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기사 보강 : 10일 오후 7시 8분]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일왕에 과거사 사과를 요구했던 발언을 번복하고 한·일 정상이 '확전 자제'에 동의했다. 그런데 지난 한 달 동안 한·일 사이의 '무력만 뺀 전쟁'을 생각하면 김 빠지는 결말이지만, 그 실익이 거의 없다는 점은 더욱 허탈하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일 한·일 관계 전문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일왕이 방한할 경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하면 한·일 관계가 풀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는데 사과발언만 부각돼 진의가 왜곡됐다"고 말한 것으로 참석자들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또 "일본이 아무리 힘이 빠져도 경제력이 우리의 4배나 되는 강한 나라"라며 "마치 우리가 뛰어넘은 나라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일본은 국제사회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이고, 배울 점이 많은 나라"라면서 "한·일 관계는 큰 의미가 있는 관계이고, 임기 중에 복원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통령이 "진의가 왜곡됐다"고 말한 부분은 지난달 14일의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왕의 사과 요구'발언에 대해, 또 일본의 경제력과 국제적인 영향력을 언급한 부분은 지난달 13일 "일본의 영향도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 해명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일왕 사과 요구' '일본 예전 같지 않다' 발언이 왜곡 전달?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를 두고 '이명박 대통령이 한·일관계 복원에 나섰다' '한·일 관계가 유화국면으로 들어설 것'이라는 평가와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독도 방문 뒤 연이어 한 발언을 다시 살펴보면, 최근의 '해명'은 '말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독도를 방문한 나흘 뒤인 8월 14일 충북 청원 한국교원대에서 열린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책임교사 워크숍'에 가서 교사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독도 방문 관련된 말씀을 해달라'는 참석 교사의 요청에 배경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모든 나라에 국빈 방문을 했지만 일본은 안 가고 있다. 셔틀 외교는 하지만. 일본 국회에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게 하면 하겠다. (일왕도) 한국 방문 하고 싶으면 독립운동하다 돌아가신 분들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 몇 달 고민하다 '통석의 념' 뭐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이 발언을 '일왕의 방한 및 사과가 한·일 관계를 진전시킬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제안으로 해석할 이가 얼마나 될 지 의문이다. 이 대통령은 마치 일본 일왕이 방한을 원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깔고,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일본 방문 때 아키히토 일왕이 '사과와 유감 사이의 신조어'로 표현한 '통석의 념'을 언급했다.
이를 '제대로 사과하지 않을 거면 한국에 올 생각도 마라'고 해석하는 게 '진의가 왜곡된 것'이라면, 기자가 국어 공부를 다시 해야 할 판이다. 이 대통령이 일본의 국제적 영향력을 언급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지난 8월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의장단의 오찬 회동 대화를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이 브리핑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병석 국회부의장 : "이번 독도 방문은 참 잘하신 일이다." 이 대통령 : "독도 방문은 3년 전부터 준비했는데, 작년에도 독도에 휘호를 갖고 가려 했는데, 날씨 때문에 가지 못했다. 이번엔 주말인 토·일요일에 가려 했는데, 날씨 때문에 당일로 갔다 왔다. 일본 측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이다." 고흥길 특임장관 :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84.7%가 (이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지지한다고 한다." 강창희 국회의장 :"독도 문제에 관해선 일본이 연례행사처럼 도발을 해 오는데, (그때마다) 국민들이 참 답답했는데, 이번 방문으로 참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이 대통령 : "독도는 우리 땅이다, 굳이 갈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작년 11월 교토 정상회담에서 (일본 측이) 오히려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얘기해서 1시간 이상 설득한 적 있다. 일본 같은 대국이 마음만 먹으면 풀 수 있는데, 일본 국내 정치 문제로 인해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영향도 예전 같지는 않다."국회의장단이 이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추켜세우고 이 대통령도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일본 측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 "일본의 영향도 예전 같지는 않다"고 말한 것은 분명 독도 방문에 대한 일본의 문제제기나 한·일관계 악화상황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에게 일본은 중요한 나라'와 같은 뜻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한 달간의 롤러코스터 외교 뒤 얻은 것은 국정지지도뿐?
따라서 이 대통령이 지난 5일 한·일 관계 전문가들을 만나 자신의 이전 발언에 대해 언급한 것은 '해명'이 아닌 '번복'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 '이제 그만 싸우자'는 얘기다. 지난 9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장에서 나오면서 마주친 한·일 정상이 4~5분 정도 서서 얘기하면서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협력하기로' 한 것도 이 대통령이 일본을 향해 유화적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난 한 달간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허탈하기만 하다. 한·일 군사정보 협정 등 군사협력을 추진하다가 돌연 독도를 방문하고 연이어 일본을 향한 강경발언을 쏟아냈던 일, 정상간 친서 전달을 놓고 외교당국간 반송 소동을 벌이고 양국 의회가 서로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일 등 한·일 양국 관계는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정상에서 바닥으로 급한 내리막을 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외교 롤러코스터'에도 독도 영유권이나 종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엔 전혀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노다 일본 총리가 독도 영유권에 대해 TV에서 담화문을 발표하고, 급기야는 내각 각료들이 일본군의 종군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던 1993년의 '고노 담화'까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뿐 아니라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이 나서서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부정하고, 재무장을 위해 헌법 개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선거 이슈로 떠올랐다.
정치권이 요란하게 움직이니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잘못된 주장도 일본 국민들 사이에 더 널리 공유되는 계기가 됐다. 최근 국제스포츠 경기를 구경하는 일본 관중은 어느 때보다 욱일승천기에 강한 애착을 표현하고 있다. 일본 내 친한파는 입지가 좁아졌고, 인기 있던 한국 연예인들도 각종 출연기회가 봉쇄되는 등 한류도 철퇴를 맞았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높았다. 여론조사 기관마다 차이는 있지만 60% 이상 압도적으로 독도 방문을 찬성했고, 20% 근처에 머물던 국정지지도도 독도방문 뒤 30% 근처까지 올랐다.
강창희 국회의장의 표현대로 상당수 국민들은 '속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 말고 한국 국민이 얻은 실익은 찾기 힘들다.
이 같은 지적은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도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독도방문 이후 이 대통령의 한·일관계 운영에 대해 "당에서 공개적으로 비판을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강경책이 인기를 끄는) 독도 문제이기 때문"이라며 "독도는 분쟁 없이 20년이 지나면 국제법상 우리들이 절대 유리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조용한 외교'를 해왔던 것인데, 대통령이 또 저렇게 사고를 쳤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푸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