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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 친구를 구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쓰겠다고 지인에게 말했을 때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건 너무 '앵벌이 기사' 아니야?"

'앵벌이'라도 좋다. 나는 이곳 제주에서 '짜파게티'다. 오리지널 짜장이 아닌 짜파게티. 그것도 자주 외로운 짜파게티. 일명 '짝퉁 도민'이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짝퉁은 오리지널을 찾기 마련이다. 

제주의 여름은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휴가철이 되면 우리 동네 대평리의 게스트하우스들도 예약이 어려워질 정도로 여행자들로 북적인다. 하루에도 많은 이들이 올레길을 걷느라 지친 몸을 끌고 온다.

그리고 '한라산 야간등반(제주도 소주 '한라산'을 밤늦게 까지 마시는 일)'까지 마치고 떠나간다. 일반 회사원은 물론이고 피디, 방송작가, 교수, 기자, 군인, 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오는데, '차갑게 한 투명한 한라산' 앞에선 누구나 평등해진다.

소주잔을 놓고 말을 섞다 보면 종종 비슷한 감성을 지닌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금방 친구가 되고, 다음날 함께 올레길을 걷거나 내 차에 태워 김영갑 갤러리를 가고, 오름을 오르곤 한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문득 깨닫는다.

'이들은 모두 곧 육지로 떠난다. 그러면 다시 나만 혼자 남는다.'

무더운 여름의 끝이 보이던 지난 9월 초, 그날도 그랬다. 제주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가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어디 한 군데라도 더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집에서 가까운 군산으로 향했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대평리 마을은 물론이고 날씨가 좋으면 모슬포까지 탁 트인 전경이 한눈에 확 들어오는 멋진 곳이다. 시간이 촉박해 중턱까지는 차로 오르기로 했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열심히 올라가다 보니, 차 한 대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태풍으로 흘러내린 토사로 길이 막혀 앞으로 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차량 주인은 젊은 남자 혼자였는데, 군대는 무사히 갔다 왔을까 싶을 정도로 가는 팔다리의 소유자였다.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두 여자는 남자를 도와 토사를 치우기로 했다. 삽 같은 장비가 있을 리 없었다. "집에 있는 국자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대평리 마을에 좋은 일 하는 셈치자며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 몸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됐다.

 군산에 올랐다. 빨간 동그라미 속이 필자.
군산에 올랐다. 빨간 동그라미 속이 필자. ⓒ 조남희

육지로 돌아간 친구, 혼자남은 난... 적막했다

군산에 오른 뒤 친구를 제주공항까지 바래다줬다. 친구는 공항으로 들어가고, 결국 나 혼자 남았다. 적막했다. 제주공항 활주로보다 길고 텅빈 길이 내 가슴에 남은 듯했다. 올 땐 둘이었으나, 갈 땐 혼자였다. 공항에서 집까지 40분, 먹먹한 가슴을 꾹꾹 눌렀다.

운동화를 빨다가 울어본 적이 있는가. 배웅을 마치고, 빈 집에 돌아와 엉망이 된 신발들을 빨다 말고 외로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운동화를 빨다 말 수 없고, 흙으로 엉망이 된 욕실도 치워야 했다. 나는 제주에서 또 하나의 섬이었다.

제주에서 살겠다고 다짐할 때 이미 예상했던 쓸쓸함이다. 하지만 막상 그것과 대면하니, 견디고 받아들이는 일이 때로는 버겁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주에 사는 건 무척 좋지만, 홀로 눈물을 훔치는 일도 숙명인 듯하다. 

뭍으로 떠나지 않는, 떠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다. 제주도민과 친구되기.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섬 사람이 육지 사람들에게 배타적일 수 있다는 것은, 가만 생각해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살아온 땅이 다르고, 말씨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그들에게 나는 어디선가 굴러들어와 언제 또 어디로 굴러갈 지 알 수 없는 돌일 뿐이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에게 곁을 내어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조심스레 도민들의 제주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나와 같은 '제주 이민자'들과도 교류해야겠지만 말이다.

오리지널 제주도민,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작년 여름 8월 첫 주였다. 혼자 제주에 와 협재 해수욕장을 찾았다. 비키니를 입은 처자들이 해안선에 길게 누워 있는 광경을 접한 순간, 나는 알았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나는 사람이 많아 북적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더구나 8월 첫 주는 휴가철의 절정 아닌가. 내가 왜 이걸 생각 못했을까. 심지어 어디선가 방송도 들려왔다.

"서울 반포에서 온 OOO 어린이, 부모님에게 돌아가세요."

반포라니. 서울 반포라니. 서울을 피해온 내게 너무 가혹한 단어였다. 반포 고속터미널 부근의 교통체증이 떠오른다. 반포에서 온 어린이가 원망스러워졌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다 방파제 쪽을 보니 사람이 없었다. 막걸리 두어 병을 샀다.

나는 여행을 가면 언제 어디서나 펼쳐 깔고 앉을 수 있게 항공담요를 준비한다. 그날은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슬쩍한 항공담요를 깔았다. 마일리지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오면서 항공담요를 슬쩍했다는 것이 뭔가 우스웠지만, 어쨌든 항공담요는 이럴 때 무척 유용하다.

담요를 방파제 한 구석 바닥에 곱게 깔고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동네 할아버지가 손주와 산책을 하고 계셨다. 나의 막걸리를 탐하는 눈길이 느껴진다.

"앉으세요, 할아버지, 막걸리 한잔 하세요."

막걸리 잔이 오고 갔다. 내가 사온 막걸리는 어느새 동이 났다. 나는 '막걸리 셔틀'이 되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 동네 부녀회장님이라는 해녀 아줌마까지 셋이 말을 섞게 되었다.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이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서 영 불편스러워~. 나는 괜찮은데 아들이 젊어서 좀 그래~."

"정작 너무 신경 쓰시는 건 할아버지가 아닌가요?"라고 물으려다 참았다. 부녀회장 아주머니는 비양도의 해녀들과의 구역다툼 이야기를 비롯해 제주로 시집 온 이주여성 이야기 등등을 풀어내셨다. 

막걸리에 얼큰히 취해버린 자리 끝에, 할아버지는 다음날 새벽 함께 낚시를 가자고 하셨다. 제주에서 젊은 남자 여행자의 전화번호가 아니라 동네 할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따게 될 줄 이야. 다음날 새벽, 전날의 막걸리가 채 깨지도 않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헉, 정말로 할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여기 게스트하우스 앞이야, 나와."
"(헉) … 네."

할아버지의 지프차를 타고 대정으로 내달렸다. 내 얼굴이 탈까 싶어, 내가 쓸 모자까지 준비한 할아버지. 낚시 포인트에 도착했다. 나는 갯바위에 앉아 졸고 있는데... 세상에나, 할아버지는 실한 벵에돔을 줄줄이 낚아 올리셨다. 이어 그 자리에서 능숙한 솜씨로 회를 떠 주셨다. '모닝 소주' 한잔이 빠질 수 없다. 

 낚시하시는 할아버지. 젋어보이지만 환갑이 넘으셨다.
낚시하시는 할아버지. 젋어보이지만 환갑이 넘으셨다. ⓒ 조남희

 벵에돔이 내게로 왔다.
벵에돔이 내게로 왔다. ⓒ 조남희

낚시를 마친 뒤 할아버지는 다시 나를 차에 태웠다. "(음식) 정말 잘하는 집이 있다"며 어디론가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보신탕집이었다. 나는 보신탕을 좋아하지 않지만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쿨하게 계산도 했다.

할아버지는 "보신탕에 대한 답례를 해야 한다"며 다시 협재로 차를 몰았다. 우린 방파제에서 낚아 올린 모살치로 다시 회 잔치를 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함께 자리를 하던 동네 아저씨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바다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도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잠시 뒤, 바다로 뛰어든 아저씨는 뿔소라 한 개를 들고 나왔다. 한라산 소주병으로 뿔소라를 깨더니 당황한 나에게 "자, 이거 먹어봐"라며 내밀었다. 맛있었다. 술 자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할아버지, 저 제주도에 살게 됐어요

할아버지께 "서울 가서도 종종 연락드리겠다"며 협재를 떠났다. 하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그 후로 다시 연락을 못했다. 그 할아버지는 내가 제주에 살게 된 것을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

오리지널 도민 할아버지에게 모자를 돌려드려야겠다. 횟집에 가면 십만 원을 호가하는 자연산 벵에돔을 다시 한 번 무한리필 맛보고 싶다는 나의 속셈은 우선 숨겨야겠다. 할아버지와 '친구'는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말벗'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제주도 남자들은 일 안하고 할머니들이 물질해서 먹여 살린다고 많이들 얘기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할아버지 아들 저한테 소개시켜 주신다더니... 왜 더는 말이 없으시죠?'

나는 분명히 이런 질문들이 목까지 차서 고민하다 막걸리 몇 잔 들이켜고 말 거다.

엊그제, 놀러간 게스트하우스의 저녁 자리에는 남자 게스트만 네 명 있었다. 그 중 한 분은 버스 기사로 일하는 나이 마흔의 도민이다. 제주 이민자를 다룬 책에 소개된 것을 보고 궁금해서 찾아왔단다. 육지 사람들은 여행을 하고 싶으면 전라도니, 강원도니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제주 사람들은 뭍으로는 맘 먹고 나가야 해서, 젊을 때는 섬이 답답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제주에 사는 게 좋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제주사람이면서 제주를 여행한다.

적어도 삼대를 살아야 도민으로 인정해준다는 제주도. 내가 제주에 살기 시작한 지는 불과 석 달이다. 나는 제주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이젠 잠시 머물다 떠나는 육지에서 온 여행자의 제주가 아닌, 바람타는 섬 제주에서 삼대를 살아온 오리지널 도민들의 묵직한 제주 이야기를 들어 보고싶다.

섬에 산다고 해서, 나도 섬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제주도#대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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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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