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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부마사태.' 지난 9일 오후 부산고등법원 창원재판소 제2민사부 법정. 부마민주항쟁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선고를 하던 조한창 재판장이 한 말이다. 조 재판장은 맨 먼저 '3·15'와 '부마사태'라고 연이어 했다가 '부마항쟁'이라고 말했다. 혼란스럽게 지칭했던 것이다.

이명박(MB) 대통령도 후보시절 '부마사태'라 했다가 비난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2007년 8월 6일 마산을 찾았던 이 대통령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기원제'에서 축사를 하면서 "부마사태를 일으킨 사람들이 누구냐"거나 "부마사태로 어떤 정권이 무너졌느냐"며 '부마사태'라는 단어를 너댓 차례 썼다.

당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이명박 후보의 역사의식은 아노미 상태"라며 "'부마사태'로 표현한 것은 마산·부산 민주시민을 난동으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폭도'로 간주한 것"이라며 비난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부마민주항쟁'을 '사태'라고 했던 것은 과거 군사독재시절에 썼던 말이다. 문민정부 이후 역사바로세우기를 하면서 '부마사태'가 아닌 '부마민주항쟁'으로 바로 잡아졌다.

 부마민주항쟁 피해자인 정성기 경남대 교수와 최갑순 경남여성회 부설 여성인권상담소 소장이 9일 오후 부산고등법원 창원재판소에서 국가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판결을 받은 뒤 걸어 나오면서, 소송대리인 박미혜 변호사(왼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피해자인 정성기 경남대 교수와 최갑순 경남여성회 부설 여성인권상담소 소장이 9일 오후 부산고등법원 창원재판소에서 국가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판결을 받은 뒤 걸어 나오면서, 소송대리인 박미혜 변호사(왼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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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도 다르다.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3·15의거'는 1960년 3월 마산에서 일어났고,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20일 부산·마산에서 일어났다. 20여년 가까이 차이가 있고, 성격이 다른데 재판장은 '3·15'와 '부마항쟁'을 혼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한창 재판장이 맡았던 소송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정성기 회장(경남대 교수)와 최갑순 부회장(경남여성회 부설 여성인권상담소장), 옥아무개(중학교 교사)씨가 국가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이었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국가가 정 회장한테 2000만 원, 최 부회장과 옥씨한테 각각 3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다. 1심에서 최 부회장과 옥씨는 2000만 원을 선고받았는데, 1000만 원이 더 늘었고, 정 회장은 1심과 같은 금액이다. 항소심에서 최 부회장과 옥씨는 1억 원, 정 회장은 5000만 원을 요구했다.

부마항쟁 피해자들은 판결에 반발했다. 최갑순 부회장은 기자를 만나 "3·15와 부마항쟁도 구분 못하고, 더군다나 '부마사태'라고까지 한 판사한테 무엇을 기대하겠느냐"고 했다. 정성기 회장은 "기본 역사의식이 의심스러웠다. 민주사회의 판사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가 났다"고 말했다.

항소심 판결 내용은? 피해자 고통은 계속

부마항쟁 피해자들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경남대 3학년 재학 중 '유신철폐시위'에 가담했던 최갑순 부회장은 경찰·군인들로부터 온갖 성추행·성고문에다 가혹행위까지 당했다. 옥아무개씨도 같은 경남대 3학년생으로 있다가 붙잡혀 성고문 등을 당했고, 정성기 회장도 온갖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들은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해제로 석방되었는데, 53일간 불법구금돼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재판을 받으면서 수치스러운 성추행·성고문, 가혹행위의 고통을 들추어냈다. 이는 1심에 이어 2심도 마찬가지였다.

16일 이들이 변호사를 통해 받은 항소심 판결문에도 피해사실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최갑순 부회장은 "조사과정에서 당한 폭행·협박 등으로 불면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려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다"고, 옥아무개씨는 "항상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피해망상증에 시달려 외출을 하지 못하는 등 후유증을 겪었다"고, 정성기 회장은 "협심증·우울증 증세를 앓았고 정신분열증 치료를 받았다"고 해놓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부마항쟁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국가 소속 수사관들은 체포·구속함에 있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불법구금하고, 조사과정에서 구타·물고문·성희롱 등 극심한 가혹행위를 자행했다"며 "수사관들의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이고, 국가배상법에 따라 불법행위로 인하여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소멸시효(3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비상계엄 중에 경찰이나 계엄군이 저지른 위법행위는 객관적으로 외부에서 거의 알기 어려워 원고(피해자)들로서는 국가에 의하여 진상이 규명되기 전에는 국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것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다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결정이 있었던 2010년 5월 25일부터 시효가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진실화해위는 "진압·수사과정에서 불법구금, 구타, 성희롱, 협박, 회유 등이 있었다"며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인권침해에 대해 관련 피해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던 것이다.

정성기 회장은 "진실화해위가 조사할 때 많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하지 못했다. 진실화해위 조사에서는 일부 피해자들만 언급돼 있다. 그 조사 결과에 따라 소송을 냈던 것"이라며 "진실화해위 조사서에 나와 있지 않는 피해자들이 더 많을 수 있는데, 앞으로 진실규명을 통할 경우 피해자가 더 늘어나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심 때 부마항쟁 피해자들은 위자료 3000만원을 요구했고 2심에서는 더 높은 위자료를 요구했다. 1심 재판부가 피해자들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항소할 수 없었을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정성기 회장과 최갑순 부회장, 옥아무개씨에 대해 각각 2000만 원씩만 인정했다.

정성기 회장은 "처음에는 소멸시효 등으로 소송이 되겠느냐는 의문이 있어 일단 해보자는 것이었고, 소송비용 등 경제적 부담도 있었다"며 "우리는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다. 국가의 잘못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2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한다. 대법원이 부마항쟁 피해자들의 30년 넘은 고통을 어떻게 어루만질지 관심을 끈다.

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창립총회 16일 열어

30년 만에 부마항쟁 피해자들이 모인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부마민주항쟁경남동지회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16일 저녁 마산 '불로식당'에서 창립총회를 갖는다.

이들은 "10·18 부마항쟁 동지들이여, 다시 모여라. 전진하자. 우리 이제 새로 시작이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들은 "학생이라도, 노동자라도, 상인들이라도 좋았다. 우리는 정의로운 민주시민이었다"고 덧붙였다.

최갑순 부회장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10월유신을 끝장낸 10·18부마항쟁에 참가해 우리나라 민주화를 실현시킨 주역들을 찾는다"며 "당시 항쟁에 참여한 모든 민주시민들은 연락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 부회장은 "최근 정체불명의 단체가 '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했다"며 "마산에서만큼은 이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정통성을 갖춘 동지회를 만들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부마민주항쟁 부산동지회 노승일 회장과 이일호 부회장 등 회원 6명이 지난 10월 17일 새누리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후보의 국민대통합의 길을 지지한다"고 밝혔던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 이틀 뒤인 18일 경남 마산에서 일어난 '유신철폐 시위'를 말한다. 18일 부산에 '계엄령', 20일 마산에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군부대가 투입되었다. 부마항쟁 당시 3명(비공식 집계)이 사망하고, 1563명이 연행됐으며, 87명이 군법회의에 넘겨졌는데 2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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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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