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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병자호란 후 김상헌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라는 피끓는 노래를 남겼다.
한강. 병자호란 후 김상헌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라는 피끓는 노래를 남겼다. ⓒ 정만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조선 시대에 일어난 대표적 전쟁은 호란과 왜란이다. 호란은 북쪽 오랑캐들이 일으켰고, 왜란은 남쪽 섬나라 오랑캐들이 일으켰다. 두 전쟁은 우리나라에 막심한 피해를 끼쳤다.

김상헌(1570∼1652)은 병조호란 당시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끝까지 오랑캐와 싸울 것을 주장한 대표적 척화신(斥和臣)이다. 그러나 청에 항복하여 화친이 성립되자 관직에서 쫓겨난다.

그 후 1639년, 청이 명을 치기 위해 파병을 요구했을 때 극구 반대하다가 이듬해 청나라 심양(瀋陽)까지 잡혀갔다. 1642년 풀려나 귀국하지만 청과 밀무역을 하던 이계(李烓)의 농간으로 재차 끌려갔다가 1645년에야 석방되는 고초를 겪는다. 위의 노래는 처음 잡혀갈 때에 부른 것이다.


한강은 단순히 '큰 강'이 아니다


 한강
한강 ⓒ 정만진
노래 속의 삼각산과 한양수는 말할 것도 없이 서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삼각산은 지금의 북한산을 지칭하는 상징으로 보면 되겠다. 한강수는 물론 한강이다.

한강? 한강은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강의 한 곳이다. 이명박 정부가 '애지중지' 엎으려고 하는 그 '4대강'과는 다르다. 게다가 김상헌의 한강은 단순히 네 개의 큰 강 중 하나도 아니다.

한강은 서울을 안고 흐른다. 김상헌이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다시 보자 한강수야' 하고 노래할 때의 한강은 서울이자 국가다. 다시 내 나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김상헌은 그 걱정을 했던 것이다.

김상헌과 비슷한 토로를 남긴 안창호

1910년 4월, 조국 멸망을 앞두고 중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안창호도 김상헌과 엇비슷한 노래를 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時運)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하리니
나 간다고 슬퍼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이상준이 곡을 붙인 안창호의 <거국가>는 <한반도 석별가>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4절까지 있는 이 노래는 널리 퍼져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까지 노래가 끈질기게 애창되자 마침내 조선총독부는 부르고 퍼뜨리는 것을 금지했다.

안창호의 '시운'과 김상헌의 '시절'은 같은 말이다. 둘 다 외세에 눌려 자주국권을 행사하는 못하는 안타까운 나라 사정을 짚고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뜨거워 온몸과 마음을 바쳐 살아왔건만 어찌 이렇게 내 민족의 땅을 떠나야 한단 말인가.

 한강
한강 ⓒ 정만진

그런가 하면, 김상헌의 '삼각산'과 '한강수'는 안창호의 '한반도'와 같은 뜻이다. 수사법으로 말하자면 대유(代喩)다. '삼천리', '무궁화', '태극기'가 조국의 상징인 것이나 매 한가지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 전범자가 되어 타국으로 끌려가는 길에서 부른 노래다. 특히 종장은 귀국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로 표현하고 있다.

적국에 끌려가는 볼모, 다시 조국땅을 밟을 수 있을까

당연히 청나라에 잡혀가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갈 때 그는 어느 밤도 결코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사미인곡>의 표현대로 그의 일상은 '마음의 믜친 실음 텹텹히 싸여 이셔 짓난이 한숨이요 디나니 눈믈'이었을 것이다. 과연 조국으로 돌아가 기쁨으로 가족도 만나고, 벗과 둘러앉아 인생을 토론할 시간이 내게 다시 찾아올까. 그는 '인생은 유한한듸 시름도 그지 없다'는 정철의 갈파를 되새기며 한탄하고 또 한탄했을 터이다.

한숨은 바람이 되고 눈물은 세우(細雨)가 되어
님 자는 창 밖에 불거니 뿌리거니
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와 볼까 하노라

그래서 그런가, 곱고 가녀린 서정을 노래한 것이 분명한데도 '선입견'이 작동을 하는 탓인지 자꾸만 다르게 읽힌다. 조국은 나를 버렸는가. 나의 한숨소리와 휘날리는 눈물이여, 이역 만리 내 나라의 땅까지 날아가 다오. 나를 까마득히 잊은 채 깊이 잠들어 있는 내 조국의 정신을 일깨워다오.

 안창호는 중국 망명길에 오르면서 마포 나루에서부터 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 서해로 들어갔다. 지금도 한강에는 배를 타고 내리는 선착장이 있다.
안창호는 중국 망명길에 오르면서 마포 나루에서부터 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 서해로 들어갔다. 지금도 한강에는 배를 타고 내리는 선착장이 있다. ⓒ 정만진

한글 대신 영어를 국어로 채택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순수한 우리말로 해도 충분한 경우까지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사람들은 허다하다. 심지어 일부 인사들은 영어로 혼용하면 '개나 소나 알아 듣는다'면서 좀 더 낯선 불어 등을 쓰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잠들어 있는 민족인가.

한글 대신 영어를 상용하자는 자들도 있고

김상헌의 '한강'을 살펴본다. 본래 이 강의 이름은 '한가람'이었다. 한창, 한복판, 한길, 한밭 등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한가람'은 '큰 강'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었다. 

그런데 한자로 옮겨지면서 삼국 시대에 대수(帶水)가 되었다. '한[大]가람[水]'의 또 다른 훈차(訓借)인 대수는 '한반도의 허리띠[帶] 같은 강[水]' 정도의 뜻일 듯하다. 그리고 북(北)쪽에 있는 도랑[瀆]을 나타내는 북독(北瀆)도 쓰였다. 북독은 강의 남쪽에 있는 백제를 기준으로 붙여진 이름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당나라(618∼907) 이연수(李延壽)가 쓴 <북사>에 '백제의 북쪽 끝은 한강(漢江)에 접했다'는 표현이 나온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강에 접했다'? 이는 삼국 시대에 이미 '漢江'이라는 이름이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략 '아름다운 강'이라는 뜻의 '아리수(고구려)', '욱리하(백제)' 등으로 불리던 '한가람'이 어째서 '중국[漢] 강(江)'을 의미하는 '漢江'이 되어버렸을까. 굳이 한자로 바꾼다 하더라도 '韓江'이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 이성계가 회군한 섬으로 유명하다. 김상헌도 청나라로 잡혀갈 때 이 섬을 지나쳤을 것이다. 그는 섬에서 신의주 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 이성계가 회군한 섬으로 유명하다. 김상헌도 청나라로 잡혀갈 때 이 섬을 지나쳤을 것이다. 그는 섬에서 신의주 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 정만진

청에 끌려간 김상헌이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했던 우리땅 '한강'이 어처구니없게도 중국땅 '漢江'이라니! 동진(317∼419)과 교류하게 되면서 중국을 떠받들게 된 백제가 '漢江'으로 개명한 이래, 지금껏 변함없이 '漢江'이 되다니! 사대주의에 물든 채 잠들어 있는 조국의 실상이 '漢江' 두 글자에 숨김없이 비쳐 있는 듯하다. '강남 STYLE'의 고급 APT 창가에 앉아 Coffee의 향기에 빠진 채 漢江을 바라보는 21세기 상류 한국인의 초상이 눈에 어린다.

무엇이 급해서 그렇게 부랴부랴 중국, 미국 등 당대의 큰 나라를 끝없이 추종하나. 어째서 그토록 미제, 일제에 정신을 잃고,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 안팎의 국가이면서도 '국영' 텔레비전에 서양인이 마시는 음료수 선전을 내보내야 하나. 김상헌은 노래한다.

금오옥토(金烏玉兎)들아 뉘 너를 쫓니관대
구만리 장천(長天)에 허위허위 다니는다
이 후란 십리에 한 번씩 쉬엄쉬엄 니거라

천천히 가자. 특히 남의 나라 문화를 무턱대고 숭상하는 사대주의 정신만은 천천히 발휘하자.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살펴보고, 뒤집어보고 따져본 끝에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재창조하자. 그러지 않다가는 우리의 정체성이 '고국 산천을 떠나' 다시 조국으로 '올동말동' 내몰리는 신세가 될 것이다. 경제적 식민지, 문화적 식민지…… 얼마나 민망한 소리인가.  

친외세 반민중 성향 대통령, 결국 나라와 백성에게 피해 끼친다

'가노라 삼각산아...' 김상헌의 시조는 지도자에게 민족자주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명도 청도 어차피 외세이거늘, 자주 대신 굴종을 선택하여 한번 정신을 굽힌 지도자들은 이미 '뼛속까지' 친외(親外)가 된 탓에 결국은 나뉘어져 자중지란이나 일으킨다. 친청, 친일, 친러 등등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다투다가 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아간 조선 후기 지도자들의 행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친외세 반민중 성향의 지도자를 뽑으면 결국 나라와 '백성'들만 피해를 입는다. 대선이 코앞인 지금, 누구에게 '신성한 한 표'를 던질 것인가의 기준에는 후보자의 민족자주정신이 크게 고려되어야 한다. '... 다시 보자 한강수야!'

 검은[玄] 물이 흐르는 바다[海]의 길목[灘]이라고 해서 현해탄(玄海灘)이라는 이름을 얻은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의 바다.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아도 그렇지만 과연 물빛이 검다. 극작가 김우진과 음악가 윤심덕이 동반 자살한 바다 현해탄 너머로 멀리 대마도가 보인다.
검은[玄] 물이 흐르는 바다[海]의 길목[灘]이라고 해서 현해탄(玄海灘)이라는 이름을 얻은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의 바다.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아도 그렇지만 과연 물빛이 검다. 극작가 김우진과 음악가 윤심덕이 동반 자살한 바다 현해탄 너머로 멀리 대마도가 보인다. ⓒ 정만진
본문에 인용된 안창호의 <거국가>와 같은 노래를 창가(唱歌)라 한다. 창가는 한자의 뜻대로 풀이하면 '부르는[唱] 노래[歌]'라는 의미의 음악 용어다. 그렇다면, 부르지 않는 노래가 있을 리 없으니 '창가'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창가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쓰이기 시작한 '쇼카(唱歌)'를 그대로 옮겨와 사용한 명칭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직전 무렵에 많이 불려진 우리나라 창가가 애국, 독립 등을 강조한 민족의식 고양 주제의 노래가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한 역설이다.

당시 창가에는 가사를 줄인 것, 민요를 바꾼 것, 찬송가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런 창가들의 공통점은 노랫말이 담은 주제는 다양했어도 곡조는 서구의 악곡에 담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은 1920년에 창작된 <봉선화>다. 김형준 시, 홍난파 작곡. 본격적인 창작 동요의 효시는 1924년에 만들어진 <반달>이다. 윤극영이 가사를 쓰고 곡을 지었다. 그런가 하면, 최초의 인기 '유행가'는 1926년에 나온 <사의 찬미>다. '광막한 황야에 달니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대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차즈려 가느냐...>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에 윤심덕이 우리말 가사를 붙이고 직접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해 8월 4일 윤심덕은 극작가 김우진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면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정사했다. 그 사건 탓에 <사의 찬미>는 더 더욱 유명해졌다.

요약하면, 창가는 1900년을 전후하여 애창된 서양 곡조의 우리나라 노래라 하겠다.



#김상헌#안창호#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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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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