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려는 경이적인 나라였다. 땅의 크기로 보나 군대의 규모로 보나 고려는 몽골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려는 몽골과의 40년 전쟁을 무승부로 끝냈다.
그래서 몽골은 화친조약을 맺은 뒤에도 고려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이 공주들을 고려에 시집보낸 것은 그런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만약 고려를 시시하게 봤다면, 공주들을 시집보낼 필요도 없이 무력으로 고려를 제압하려 했을 것이다. 공주들을 보낸 것은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이처럼 고려-몽골 결혼동맹의 기원을 살펴보면, 이것은 고려보다는 몽골에게 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공주들을 시집보내면서까지 고려와의 동맹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 결혼동맹이 결코 수치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인들은 이 결혼동맹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몽고와 고려의 '결혼동맹' 고려와 몽골이 전쟁을 할 때는 고려가 꿀릴 게 없었다. 그러나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하면서부터 양국의 국력 차이가 확연해졌다. 가난한 집 아이가 부잣집 아이와 주먹질을 할 때는 별로 꿀릴 것이 없다가, 막상 친해져서 서로의 집을 왕래할 때는 왠지 주눅이 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서도 그런 양상이 나타났다. 고려왕이 주눅 들고 몽골 공주가 안하무인이 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이하 '제국공주')의 사례다.
충렬왕은 몽골과 화친조약을 맺은 원종 임금의 아들인 동시에, 드라마 <신의>에 나오는 공민왕의 증조부다. 충렬왕 부부의 사례를 들어보면,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이하 '노국공주')가 남편과 고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중국 땅을 통치한 왕조들은 현재 왕(혹은 황제)의 딸은 공주, 현재 왕의 누이는 장(長)공주, 현재 왕의 고모는 대장(大長)공주라 불렀다. 제국공주나 노국공주의 시호에 '대장'이 붙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왕의 아들은 왕자라고 부르면서 왕의 딸은 왕주가 아닌 공주라고 부른 것은 고대 중국의 결혼문화 때문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신부의 아버지가 결혼식을 주관했다. 하지만, 왕들은 지위와 입장 때문에 결혼식 행사까지 주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들은 공(公)이란 작위를 가진 왕족에게 결혼식 때 자기 딸의 아버지 역할을 대행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처럼 결혼식 때만큼은 '공의 딸'이라는 뜻에서 공주란 표현이 생겨났다. 이런 관행이 굳어져서 공주란 용어가 정착한 것이다.
무시무시했던 '제국공주' 제국공주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의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이다. 여담이지만, 이름 끝부분에 '미실'이 붙어 있어서인지 그는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처럼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려사> 제국대장공주 열전에 따르면, 건강문제가 생긴 충렬왕은 개경성 바깥 서쪽에 있는 천효사란 사찰로 거처를 옮기려 했다. 이때 충렬왕 부부가 천효사로 이동하면서 생긴 에피소드가 있다.
충렬왕의 행렬이 앞장섰고, 제국공주의 행렬은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다. 왕은 천효사가 있는 산의 아래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공주의 행렬이 갑작스레 멈춰서는 것이었다. 공주가 자기 쪽 수행원이 적다면서 개경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제국공주의 말을 전해들은 충렬왕은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되돌렸다. 공주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공주가 있는 곳까지 왕이 돌아왔을 때였다. 갑자기 공주가 몽둥이를 들고 왕을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수행원을 적게 배정한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아랫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한 충렬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제국공주 앞에 휙 던졌다. 공주한테 복수를 할 듯이 보였지만, 그는 공주의 시종인 홀라대 쪽으로 얼른 뛰어갔다. 그리고는 홀라대에게 한바탕 호통을 쳤다.
그 사이에 제국공주의 노여움은 풀렸고, 이들은 다시 천효사로 행차했다. 그런데 천효사에 들어간 직후에 충렬왕은 다시 한 번 매질을 당했다. 제국대장공주 열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번에는 왕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하여 욕을 하고 때리면서 말을 타고 죽판궁(개경에 있었던 궁궐)으로 가려 했다."절 입구에서 자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가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하여 충렬왕에게 욕설을 퍼붓고 몽둥이를 다시 집어 들었던 것이다. 이 사례는 몽골 공주들이 고려왕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고려왕과 몽골 공주의 관계가 그처럼 나빴기 때문에, 몽골 공주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의심을 받는 고려왕도 나타났다. 충렬왕의 손자이자 공민왕의 아버지인 충숙왕은 몽골 출신인 복국장공주(이하 '복국공주')를 폭력적으로 다뤘다는 혐의를 받았다. '장공주'의 의미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고려사> 복국장공주 열전에 따르면, 공주는 고려에 온 지 4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몽골 정부는 진상 조사단을 파견했고, 공주의 요리사인 한만복으로부터 "왕이 평소에 부인을 자주 구타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 진술은 공주의 죽음이 충숙왕의 구타 때문이라는 암시를 띤 것이었다.
충숙왕은 한만복의 진술을 부인했지만, 정황을 보면 그가 복국공주를 죽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공주와 결혼하는 바람에 후궁인 덕비(훗날의 공원왕후, 공민왕의 어머니)와 강제로 떨어져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충숙왕은 덕비를 몰래 만났고 복국공주는 이들의 만남을 방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주가 급사한 점을 고려하면, 한만복의 진술처럼 왕이 공주를 구타했고 그것이 사망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개의 대표적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고려왕과 몽골 공주의 결혼생활은 일반적으로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이 처음부터 정략적으로 이루어진 데에다가 몽골 공주들이 고려왕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들의 부부생활이 평화롭기란 쉽지 않았다.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특이한 러브스토리
이런 점을 감안하면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러브스토리는 상당히 특이하다. <고려사> 노국대장공주 열전에 따르면, 공민왕은 공주가 죽은 뒤 그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두고 몇 년간 추모했다. 물론 사극이나 소설에 묘사되는 것처럼 폐인이 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공민왕은 공주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노국공주는 다른 몽골 공주들과 달리 남편과 고려를 존중하고 반몽골(반원나라) 정책에도 협조적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가 공민왕의 반몽골 정책을 방해했다면, 공민왕이 그처럼 자신감 있고 열정적으로 몽골과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그가 죽은 뒤에 공민왕이 그처럼 오랫동안 추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록 허구이기는 하지만, 드라마 <신의>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드라마 속의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자주 및 개혁 정치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공민왕이 훌륭한 인재들을 얻을 수 있도록 내조를 아끼지 않는다.
노국공주의 남편사랑·고려사랑은 공민왕이 세계 최강 몽골을 고려 땅에서 몰아낸 원동력 중 하나였다. 다른 몽골 공주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지만, 노국공주의 경우만큼은 '출가외인'이란 말이 잘 부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