을 공식적으로 주장해 주목을 받았다.
"현행법에는 재벌체제에 대한 규정이 없고 주주 중심의 개별회사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기업집단법을 만들어 제대로 규제하자는 논의가 있고, 저도 지금처럼 어정쩡하게 놔두지 말고 기업집단법을 만드는 게 옳다고 본다."기업집단법은 개별 기업 범위를 넘는 기업집단이 독립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실체'라는 점을 상법 차원에서 인정하고, 그 존재와 구성 요건을 법률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현실적 실체이면서도 법적 규정이 없었던 기업집단과 기업집단을 이루고 있는 계열 회사들 사이의 지분관계는 물론 통제 권한과 책임 범위, 구조조정본부 같은 기업집단 전체의 지휘통제 구조를 법적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나아가 전체 기업집단과 소속 기업 사이의 이해 상충 관계를 규율하며, 이른바 내부 거래 허용범위 등도 규정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합의한 재벌체제의 구조 개편 방향을 법적 틀로 제시하게 될 것이다.
우리와 기업지배구조가 유사한 독일은?
기업지단법을 구상할 때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독일의 콘체른(Konzern)법이다. 영미 자본주의에는 한국의 재벌과 유사한 집단과 관련된 성문법이 없다. 그나마 우리와 유사하게 계열사의 지분출자 방식으로 기업집단이 형성되어 있고, 성문법이 존재하는 사례가 독일이다.
콘체른은 하나의 모기업을 중심으로, 그 모기업이 주식을 소유하는 여러 자회사들이 결합한 기업집단을 뜻한다.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독일식 법 제도를 가진 나라들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폭스바겐, 다임러, 지멘스, 도이체방크 등 독일의 대표적 회사들이 콘체른이다.
독일에서 콘체른은 1920년대 이후 등장하여 독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가, 2차대전 후 전쟁의 경제적 기반으로 지목되면서 해체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기업 간 집단화가 다시 활발해졌고, 이에 1965년 주식법(German Stock Corporation Act)을 개정하면서 콘체른 관련 조항을 삽입하였다.
콘체른법에서는 우선 콘체른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나의 지배기업과 1개 또는 다수의 종속기업이 기업집단의 통일적 지휘 아래 총괄되는 경우에 그 기업들은 콘체른을 형성하며, 각 기업들은 콘체른 기업" 이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주로 지배회사와 피지배회사 사이의 이해상충 관계를 해결하고, 피지배회사의 소수주주와 채권자의 보호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내용의 규제를 하고 있다.
이 외에도 더 앞선 1958년에는 경쟁제한방지법(GWB)을 제정하여 독과점을 규제했다. 이는 국가가 공익을 위해 독과점을 규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76년에는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보편화시킨 공동결정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기업집단의 횡포를 제지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독일에서의 기업집단 규제는 콘체른법, 경쟁제한방지법, 공동결정법이 각각 회사법, 경쟁법, 노동법의 영역에서 자신의 몫을 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업집단법, 반재벌법 아니라 재벌인정법이다
우리도 우선 기업집단법을 독립적 법률의 형태로 제정하여, 재벌을 독립된 법인격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재벌만이 가진 특수성을 양해주는 대신 실질적인 소유와 경영통제구조에 대한 명확한 책임을 규정해야 한다. ('기업집단에 관한 독자적 규제 법률의 필요성과 내용', 김선웅, 2006) 기업집단법에 포함되어야 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공정거래법 개정이 수반되어 독일의 경쟁제한방지법과 같이 재벌의 독과점을 강력하게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독일의 공동결정법과 같이, 재벌 내부적으로는 노동자가 견제세력이 될 수 있도록 노동자경영참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기업집단법은 반재벌법이 아니다. 오히려 재벌인정법이다. 이제까지 법적 실체가 없던 재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대신에 다른 경제주체들과 똑같이 공정 경쟁을 위해 필요한 규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김병권 기자는 새사연 부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