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다카키 마사오!
치욕스런 유신독재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생중계되는 공중파에서 이 이름이 그토록 또렷하게 발음되는 순간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12월 4일, 첫 대선후보 TV토론회는 성역과 금기를 마음껏 넘나든 1% 지지율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의 압승이었다. 토론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날카로운 각을 세울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상상 그 이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매섭게 몰아쳤다.
"외교의 기본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일입니다. 충성혈서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아실 겁니다. 한국이름 박정희. 해방되자 군사쿠데타로 집권하고는 사대매국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입니다. 좌경용공으로부터 나라 지킨다면서 유신독재, 철권 휘둘렀습니다. 뿌리는 속일 수 없습니다. 친일과 독재의 후예인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이 1년 전 한미FTA 날치기해서 경제주권 팔아넘겼습니다. 대대로 나라주권 팔아먹는 이들이야말로 애국가 부를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날치기 한 다음에 애국가 부르면 용서됩니까?"거침이 없었다. 지지율 1%도 안 되는 후보가 지지율 과반에 육박하는 유력 후보를 몰아치는 모습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박근혜 후보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면상에서 당해보지 않았을 공격을, 두 시간 가량 꼼짝없이 감내해야 했다.
지난 통합진보당 사태로 인해 '진보의 아이콘'에서 '국민마녀(?)'로 전락한 이정희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던 것은 통합진보당 당원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선출마선언 이후에도 대부분의 언론이 외면했던 대통령 후보 이정희는 단 한차례의 토론만으로 무시 못 할 존재감을 과시했다.
토론회가 진행되는 내내 이정희 후보가 거론한 한마디 한마디가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의 상위권에 줄줄이 오르고, SNS에서는 '후련', '통쾌'의 단어가 넘실댔다. 물론 반대편에선 그만큼의 분노가 따라 춤췄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공공의 적으로까지 등극했던 이정희 후보에게 왜 사람들은 열광했을까?
이정희의 특별한 발언... 세가지 돋보였다 우선, 어느 때보다 쟁점 없이 밋밋했던 이제까지의 대선 과정을 들 수 있다.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후보단일화에 집중했지만, 속 시원히 대립각을 세워오지 못했다. 오히려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공통공약이 많다"며 "이번 국회에서 공동으로 실천하기 위한 '여야정책협의회'를 만들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이것은 대통령후보다운 통합적 리더십일 수는 있지만, 반새누리당 후보단일화를 요구했던 대중에게는 밋밋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이정희 후보가 정확히 찔렀다. "어차피 사퇴할 것, 왜 나왔냐"는 박근혜 후보의 질문에 "당신 떨어뜨리려 나왔다"고 답변하는 저돌성과 명쾌함은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싸가지 없는 대답이었을지 몰라도, 강렬한 메시지였음은 분명하다.
둘째로는 이정희 후보의 공격이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성역을 건드렸으나, 그것이 매우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후보가 전두환으로부터 수수한 6억, 정수장학회와 영남대 문제, 박정희의 친일 경력 등을 비롯해 NLL, 삼성장학생 등의 이야기가 거침없이 등장했다. 이런 문제는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공개적으로 제기한 것 자체가 파격으로 여겨질 정도로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성역과 금기 중 하나였다. 이정희 후보는 뜬구름 잡는 네거티브가 아니라 사실관계에 근거한 직설화법으로 문제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시청자의 환호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이번 대선에서 중요하게 등장하지 못했던 '잃어버린 목소리'들이 이정희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문재인 후보가 싸우지 않는 상생과 통합의 정치를, 박근혜 후보가 준비된 미래와 실패한 과거의 대립이라는 추상적인 언급으로 토론회를 시작한 반면, 이정희 후보는 쌍용차 노동자에 대한 언급으로 말문을 열었다. 또한 손배가압류로 고통 받는 노동자의 이야기나 FTA로 생존위기에 몰린 농민 이야기,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문제를 비롯해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와 골목상권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대선쟁점으로 거론되지 못했던 많은 의제들을 등장시켰다.
무릇 선거는 단지 당선자만을 선택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열망이 투입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야권연대로 인한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이라는 목표만이 대선정국을 압도하면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충분히 대변되지 못했다. 정치란 곧 누군가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날 이정희의 역할은 진보정당의 존재이유를 드러내는 데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다소 과격했을 수는 있으나 지지율 1%의 후보에게서라도 반드시 들렸어야할 목소리들이다.
이정희의 기습, 대선 판도 어떻게 바꿀까?박근혜 후보에 대한 이정희 후보의 맹공에 대해 벌써부터 분석이 복잡해지고 있다. 혹자는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올 것이므로 야권에 불리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 한편, '지나치게' 점잖은 문재인 후보의 존재감 상실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또 다른 쪽에서는 '네거티브' 선거 운운하면서 '점잖은' 토론을 주문하기도 한다. 1% 지지율의 후보가 만들어 낸 논란치고는 참으로 큰 파장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에만 골몰하기에는 때가 이르다. 무엇보다 이번 토론회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대선이 더 많은 국민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번 토론회를 시청한 이후 다음 토론회가 기다려진다는 국민들이 많다. '이정희 효과'다. 긍정적 반응이든 부정적 반응이든 대선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투표시간을 연장하는 것 이상의 성과다. 강력한 지지율의 두 후보가 드러내지 못하는 말들이 등장하고 의제가 확장되면서 대선 정국은 점점 흥미진진해 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머리 싸매고 고심해야할 것은 복잡한 정치공학이 아니다. 그런 계산은 좀 미루어 두어도 괜찮을 듯싶다. 그것보다 각 대선 후보가 고심해야할 것은 자신이 누구를 대변하는가, 그들을 위해서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를 분명히 하는 점이다.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가 참석하는 TV토론은 아직 두 번 더 남아있다. 게다가 여전히 관심과 주목을 끌지 못하는 군소후보들의 토론회도 5일 예정되어 있다. 관심가지고 들여다볼 일이다. 우리가 혹시 놓친 이야기들이 없는지, 각 후보들이 더 담아들어야 할 주장들은 없는지.
대선이 이렇게 진행된다면 그 결과가 나쁠 리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