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철은 이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수려한 경관을 소재로 <성산별곡>을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식영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 1호로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번지에 있다. 
정자의 뒤에는 사진에 보이듯이 대단한 소나무가 휘영청 서 있다. 성삼문이 절의가에서 노래한 '낙락장송'이란 어휘가 실감나게 느껴지는 우람찬 노송 거목이다. 소나무 아래의 것은 정철 시비.
 정철은 이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수려한 경관을 소재로 <성산별곡>을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식영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 1호로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번지에 있다. 정자의 뒤에는 사진에 보이듯이 대단한 소나무가 휘영청 서 있다. 성삼문이 절의가에서 노래한 '낙락장송'이란 어휘가 실감나게 느껴지는 우람찬 노송 거목이다. 소나무 아래의 것은 정철 시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전라남도 담양군 추성로 1371번지에 가면 '가사문학관'이 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예향(藝鄕)'을 자부하는 전라도민들은 물론 가사문학관을 거느린 담양군민들도 조금은 마땅찮아 할 것이다. 그냥 '가사문학관'이 아니라 '한국'가사문학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부심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던지 한국가사문학관 내부의 게시물은 본심을 '살짝' 드러내고 있다. '(한국가사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송강정, 면앙정 등은 호남 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 면면히 그 전통을 잇게 하고 있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게시물에는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등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랑도 덧붙여져 있다.

전라남도 중에서도 특히 담양은 '한국가사문학의 대표작 두 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태어난 고장이다. 20대 시절에 이미 담양에서 <성산별곡>을 쓴 정철은 <관동별곡>을 지은 강원도 관찰사 재임 시기와, 우의정에 오르는 1589년 사이의 4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 때에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창작했다. 그만하면 한국가사문학관 게시물의 설명이 없더라도, 담양에 '한국'가사문학관이 세워진 데 대해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식영정


 식영정 오르기 전의 평지에는 <장서각>도 있다. 정철의 문집 등을 보관 중인 이 서고는 1973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식영정 오르기 전의 평지에는 <장서각>도 있다. 정철의 문집 등을 보관 중인 이 서고는 1973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한국가사문학관은 소쇄원과 식영정 사이인 남면 지곡리 삼거리에 있다. 이곳 삼거리는 광주호의 마지막 끝 부분인데다 광주와 담양에 이르는 만남과 헤어짐의 땅이다. 잠깐 멈춰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과연 문학의 향기를 뿜어낼 만한 절묘한 곳'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곳이다. 

삼거리 주위에서 정철과 가장 인연이 끈끈하게 닿는 곳은 전라남도 기념물 1호인 식영정과 광주광역시 기념물 1호인 환벽당이다. 1560년에 김성원이 지은 식영정은 광주호 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정철이 <성산별곡>으로 담아낸 '문학의 현장'이다.

식영정 일원은 경치도 뛰어나다. 식영정에서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푸른 빛깔의 풍경은 나그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상록수다운 녹색을 뽐내는 소나무들 사이로 잔잔하고 맑은 호수가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움은 말 그대로 '자연의 풍경'이다. 아니나 다를까, 식영정 일원은 국가 지정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성산별곡>은 식영정을 세운 김성원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광주광역시 기념물 1호인 <환벽당>. 광주시 북구 충효동 387번지에 있다. 정철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이전까지 이 정자에서 공부를 했다. 정자를 지은 이는 나주목사 등을 지낸 김윤제(1501-1572), 퇴임 이후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1호인 <환벽당>. 광주시 북구 충효동 387번지에 있다. 정철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이전까지 이 정자에서 공부를 했다. 정자를 지은 이는 나주목사 등을 지낸 김윤제(1501-1572), 퇴임 이후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식영정 뒤편의 정철 시비에서 <성산별곡>을 잠깐 읽은 다음, 남면 지곡리 삼거리로 내려와 왼쪽으로는 한국가사문학관, 뒤로는 식영정을 둔 채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려 광주로 넘어가는 작은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산비탈 왼쪽으로 난 오솔길이 나그네를 기다린다. 환벽당으로 가는 길이다. 그만큼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번지의 식영정과 광주시 북구 충효동 387번지의 환벽당은, 전남과 광주로 서로 다른 광역에 들어 있지만, 아주 가까이 있다.

정철도 많이 드나든 소쇄원


식영정과 환벽정만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정원을 대표하는 소쇄원도 이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 이는 담양군이 이들 세 정자를 묶어 '일동삼승지(一洞三勝地)'로 홍보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쉽게 헤아려진다. 한(一) 마을(洞)에 경치가 뛰어난(勝) 곳(地)이 셋(三)이나 있다는 말 아닌가.

식영정과 소쇄원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고, 환벽정은 광주시 북구 충효동에 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세 곳이 한 마을 안에 붙어 있는 '이웃 사촌'은 아니다. 그래도 담양군은 이들을 '일동삼승지'라고 묶었다. 그들이 '넘어지면 닿을' 만큼 서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인 셈이다.

 소쇄원의 중심 건물인 광풍각(光風閣)에 여행객들이 둘러 앉아 자연의 정취를 즐기고 있다. 사진 왼쪽의 흰 상의, 검은 하의를 입은 이들은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옷은 교복이었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수학여행 갈 때 교복을 입으라고 하면 어찌 될까.
 소쇄원의 중심 건물인 광풍각(光風閣)에 여행객들이 둘러 앉아 자연의 정취를 즐기고 있다. 사진 왼쪽의 흰 상의, 검은 하의를 입은 이들은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옷은 교복이었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수학여행 갈 때 교복을 입으라고 하면 어찌 될까.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스승 조광조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얽혀 억울하게 죽는 사건을 겪은 양산보는 1530년 이래 여러 선비들의 도움을 얻어가며 장기간에 걸쳐 소쇄원을 완성한다. 그런데 소쇄원은 정철과 시간적으로 특이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정철은 1536년에 출생했다. 소쇄원의 초정도 그 해에 건축되었다. 이는 소쇄원에 자주 드나들었던 정철 본인이 시로 남겨 증언하고 있다.

<瀟灑園題草亭> <소쇄원 초정> 

我生之歲立斯亭 나 태어난 해에 이 정자 섰네   
人去人存四十齡 간 사람 남은 사람 세월 40년   
溪水泠泠碧梧下 계곡물 찬 곳 벽오동 아래   
客來須醉不須醒 손님 취하도록 술을 마시세 

정철의 결혼 인연을 맺어준 환벽정

세 정자의 중간 지점에 있는 환벽당은 관직에 나아가기 이전의 정철이 16세부터 27세까지 공부를 했던 곳이다. 이 정자는 나주목사 등을 지낸 김윤제(1501-1572)가 지었다. 그는 관직에서 은퇴한 뒤 이곳에서 제자를 키우며 여생을 보냈다.

하루는 마루에서 깜빡 낮잠이 빠졌는데, 꿈에 용 한 마리가 환벽정 앞 낚시 자리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기이하게 여긴 김윤제는 부랴부랴 아래 개울로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아주 잘 생긴 소년 하나가 거기서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의 너무나 멋진 용모에 마음이 쏠린 그는 당장 그를 제자로 삼아 환벽정에서 가르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외손녀와 결혼까지 시켰다. 그 소년이 바로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1인자 정철이다.

 늦은 오후에 본 식영정 마루. 정자 바로 아래서부터 시작되는 광주호의 물안개가 식영정의 기둥을  에워싸고 있다.
 늦은 오후에 본 식영정 마루. 정자 바로 아래서부터 시작되는 광주호의 물안개가 식영정의 기둥을 에워싸고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가사는 시조와 수필의 중간쯤 되는 글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가사문학관의 내부 벽에 걸린 게시물도 그런 인식을 말해준다. '시조와 더불어 한국 고시가의 대표적 갈래'인 가사(歌辭)는 '유장(悠長)한 운문체 노래로서 노래, 읊조림, 음독의 형태로 향유되었다.' 가사는 노래로 부를 때도 있고, 중얼중얼 읊을 때도 있고, 소리내어 읽을 때도 있는 특이한 '문학'이었다는 뜻이다. 가사가 꼭 노랫말로 창작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사는 노래로 부르기에 편하도록 4음보가 연속되지만, 그러나 한 편의 길이가 너무 길다. 만약 누군가가 가사를 노래로 부른다면 흡사 판소리처럼 될 터이다. 조선 시대에도 함부로 판소리를 완창하겠노라고 나설 사람은 거의 없었을 터, 판소리 대본 못지않게 장문인 가사(歌辭)를 무조건 노래가사(歌詞)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랫말일 때도 문학일 때도 있었던 '가사'

그 결과 가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수필에 견주면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데에 불편하고, 1926년 일본에서 취입된 <사의 찬미> 이후 레코드판의 보급과 더불어 급속하게 대중화된 유행가에 견주면 음악성이 떨어지는 갈래였기 때문이다. 근대화 시기에 창가 형태로 일부 잔존하기는 하지만 끝내 '위기'를 극복해내지 못한다. 학교의 문학 시간이나 국어 독본 시간을 제외하고 일상의 여가 때에 가사를 읽기의 대상으로 삼는 현대인이 있다면 한 번 나서 보시라.

실정은 비록 그러했지만,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처음 창작된 이래 5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눈부신 표현들로 가득하다. 식영정과 환벽정을 찾는 길이 있으면 그 마루에 걸터앉아 '정철처럼' 가사 한 자락을 소리내어 중얼중얼 읊조려 보자. 능력이 되는 분은 노래로 불러도 보고, 아니면 책을 읽듯이 음독도 해보자. 그러고 있으면 정철 선생께서 흐뭇해하시지 않겠는가.

 정철의 묘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정송강사> 입구의 신도비에서 왼쪽으로 꺾어들어 얕은 산비탈을 잠깐 걸으면 나타난다. 사진은 산소 뒤 높은 지대에서 진천읍 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정철의 묘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정송강사> 입구의 신도비에서 왼쪽으로 꺾어들어 얕은 산비탈을 잠깐 걸으면 나타난다. 사진은 산소 뒤 높은 지대에서 진천읍 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져근덧 생각마라 이 시름 잊자 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골수에 사무치니
편작이 열이 오나 이 병을 어찌 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싀어디여 범나비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안니다가
향 묻은 날애로 임의 옷에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줄 모르셔도 내 임 조츠러 하노라
- <사미인곡>의 끝 부분

져근덧 역진하여 풋잠을 잠간드니

정성이 지극하야 꿈에 임을 보니
옥 같은 얼굴이 반이나마 늘거세라
마음에 먹은 말씀 슬카장 살쟈하니
눈물이 바라나니 말인들 어이 하며
정을 못다 하여 목이 조차매여
오뎐된 계성(鷄聲)에 잠은 어찌 깨돗던고
어와 허사로다 이 임이 어데간고.

결에 일어안자 창을 열고 바라보니
여엿븐 그림재 나조츨 뿐이로다.
차라리 싀어지여 낙월(落月)이나 되야 이셔
임 계신 창안에 번듯이 비최리라
각시님 달이야카니와 구즌비나 되쇼서 - <속미인곡>의 끝 부분



#정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