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38년 전인 1974년 10월 24일.
이날은 내 삶에서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2년을 넘어 더욱 강고해지던 시절, 언론자유는 근원부터 봉쇄됐다. 언론의 1차적인 기능, 근본적인 존재 이유인 '사실보도'는 없었다. 언론이 '사실보도'를 하지 않으면 언론이 아니다. 기자가 '사실보도'를 하지 않으면 기자가 아니다.
그때 그랬다. 기자(記者)가 아니라 '기자인 것을 포기한 자(棄者)' '사람을 속이고 기망하는 자(欺者)'라고 했다. 그래서 대학생 시위 현장에는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라는 팻말까지 나왔다. 지금은 다른가.
38년 전 '자유언론'의 횃불
38년 전 그때, 젊은 기자들의 부끄러움과 분노, 절망과 좌절은 깊고도 깊었다. 벼랑 끝에 선 우리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확인하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저항의 횃불을 든 날이 바로 38년 전 오늘,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젊은 기자·피디·아나운서들은 '자유언론'을 외치며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싸우면서 박정희 독재가 박탈해간 언론자유를 조금씩 조금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었고, 우리는 젊었으며, 순수했고, 옳은 일을 하는 '선한 무리'였다.
잃어버린 자유언론의 영역을 조금씩 회복하면서 국민의 지지는 뜨거웠다. 언론의 공론장에서 사라졌던 '사실들'이 지면에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러자 박정희 유신 독재는 이를 억압하기 위해 그해 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광고를 일제히 강제로 없애 버렸다. 중앙정보부가 직접 칼을 뽑아 광고주들을 겁박했다. 하루아침에 광고가 사라졌다.
그렇게 하얗게 빈 광고란을 국민들이 성금을 내면서 격려문을 싣기 시작했다. 바로 격려광고였다. 그 바람은 뜨거웠다. 민주주의의 꽃이 격려광고를 통해 활짝 피었다. 박정희 유신독재는 더 큰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우리는 쫓겨났다.
뜨거웠던 자유언론의 횃불이 활활 불타기 시작한 그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의 날이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이날을 맞는 올해의 감회는 왜 이렇게 절박하고, 아픈가.
그날 함께 횃불을 들었던 선배·동료들의 머리 위에는 하얀 세월이 소복이 쌓여있다. 38년간의 온갖 간난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열일곱 분의 동지들을 저 세상에 보냈다.
올해 10·24가 이리도 절박하고 아픈 이유
올해 10·24가 이렇게도 절박하고 아픈 이유가 이런 인간적인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언론·정치·사회·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라는 절망과 분노 때문이다.
'언론' 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이건 언론이 아니다. 수구신문의 왜곡과 날조, 정권 친위대가 장악한 방송 쪽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정치 플레이, 80년 신군부 때 저질러진 언론인 대학살 이후 처음 등장한 언론인 대량 해고와 징계를 보면, 우리의 역사 시계는 다시 박정희 시대로 돌아가 버렸다.
박정희 시대로 돌아간 것은 언론만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유신 공주' 박근혜 후보가 지금 다음 대통령 자리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게 현실이다. 박근혜 후보는 말로는 역사 인식이 바뀌었다느니, 과거의 일을 반성한다느니 하지만 그것은 대통령 당선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담긴 생각과 역사 인식에는 아버지 박정희가 여전히 펄펄 살아있다. 최근 정수장학회 발언은 너무나 생생하게 이를 증명한다.
박근혜 후보에게 정수장학회 문제는 근거 없는 정치 네거티브, 흑색선전일 뿐이다. 그에게 정수장학회나 인혁당 사건의 역사적 진실이나 판결의 구체적 내용 따위는 관심이 없고, 그냥 단순하게 입력된 박정희식 인식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부일장학회의 김지태씨의 재산 헌납에 강요가 없었다고 법원도 인정했다고 얼토당토않는 말을 한 것이다. 뒤에 다시 주워담으려 했지만 더 헝클어졌다.
박근혜의 무지와 편견
정수장학회와 관련해 역사적 사실에 가장 근접한 보고서는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 결과일 것이다. 그 보고서에는 ▲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의해 (김지태씨) 수사가 시작됐음이 중앙정보부 지부장 진술에 의해 확인됐고 ▲ 1962년 6월 20일 김지태씨가 구속 상태서 강압에 의해 작성된 기부승낙서에 서명을 했으나 이마저도 기부의 의혹을 지우기 위해 석방 이후인 6월 30일로 변조됐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에 의해 확인됐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살고 싶으면 재산을 모두 '헌납'하라는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구체적으로 죄다 나와 있다.
국정원 보고서뿐만 아니라 김지태씨의 차남 김영우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1심 재판부도 5·16 장학회의 '헌납' 과정에 강압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다만 김영우씨가 패소한 것은 공소시효가 소멸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과 법원 판단을 놓고도, 재산을 되찾겠다고 소송을 제기한 유족이 패소했으니 "재산 헌납에 강압이 없었다, 법원이 인정한 셈"이라고 우기는 것은 박근혜 후보가 오만과 독선을 넘어 무지와 편견이 얼마나 가득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인물이 지금 다음 대통령 자리에 가장 가까이 가 있다.
정수장학회와 관련된 김지태씨 가족의 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은 동아투위(동아일보사 해직 언론인들 모임) 위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판결 내용과 똑같다.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를 인정하면서도 공소시효가 소멸했다며 패소 판결을 한 것이다. 국가권력의 범죄행위에 공소시효를 인정한다는 것은 '시간만 끌면 국가권력의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야 어찌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특별법 제정이 절실한 이유
제대로 된 세상이 온다면 당연히 특별법을 제정해 국가권력의 범죄행위에 공소시효를 없애고, 마땅히 그 책임을 묻는 것이 후대를 위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터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공소시효' 따위에 갇힌 세상에 살고 있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38돌을 맞는 날 아침,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매체에는 38년 전 보였던 '격려광고'가 가득 실렸다.
'언론자유 빼앗아 간 도둑놈을 잡아라' '언론의 자유는 시민의 생명입니다' '유신, 그 야만의 시대를 거부합니다'다시 '격려광고'가 실리고, 이렇듯 유신의 야만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올해 10·24를 맞는 마음은 그만큼 절박하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