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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막내가 손가락에 비닐조각을 감싸고 곤히 잠들었습니다. 아침까지 무사히 버텄습니다.
손가락막내가 손가락에 비닐조각을 감싸고 곤히 잠들었습니다. 아침까지 무사히 버텄습니다. ⓒ 황주찬

지난 1일 아침입니다. 바람이 시원합니다. 창밖 풍경은 여름인데 피부에 전해지는 느낌은 가을입니다. 역시 가을은 느낌으로 먼저 다가오나 봅니다. 간밤에 서늘한 기운이 몸에 닿아 창문을 닫았거든요. 이런 기분 그냥 흘려보내면 아쉽지요. 나들이 가자며 아내를 졸랐습니다.

그동안 세 아들과 집 밖을 거의 나가지 못했습니다. 게으른 탓이 아닙니다. 불볕더위에 문밖을 나설 용기가 없었지요. 또, 많은 비와 큰바람이 발걸음을 묶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화창한 토요일이니 어디라도 떠나야 합니다. 김밥 싸들고 구례 지리산이라도 한 바퀴 휘돌아보자며 아내를 꾀었습니다.

아내가 반승낙합니다. 재빨리 가게로 달려가 김밥에 들어갈 맛있는 재료를 챙겨왔습니다. 아빠의 부푼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 아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네요. 큰아들과 둘째 귀에 대고 온갖 감언이설을 속삭여도 좀체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막내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막내 귀에 대고 놀러 가자는 말을 던졌더니 다음 말 꺼내기 무섭게 벌떡 일어납니다. 역시 아빠 마음을 가장 잘 읽는(?) 녀석은 막내뿐입니다.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막내가 형들을 깨웁니다. 잠 깨우는 방법이 무지막지합니다. 발로 형들 얼굴이며 가슴을 밟고 지나갑니다.

일상에서 얻은 고민, 자연 앞에 내려놓으면 그만

선인장 순천시산진원예체험장 비닐하우스에서 만난 선인장입니다. 선인장에 붙어 있는 가시가 솜털같습니다. 솜털처럼 생겼다고 함부로 만지면...
선인장순천시산진원예체험장 비닐하우스에서 만난 선인장입니다. 선인장에 붙어 있는 가시가 솜털같습니다. 솜털처럼 생겼다고 함부로 만지면... ⓒ 황주찬

머루 개량머루랍니다. 완전히 영글지는 않았습니다. 햇볕과 느린 시간이 달콤한 맛을 집어 넣겠지요.
머루개량머루랍니다. 완전히 영글지는 않았습니다. 햇볕과 느린 시간이 달콤한 맛을 집어 넣겠지요. ⓒ 황주찬

쉼터와 버섯 체험장에는 이런 쉼터가 곳곳에 있습니다. 쉼터에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름모를 버섯 아래에는 뭇 생명들이 모여듭니다. 더위를 피하러...
쉼터와 버섯체험장에는 이런 쉼터가 곳곳에 있습니다. 쉼터에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름모를 버섯 아래에는 뭇 생명들이 모여듭니다. 더위를 피하러... ⓒ 황주찬

석류 시간이 더 지나면 이 녀석은 자신이 품고 있던 붉은 알갱이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석류시간이 더 지나면 이 녀석은 자신이 품고 있던 붉은 알갱이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 황주찬

잔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간단한 행동으로 게으른 형들을 단숨에 깨웠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두 녀석이 재빨리 구석을 찾아 숨어듭니다. 막내가 이를 놓칠 리 없지요. 형들이 숨어든 구석까지 쫓아가 두 녀석을 기필코 끌어냅니다. 그런 모습을 아내가 고소한 듯 바라봅니다.

매일 아침이면 두 녀석 깨우는 데 지칠 대로 지쳤거든요. 아내는 막내의 거침없는 행동을 말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한바탕 소동을 치른 후, 가까운 곳에 살고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길을 나섰습니다. 구례 지리산은 너무 멀어 장소를 바꿨습니다. 순천 상사호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지난번 태풍 때문인지 상사 호에 물이 가득합니다. 출렁이는 물결과 시원한 바람이 그동안 쌓인 고민을 날려 보냅니다. 역시, 사람은 가끔 집을 떠나봐야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얻은 고민, 자연 앞에 내려놓으면 그만입니다. 또, 머리를 싸맨들 제가 풀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가로수 그늘 아래서 챙겨간 김밥을 먹었습니다. 돗자리 위에 펼쳐진 정갈한 음식을 보니 먹지 않아도 배부릅니다. 주변에서 세 아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닙니다. 평화로운 오후 시간입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천시산지원예체험장'에 들렀습니다.

일흔 넘은 어머니는 어릴 적 추억에 젖고...


봉숭아 꽃 어릴적 추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꽃입니다.
봉숭아 꽃어릴적 추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꽃입니다. ⓒ 황주찬

수줍음 꽃이 잎사귀 뒤편에 몰래 피었습니다. 수줍은 처녀처럼 숨어있네요.
수줍음꽃이 잎사귀 뒤편에 몰래 피었습니다. 수줍은 처녀처럼 숨어있네요. ⓒ 황주찬

손톱 손톱위에 잘 찧은 봉숭아 꽃을 올려놓습니다. 붉은 물이 손톱에 잘 스며들까요?
손톱손톱위에 잘 찧은 봉숭아 꽃을 올려놓습니다. 붉은 물이 손톱에 잘 스며들까요? ⓒ 황주찬

봉숭아 꽃 누군가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이기 위해 봉숭아 꽃은 이렇게 망가져야 합니다.
봉숭아 꽃누군가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이기 위해 봉숭아 꽃은 이렇게 망가져야 합니다. ⓒ 황주찬

종종 상사호 구경하러 오는데 그때마다 체험장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토요일인데도 문이 활짝 열려있더군요. 두말 않고 그곳에 차를 세웠습니다. 인심 좋아 보이는 할머니가 그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불쑥 찾아온 손님에게 편히 쉬어가랍니다.

비닐하우스를 지나면 정자가 있으니 느긋하게 쉬고 가랍니다. 말만 들어도 고맙더군요. 체험장을 둘러보니 가을이 가득합니다. 석류와 머루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비닐하우스 밖에는 빨간 봉숭아꽃이 피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가 그 꽃을 바라보며 예쁘다고 탄성을 지릅니다.

주름진 손으로 예쁜 봉숭아꽃을 하나하나 정성껏 땁니다. 집에 돌아가 꽃물을 들이겠답니다. 일흔이 넘은 어머니는 여전히 어릴 적 추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담 밑에 핀 봉숭아꽃을 따서 손톱을 물들이던 지난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나 봅니다.

손가락 끝에 고이 물든 봉숭아 꽃물이 첫눈 내릴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 사랑이 이루어진다던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금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걸까요? 어머니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열심히 봉숭아꽃을 따더군요. 추억을 따고 있는지 아니면 손자들 꽃 물 들일 생각에 즐거우신지 궁금합니다.

"봉숭아 물이 예쁘게 들었네... 아쉽다, 발가락도 물들일걸"


다섯손가락 열 손가락에 모두 봉숭아 꽃물을 들였습니다.
다섯손가락열 손가락에 모두 봉숭아 꽃물을 들였습니다. ⓒ 황주찬

엄지손가락 봉숭아 꽃물든 엄지소가락입니다. 아들아! 손톱 물어 뜯지 말아라.
엄지손가락봉숭아 꽃물든 엄지소가락입니다. 아들아! 손톱 물어 뜯지 말아라. ⓒ 황주찬

봉숭아 꽃물 아침에 일어나 비닐조각을 벗겼습니다. 예쁜 봉숭아 꽃이 손톱에 스며들었습니다.
봉숭아 꽃물아침에 일어나 비닐조각을 벗겼습니다. 예쁜 봉숭아 꽃이 손톱에 스며들었습니다. ⓒ 황주찬

입가에 맴도는 궁금증,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꽃 따는 어머니 모습이 열아홉 처녀처럼 예뻐 보여 한없이 보고만 있었죠. 그렇게 즐거운 가을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양껏 따온 봉숭아꽃과 소금을 사기그릇 넣고 열심히 찧어 아내에게 나눠줍니다.

집에 돌아가 세 아들 손톱에 꽃물들이랍니다. 어머니 덕분에 세 아들과 아내 손가락에 봉숭아꽃이 예쁘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비닐봉지를 마흔 개나 잘랐고 손가락 마흔 개를 비닐조각으로 싸맸습니다. 재밌는 일은 세 아들이 꽁꽁 싸맨 비닐조각을 다음 날 아침까지 벗지 않았다는 겁니다.

손가락을 비닐로 싸맨 터라 답답했을 텐데 용케 아침까지 비닐조각을 달고 있더군요. 아침에 일어나 세 아들 손가락에 묶인 비닐조각을 벗겼습니다. 예쁜 봉숭아 꽃물이 아기자기한 손가락에 물들었습니다. 세 아들은 누구 손톱이 가장 예쁜지 견줘 보느라 또 한바탕 소동을 벌입니다.

뒤늦게 큰 방에서 아내가 부스스 일어납니다. 아내가 세 아들 손톱을 보더니 한마디 합니다. "봉숭아물이 예쁘게 들었네. 아쉽다, 발가락도 물들일 걸" 헉! 그럼 지난밤 아내 한마디에 따라 팔십 개나 되는 비닐조각을 손가락과 발가락에 묶을 뻔했군요. 가을, 이렇게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봉숭아 꽃#가을#상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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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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