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경비로 관광이 아닌 여행다운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가칭 '달팽이'들)을 위한 제주도 여행 가이드를 자청하고자 하는 비장한(?) 각오로 모니터 앞에 앉았다. 결의에 찬 눈빛은 이내 마음을 배반하고 한참을 하얀 화면 위에서 커서만 홀로 깜박이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만 본다. 자꾸 멈칫대는 나를 느낀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주도를 여행하고 돌아왔던 나는 이런 지독한 머뭇거림 때문에 매번 제주도 여행기를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글쓰기를 포기하고야 말았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만큼 제주도는 내게 특별한 여행지다. 퍼내도 퍼내도 솟아나는 옹달샘처럼 제주도는 아무리 가도 질리기는커녕, 갈수록 더 은근한 매력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적어도 내겐 단순한 감흥을 넘어 후유증까지 남기는 곳이다. 이렇게 마음의 동요를 심하게 만들다 보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꾸 육지 너머 그 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심각한 '제주앓이'라고나 할까.
모르긴 해도 이러한 이유들로 여전히 제주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일 테고, 우연한 여행으로 시작해서 그곳에 아주 눌러살게 됐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크게 헤아리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이 된다. 어떻게든 이번만은 자꾸 뒷걸음치는 자신을 이겨내고 끝까지 '달팽이'들을 위한 여행기를 총 3회에 걸쳐 해보고자 한다.
여행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달팽이'들을 위한 팁
성수기(7~8월)에 비행기 표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숙박시설을 이용하려면 상당히 애를 먹어야 할 것이다. 성수기에 비행기 표를 구하려면 보통은 1~2달 정도 서둘러 예약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또 펜션 같은 경우는 비성수기에 비해 기본 2배 정도의 숙박료를 올려 받는다(혹은 그 이상). 성수기에 비싼 숙박료를 지불하고 외부로 노출이 많은 관광지(흔히 '패키지'로 이용하는 경우)들만 돌다 보면 아무리 제주도 여행이라 해도 불쾌해질 수밖에 없다.
휴가철이 정해진 회사원들에겐 어려운 일이겠지만, 진정으로 제주도를 만끽하고 싶다면 성수기를 피할 것을 권하고 싶다. 최대한 비수기를 이용하면 숙박료를 펜션 사장님과의 '밀당'(혹은 협의) 하에 얼마든(?) 저렴하게 할인받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도 얼마든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내 경험에 따르면 무조건 여행지에서 급하게 숙박을 청하는 것보다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부지런히 검색을 하고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아 여러 군데 전화로 상담을 한 뒤 결정하는 편이 낫다. 보다 친절하고 저렴한 숙박시설을 만날 기회가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숙박시설의 경우에는 여행자를 숙소까지 픽업해주는 것은 물론, 주변 여행지까지 데려다 주는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
요즘은 '올레꾼'들을 위한 소규모의 게스트 하우스들이 많이 생겨나서 '도미토리(공동 침실)'를 이용한다면 여행 경비(일박 기준으로 평균 1만5000원 정도)는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소지품 관리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많은 인파와 소음 속에서 사색의 기회를 잃는 것보다는 한가롭고 조용한 제주의 바람을 음미하려는 달팽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제주도 여행의 적기는 오래 걸어도 땀방울이 쉽게 맺히지 않은 봄이나 가을. 나처럼 비행기 공포증을 앓고 있거나, 경비를 좀 더 줄여보고 싶다면 'KTX 선박연계(15~30% 할인)'를 이용해 볼 것을 권한다. 오전에 도착하는 기차에 한해서는 역에서 바로 셔틀버스로 항구까지 무료이용을 할 수 있는 서비스도 준비돼 있다.
보통 제주로 향하는 선박은 4시간 30분에서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선박 내에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부대시설(공연 관람도 가능)도 갖춰져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선박 전체가 '와이파이 존'으로 돼 있어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다면 무료하지 않게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 망망대해를 마주하는 가판 위에서 바람과 사색을 즐겨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조차 힘들면 가격은 조금 비싸도 2시간에서 3시간대로 건널 수 있는, 보다 빠른 선박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 연계 할인 혜택은 없다.
마음이 탁 트이는 김녕 해수욕장
처음 제주도에 갈 때는 막연하게 알려진 곳들을 찾아다니다가 실망한 경험이 많았다. 내게 '용두암'은 가장 실망스러웠던 여행지로 기억된다. 반대로 정해두지 않고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던 중에 들렀던 '김녕 해수욕장'의 바다 빛은 다음을 기약하게 할 만큼 환상적이었다. 창문 너머로만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던 그곳은 다음 번 여행 때 찾아갈 수 있었다.
'김녕 해수욕장'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에메랄드빛 바닷가에서 낮게 몸을 숙인 풀들과 야생화들이 핀 백사장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밀물 때 고둥과 보말을 잡아서 숙소에서 끓여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밤에도 잠들지 않는 바다 곁으로 시시각각 달라지는 바람과 파도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도, 아침에 돌담을 끼고 소박한 동네를 한 바퀴 거니는 느낌도 마냥 좋았다.
흘러가는 시간에 구애받거나 시달리지 않아도 됐고,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느림이 잘 어울리는 바닷가였다. 단아하게 꾸며진 성당도 인상 깊었다.
함덕 서우봉에서 느낀 해녀들의 손맛은 '감동'
그다음 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북제주도의 푸른 바다 빛깔을 찾아 발길을 옮겼던 함덕 서우봉 해변 역시 김녕 못지않게 운치 있고 근사한 해안을 자랑하는 바닷가였다. 김녕이 편의 시절이 비교적 적은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면, 함덕은 조금 더 찾는 이가 많은 나름 번화한 해변이다. 예약을 하지 않고는 절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고급 리조트는 물론이고, 대형 숙박시설들도 즐비했다. 마을을 구석구석 찾아 헤매면 작은 민박과 게스트하우스도 찾아볼 순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함덕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함덕 어촌계 해녀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 '잠녀 해녀촌'의 감동을 자아내는 손맛이었다. 해녀들이 직접 채취한 해산물들을 가지고 음식을 하기 때문에 메뉴에서 활어 종류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코가 뻥 뚫리는 시원한 맛을 자아내던 성게알을 넣은 된장국과 처음 맛본 고소한 보말죽, 오독오독 씹히던 칼칼한 전복 물회, 통째로 구워 쓸개즙의 쓴맛이 살짝 느껴지는 뿔소라 구이까지. 주변 음식점들에 비해 값은 훨씬 저렴한데 맛은 훨씬 좋았다.
동네 슈퍼에서 대여해주는 자전거를 타고 몇 시간 동안 해변을 달리는 느낌도 참 평화로웠고, 갯바위의 거북손과 운이 나빠 나에게 걸린 조그만 방게는 그날 밤 간식거리가 돼줬다. 그렇지만, 다시 그 해변을 찾게 된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함덕 서우봉 해변의 매력에 있기보단 여러 번 감탄사를 쏟아내야만 했던 투박한 해녀들의 손맛 때문일 것이다.
조미료를 넣지 않고 해산물 고유의 맛으로 소박하게 차린 밥상에는 여타 식당들이 쉽게 가지지 못한 뭔가가 들어 있다. 그것은 형태를 가진 어떤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취향에 맞는 북제주 바다를 골라보세요
탁 트인 해안선이 예쁘면서도 조용한 바닷가 마을 김녕을 갈지, 조금은 세련되고 번화한 바닷가 함덕을 갈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두 바다를 차이를 직접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딜 가더라도 북제도의 바다 빛깔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김녕과 함덕을 모두 가봤다면, 굴곡이 아름다운 '애월' 바닷가도 추천하고 싶다. 이곳은 북제주의 손꼽히는 절경 중 하나다. 부디 취향에 맞는 북제주 바다를 골라 찾아가는 즐거움을 느껴볼 수 있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기사에서는 우도와 마라도, 곶자왈 에코랜드와 사려니 숲을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