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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영근 몇 해 앞 사북문학축전에 함께 같다가 갑자기 "힘이 없다"며 주저앉아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고 있는 시인 박영근
▲ 시인 박영근 몇 해 앞 사북문학축전에 함께 같다가 갑자기 "힘이 없다"며 주저앉아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고 있는 시인 박영근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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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네 물억새 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마비 울다 가는
삼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 들면 솔닢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百濟(백제) 6>

이른 새벽 꿈에 지금으로부터 6년 앞에 우리 곁을 훌쩍 떠난 살가운 벗이었던 시인 박영근이 나타났다. 말이 없었다. 오라는 손짓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랬을까. 8월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 낮에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공광규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 시인은 내게 "내일 박영근 시비 제막식에 갈 거냐?"고 물었다. 나는 "내일 또 무슨 바쁜 일이 생길지 잘 몰라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도 그렇게 말하는 내가 몹시 서운했을 것이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급한 일이 있어 <오마이뉴스>에 기사 몇 줄 쓰는 것으로 그가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말았는데...

그때에도 그런 자신이 너무나 얄미웠다. 살가운 벗이자 같은 길을 함께 걸어왔던 시인동지 문상도 가지 못하게 만든 이 세상이 너무나 무서웠다. 근데, 6년이 지난 지금 그가 남긴 시와 삶을 기리는 시비 제막식이 있는데도 그렇게 무심코 말하다니. 열 일이 있어도 무조건 "가겠다"고 했어야 옳았다. 그가 이른 새벽 꿈에 나타난 것도 그 때문에 스스로 가위 눌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비 앞면에 새겨진 <솔아 푸른 솔아-백제 6>

시인 박영근이 남긴 육필시 9월 1일(토) 낮 3시 부평 신트리 공원에서 그를 기리는 시비 제막식이 열린다
▲ 시인 박영근이 남긴 육필시 9월 1일(토) 낮 3시 부평 신트리 공원에서 그를 기리는 시비 제막식이 열린다
ⓒ 미망인 성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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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6월, 첫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청사)로 군사독재정권 아래 끙끙 앓고 있었던 이 땅에 노동문학이라는 올곧은 씨앗을 뿌린 시인 박영근(1958~2006). 9월 1일 오후 3시 부평 신트리 공원에서 그를 기리는 시비 제막식이 열린다. 지난 2006년(48세)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만이다.

시인 박영근 시비 제막식은 지난 1월 '고박영근시비건립위원회'(회장 정세훈)를 만든 뒤 박영근 시인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한국작가회의 문인 선후배들과 그와 함께 했던 살가운 벗들, 인천 노동계 벗들이 십시일반으로 낸 성금과 부평구가 시비 부지를 내주는 도움에 힘입어 오늘에 이르게 됐다.

시비 앞면에는 시인 박영근이 쓴 시 <솔아 푸른 솔아-백제 6>이 새겨진다. 글자체는 시인이 남긴 육필원고에서 땄다. 시비 뒷면에는 시인 약전과 건립문이 새겨진다. 박영근 시인 약전은 서홍관 시인이 썼고, 건립문은 박일환 시인이 적었다. 시비 디자인은 화가 김환영, 고창수, 성효숙이 맡았다.

이번 시비 제막식은 박일환 시인 사회로 시인 정세훈 인천작가회의 회장 '인사말'을 시작으로 시인 서홍관 '박영근 시인 약력소개', 문학평론가 김이구 '경과보고', 작가 현기영(한국작가회의 상임고문), 시인 이시영(한국작가회의 이사장), 홍미영(부평구청장) '축사'가 이어진다. 시비 제막에는 화가 김환영이 나와 시비 제작 설명을 한 뒤 시인 김해자가 나와 '솔아 푸른 솔아' 시낭송, 가수 황승미 노래 '붉은 꽃', 박정근을 비롯한 '유족인사', 솔아푸른솔아 합창으로 마무리 짓는다.      

'고박영근시비건립위원회' 정세훈 회장은 "<솔아 푸른 솔아>가 시비건립위원회에서 여러 사람 의견을 모아서 가장 많이 선택돼 선정됐다"며 "이날 제막식에는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이시영 시인과 현기영 소설가를 비롯한 인천지역 문인, 그를 아꼈던 벗들, 부평구 관계자, 유족 등이 한데 모여 빼어난 시적 성취를 거두고 요절한 박영근 시인이 남긴 발자취를 새삼 기억한다"고 밝혔다.

부평은 부안에서 태어난 박영근 시인이 25년 동안 살았던 곳

시인 박영근은 1974년 전주고 1학년에 다니다 '문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와 서울로 올라온 뒤 신정동 뚝방촌과 공장 노동자로 여기 저기 떠돌았다. 그는 1985년에 서울 구로에서 인천 부평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부터 시인이 25년 동안 살았던 곳이 부평이었고, 마지막 삶터였던 곳도 부평이었다.

박영근 시인 미망인 성효숙 화가는 "인천 부평으로 박영근 시인이 오게 된 것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고 되짚었다. 박영근 시인 시비가 1958년 태어난 전북 부안에 세워지지 않고 부평 신트리공원에 세워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生(생)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줏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이사> 몇 토막

26살에 청계피복 노동자들 만나 소모임 가져

시인 박영근은 1958년 9월 3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현 변산면) 마포리 산기마을에서 아버지 박창기(朴昌基)와 어머니 이옥례(李玉禮) 사이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964년(6세)에는 부안군 산내면 마포국민학교 입학했으며, 1968년(10세) 부모님 교육에 대한 열의로 5학년 때 전북 익산으로 전학해 익산시 평화동 셋째 이모 집에서 살았다.

1976년(18세) <학원> 4, 5월호에 시 <눈 1> <눈 2>가 입선작으로 실렸으며, 1981년(23세) <반시(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0~80년대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성효숙을 만났다.

1984년(26세)에는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만나며 동대문 근처에서 소모임을 열었고, 민중문화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국집회와 철야농성 등에 참여했다. 신경림·임진택·정희성·김정환·이영진·하종오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창립하고 창립 간사로도 일했다.

같은 해 첫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청사 1984. 6), 노동자 생활이야기를 쓴 첫 번째 산문집 <공장옥상에 올라>(풀빛 1984. 12)를 펴냈다. 그해 12월부터 1987년까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회원으로 김정환 김사인 김남일 고(故) 채광석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85년(27세)에는 고(故) 김도연이 만든 공동체출판사 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노동문화패들과 함께 인천 5·3항쟁에도 참여했다. 그해 가을 부평으로 옮긴 '두렁' 성효숙과 함께 산곡동으로 이사했다.

1986년(28세) 두 번째 시집 <대열>(풀빛)을, 1993년(35세) 세 번째 시집 <김미순傳>(실천문학사)을 펴냈다. 1994년(36세)에는 제12회 신동엽창작상을, 1997년(39세)에는 네 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작과비평사)를 펴냈다. 1998년(40세) 12월에는 신현수 이경림 이세기 등과 함께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를 창립하고 2000년까지 부회장으로 일했다.

2002년(44세) 다섯 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를 펴냈으며, 이 시집으로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받았다. 2002~2006년(44~48세) 인천민예총 부지회장(2002~2005),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2004~2005),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2002~2006)를 맡았다.

산문집으로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를 펴냈다. 2004년 8월에는 몽골에서 열린 '한·몽 시인대회'에 이시영·고형렬·김용락·한창훈·김형수 등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시인 박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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