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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무, 고추, 밥, 한우가 못살겠다고 이렇게 몰려 나왔습니다. 식량을 해외에 맡기자는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하시겠습니까? 식량 자급률을 50%까지 달성하겠다는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하시겠습니까?"

예년보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 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나온 지난 2일. 경기도 포천, 연천 일대 장터에서 방송 차량의 스피커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호 2번 문재인', 노란 현수막을 달고 전국을 누비는 '정권교체를 위한 희망먹거리 장터유세단'이다. 여주의 김원주 화백이 재능 기부로 그린 배추, 무, 고추, 밥, 한우 등 귀여운 피켓들이 눈에 띈다. 배추 피켓에는 '계약 재배로 국민에겐 가격 안정, 농민에겐 소득보장', 무 피켓에는 '공공급식 전면 확대', 밥 피켓에는 '식량자급률 50% 달성'이라고 쓰여 있다.

 11월말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세중인 '희망먹거리' 장터유세단.
11월말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세중인 '희망먹거리' 장터유세단. ⓒ 국민과함께하는농민운동네트워크

다음 인터넷 카페 '국민과함께하는농민운동네트워크(이하 농민운동넷)'가 대통령 선거일인 19일까지 전국의 장터를 돌며 현장의 농민들을 만나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일이다. 최재관 농민운동넷 대표, 농업 전문 인터넷 신문 식량닷컴의 김규태 대표, 김현곤 농민운동넷 운영위원 등이 의기투합해 길 위로 나섰다. 농민운동넷은 문재인 후보 지지와 함께, 사퇴 전에 안철수 후보가 제안했던 새정치와 정권교체를 위한 '국민연대'를 각 시군 단위에 만들자고 호소하고 있다. 몰락 위기에 놓인 우리 농업 문제를 해결할 가장 중요한 현안은 정권 교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강화, 김포, 화성, 여주, 화천, 철원, 강경, 공주……. 얼핏 보면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유랑 극단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매일 갈 곳은 정해져 있다. 그날 장이 열리는 곳이 바로 그날의 행선지다. 농민운동가들이 이처럼 길거리 유랑에 나서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지난 11월 28일 서울 영등포에서 농민운동넷 최재관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장에서 장으로, '정권교체를 위한 희망먹거리 장터유세단'

"재미있어요. 시골 노인분들은 대부분 박근혜 후보를 좋아하지만 우리 먹거리 얘기를 하면 많이 관심을 보이시죠. 건강한 먹을거리야말로 국민 모두의 공통 관심사니까요. 좋은 먹을거리를 만들면 진보만 먹는 것이 아니니까, 사실 식량 주권에는 여야가 따로 없지요. 현장의 농민활동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소중한 시간이고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나마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장날을 택해 돌아다니는데, 장날인데도 사람이 없는 장터가 많다는 거예요. 요즘 시골장의 상황이 이렇구나 싶고, 좀 안타깝더군요."

최재관 대표는 대학 졸업 후 경기도 여주에 내려가서 농민 운동에만 매진해온 명실상부한 농민운동가다. 2006년과 2007년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활동하다가 2008년에 여주로 내려가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었다. 데모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 농민들이 생활 속에서 진짜 필요한 것을 주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 운동이 시위, 데모만 하니까 동력이 계속 떨어지더군요. 농민들은 농민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고요. 농민들이 진짜 필요한 것, 그들의 생활을 함께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농민 농약사'라는 간판을 걸고 작은 농약 유통 가게를 시작했죠. 영농조합에서 운영하고, 농민들이 사랑방처럼 들를 수 있도록요."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농민들은 농약을 사러도 왔지만 지나가다 차 한잔을 하러 들르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러 오기도 했다. 가게는 곧 농민들이 의견을 나누고 소통하는 장이 되었다. 일 년 뒤에는 농산물 판로를 열어주기 위해 학교급식센터도 만들었다. 친환경 농산물을 학교 급식에 직접 공급하는 유통망인 셈이다. 최 대표는 유통사업소장을 맡았다. 여주군 학교급식센터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친환경 급식의 모범사례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정책 만들어 각 대선 캠프에 전달하는 작업에 주력

"지난 20년간 농민 운동의 역사는 수입개방에 맞선 투쟁의 연속이었어요. 92년에 쌀개방 반대, 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반대, 95년 WTO 반대, 2003년 한-칠레FTA 반대. 2006년 한미FTA 반대……. 그 때는 명확한 '적(?)'에 대해 반대를 하는 거니까 많은 내용이 필요하지 않았지요. 전투력, 조직력, 절대적 규율도 필요했고요.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결국 아무것도 막지 못하고 문은 다 열려버렸어요. 이제 그 조건에서 뭔가 해법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 된 거지요. 과거의 전투부대 모드를 빨리 탈피하고 건설 모드로 전환해야 하고, 그러려면 각 분야의 다양한 창조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지난 8월 25일, 인터넷 카페로 시작한 '국민과함께하는농민운동네트워크'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카페를 만든 것은 정말 큰 결심이었다'고 최 대표는 말했다.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농민운동을 하면서 답답함과 회의를 많이 느꼈어요. 현장의 대중 조직이 통합진보당 하나에만 매달리고, 통합진보당이 민주당과 협상하는 간접적인 구조로 왔지요. 그러는 사이 어느새 대선이 다가왔고, 이제 이런 그림이 무너져버렸어요. 농민 운동이 그동안 정치 투쟁이라는 너무 좁은 길로 온 거예요. 농업에는 지역 먹거리 운동, 로컬푸드, 귀농귀촌, 협동조합 등 정말 다양한 영역이 있는데."

그래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전농 현장 활동가, 학자, 교수, 친환경 농업인, 기자, 연구소 직원,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어떤 조직의 틀에 갇히지 않고 더 넓게 사고하고 스스로 정책을 만들어내는 농민운동. 그래서 이름이 '국민과 함께 하는 농민운동 네트워크'다. 마침 때가 때이니만큼 이렇게 만들어진 정책을 각 대선 캠프에 전달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정식 회원 수는 200명 남짓이지만 새 소식이 올라오면 하루 만에 조회 수가 200건을 훌쩍 넘곤 한다. 대선후보 초청 토론 등 관심이 집중되는 주제는 8900건까지 올라갈 때도 있다. 그만큼 이곳을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는 얘기다.

"제가 이래봬도 농민 운동을 꽤 오래 해왔어요. 그중에 농민운동넷을 만든 것은 역사적인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민 운동은 더 새롭고 풍부해져야 해요. 전농은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하지요. 이러니 뭐 하나 결정하는 데도 너무 오래 걸리죠. 전체 활동가들이 토론하는 것은 일 년에 한 번밖에 안 되고요. 농민들은 너무 나이가 많이 들고. 돈도, 정치적 영향력도, 하다못해 몽둥이를 들 힘도 없는데, 농업 문제는 점점 심각해져만 왔죠."

그것은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심화된 최근 수십 년, 정치권력의 변함없는 논리였다. 우리 공산품의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국내 농산물 시장을 외국에 내준다는 것. 식량은 더 싼 외국의 것을 사다 먹으면 되니까. 철저히 경제성만을 따지는 사고방식, 다시 말해 '돈'의 논리다. 그러는 사이 국내에서 농업이라는 것은 점점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줄어드는 식량자급률이 이를 분명히 말해준다.

"어느 순간부터 그저 농업 문제라고 해서는 답이 안 나오더군요.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요. 농민이 보면 농업이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먹을거리 문제지요. 그럼 이건 농민만의 문제가 아닌데, 이것을 어떻게 국민들이 자각하게 할 것인가. 그때부터 농업문제라고 하지 말고 먹거리 문제라고 하기로 했어요. 그래야 국민들이 자기들의 문제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래서 카페를 만들고 글을 쓰고 인식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죠."

 지난 10월 18일 농민운동넷이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최재관 대표.
지난 10월 18일 농민운동넷이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최재관 대표. ⓒ 국민과함께하는농민운동네트워크

지금까지 농민운동은 농민들만의 싸움인 것처럼 치부되어 왔다. 정부도 국회도, 심지어 농림부 장관도 농민이나 농촌은 '소외되고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 쯤으로 인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국내 농업을 자동차나 핸드폰 수출과 맞바꾸어 내주고, 대신 불쌍한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좀 주면 되는 것으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자기들도 매일 눈뜨면 세끼 밥을 입에 떠 넣으면서. 물 건너온 농약 범벅의 값싼 수입 농산물이 아니라, 자기들도 기왕이면 우리 땅에서 난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으면서.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문제. 발상의 전환이다. 이 '발상의 전환'이 성공을 거둔 경험을 최 대표는 이미 해본 적이 있다.

"대선을 앞둔 2002년 겨울에 제가 30만 농민대회를 기획, 제안해서 성공을 거둔 적이 있어요. 그때 여주군 농민회 정책실장 일을 하고 있었지요. 30만이라고 하니까 다들 놀랐어요. 어떻게 30만을 모으나, 모두가 안 된다고 했지요. 당시 농민대회를 하면 최대 인원이 3만 정도였거든요. 하지만 대선 후보에게 쌀 개방 반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이만큼은 모여야 한다, 보는 시각을 바꾸자고 사람들을 설득했어요. 시골에서는 겨울이 되면 동네마다 다 놀러가지 않느냐, 그러니 놀러가듯 하자고 제안했지요. 그래서 관광차 4000대를 조직했고, 그 해 여의도에 13만 명이 모였어요."

대선 주자들도 초청했다. 농민 30만이 모일 테니 거기 와서 당신들의 농업 공약을 얘기하라고 했다. 이회창 후보는 농민들의 초청을 '쌩깠고', 노무현 후보는 참석했다. 그날 노무현은 30만 농민들 앞에서 쌀 개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어느 농민이 던진 계란을 맞았다. 그가 계란을 뒤집어쓴 모습이 언론에 크게 실렸다. 하지만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노무현이었다. 농민들 사이에선 이회창이 농민 표 30만을 우습게 봤다는 뒷담화가 나돌았다.

농업 문제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먹을거리' 문제

"식량이 곧 주권이라는 것, 농업의 중요성을 모르고 공산품 수출을 위한 거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정권의 무지한 농업 정책 때문에 우리 농업은 몰락의 길을 걸어왔어요. 정권이 바뀌는 대선 시기에 농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지난 경험에서 깊이 느꼈지요. 석 달 전부터 우리는 대선에 반영할 만한 농업 정책들을 만들어 각 후보 캠프 담당자들을 계속 만났어요."

정책을 만드는 데는 민주화 운동 경험이 있는 80년대 학번들이 머리를 맞댔다. 모두가 동의한 가장 시급한 농업 정책 1순위는 바로 식량자급률 올리기.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유난히 낮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그나마 26%대를 유지하고 있던 자급률은 이명박 정부 들어 지난해, 올해 2년 동안 22.6%로 더 떨어졌다. 지난해에는 아예 농사를 해외에서 지어서 식량을 국내로 들여오자는 해외농업개발협력지원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해외의 값싼 땅과 인력을 활용해 우리 기업이 현지 생산해서 가져오자는 것인데요.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의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재벌의 해외 곡물 투기를 지원하는 것일 뿐이죠. 매년 300억의 국고를 지원하고 법인세 등 세금을 면제해주겠대요. 기업이 나가서 농사지으면 그들이 돈은 벌겠지요. 세계 곡물가격이 올라가는 추세니까요. 하지만 정작 식량 위기가 닥치면 수출이 중단돼요. 아예 국내에 들여올 수 없는 거지요. 2008년에도 스물 몇 개 나라가 그렇게 수출 중단을 한 적이 있어요."

이명박 정부는 우리나라 기업이 해외에서 농사를 지어 가져오면 국산 식량이라 간주하고 이것에 '식량자주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20년까지 이 식량자주율을 65%로 올리겠다는 것이 현 정부의 목표다. 하지만 이것은 국내에서의 농업 생산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제 한반도 땅에서 농업을 포기하느냐 되살리느냐 갈림길에 선 것이다. 농민운동넷은 이 식량자주율이라는 개념에 반대 입장이다.

해외에서 농사 지어 국내로 들여오자? MB 정부의 '식량자주율'

"식량자급률을 적어도 50%까지는 높여놔야 미래가 있다고 각 후보 캠프를 설득했어요. 식량자급률은 그냥 올라가지 않습니다. 가격 보장을 해줘야 하고, 농민이 더 생산할 수 있도록 그만한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죠. 농지를 줄이지 않고 유지하고, 벼를 재배하고 난 들에 밀과 보리를 이모작으로 재배하고, 도시 텃밭도 적극 활성화해야 해요. 도시농업의 성공 사례인 쿠바는 식량의 65%를 도시농업으로 자급합니다. 군인이나 학생이 농번기에 영농에 참여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국토가 좁아서 농사를 못 짓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최 대표는 말했다. 생산을 해도 가격이 안 나오니까 안 짓는 것이다. 가격이 보장되면 밀, 보리 2모작이 충분히 가능하고, 식량자급률 50%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정부의 지원과 성실한 노력이다. 전문가들은 자급률 1% 상승에 드는 비용이 수천 억에서 1조 가까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5년간의 대통령 임기 동안 자급률을 5%만 올려도 일단 성공이다. 이 정책을 문재인 캠프에서 받아들였다.

 10월 18일 농민운동넷이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문재인 후보, 배옥병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대표
10월 18일 농민운동넷이 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문재인 후보, 배옥병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대표 ⓒ 국민과함께하는농민운동네트워크

"제가 보기에 이건 농업 공약 중에서 제일 훌륭한 공약입니다. 50%라는 숫자를 들으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이것이 실제 담고 있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거든요. 우리가 또 대통령 직속으로 식량먹거리보장위원회를 만들라고 주문했는데, 문 캠프에서 위원회도 만들겠다고 했어요. 이제 청와대에 위원회가 생기면 시민단체에서 들어가서 자급률 상승을 위해 일할 과제만 남은 것이죠. 현재 10%인 친환경 농업 비율도 30%까지 올리겠다고 합니다. 파격적인 공약이에요. 국내 농업을 아예 포기하려는 현 정부에 비해, 문재인 후보의 공약과 정책이 농업을 지킬 수 있는 대안이라고 봅니다."

지난 10월 18일 양재동 aT센터에서 개최한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는 농민운동넷의 가장 큰 성과로 꼽힌다. 친환경농업인연합회, 환경농업단체연합회, 국민과 함께하는 농민운동네트워크가 공동 주최한 이 토론회에는 박근혜 후보가 불참한 가운데 안철수 캠프에서 박선숙 선대본부장이, 문재인 캠프에서는 문 후보 본인이 참석했다. '먹거리 위기의 대안을 찾아 대선후보와 현장농민, 시민, 농업계 전문가들이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는 마당'이라는 부제를 붙였고, 배옥병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대표 등 시민 단체 인사들이 초청되어 토론자로 나섰다.

대선후보 앞에서 식량 문제 역설, 잊지 못할 15분

"대선 후보가 바쁜 줄은 알았지만, 그분들의 10분을 얻어내기가 그렇게 어렵더군요. 나중에 조정해서 40분의 시간을 얻어냈죠. 토론회에서는 제가 발제를 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농업 정책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려고 많이 준비했고, 후보를 앉혀놓고 15분간 브리핑을 했지요. 그 자리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깊이 공감했다고 말해주더군요. 그날 말한 내용이 대선 공약에 많이 반영되었어요. 농업이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라는 것, 국민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대선 후보가 인식했다면 그만한 성과가 어디 있겠어요. 내 평생 잊지 못할 15분이 아니었을까. 시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하구나, 하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지요."

토론회에서는 또 배옥병 대표 등이 주축이 되어 '희망먹거리전국네트워크' 발족을 제안했고, 이는 한 달여 뒤인 11월 30일 현실화되었다. 기존의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가 확대 개편된 이 새 조직은 농업 의제를 포괄하면서 먹을거리와 식량 주권을 주장하는 단체로 폭을 넓힌 것이라고 최 대표는 설명했다. 농업 문제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닌 전 국민의 먹을거리 문제라는 인식을 국민적 의제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활동할 예정이다.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식량 위기에 관한 최재관 대표의 기조발제를 듣고 있다.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식량 위기에 관한 최재관 대표의 기조발제를 듣고 있다. ⓒ 국민과함께하는농민운동네트워크

아쉬운 것은 역시 대선 후보들에게 농업 정책으로 제안한 '농협중앙회장 조합원 직선제'를 대선 공약으로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농협 개혁 문제는 우리나라 농업의 오랜 숙원 과제였다. 농민을 위한 '협동조합'이어야 할 농협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대기업화되면서, 농민은 뒷전이고 몸집 불리기에만 주력하고 있다는 비판은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농협으로 돈이 몰리다보니 너도나도 조합장 자리를 탐내게 되었고, 농협 조합장 선거가 뒷돈 거래 등 이권다툼에 연루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농업 개혁의 절반은 농협 개혁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국 240만 농민 조합원들이 농협의 총 수장인 농협중앙회장을 직접 선출하는 것이 그 개혁의 시작이라고 봐요. 전국의 농협 조합장이 1200명인데, 그중에서도 291명의 대의원 조합장만 중앙회장 투표권을 가져요. 간선에 간선이지요. 대통령 선거도 전 국민이 한 표씩 행사하는 이 나라에서 민주성이 한참 떨어지는 제도지요. 오는 2015년 3월 11일에 전국 농협 조합장 동시 선거가 있는데, 이 때 1인 2표 방식으로 중앙회장 선거도 같이 하자는 것이 우리 제안입니다. 농협을 정말 농민의 것으로 되돌려주기 위해서요."

남은 과제는 조합원의 힘으로 이루는 농협 개혁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농협 중앙회장 자리는 우리나라 농업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하다는 뜻. 농민들이 중앙회장을 직접 선출하게 되면 이 권력이 농민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국회의원, 학계, 기타 등등.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국회 농림수산위원회 위원들을 서넛 만났어요. '지금 농민들의 역량을 봤을 때 좋은 사람을 뽑기 어렵다'는 것이 그분들의 얘기였어요. 하지만 농협이 농민을 위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조합원이 표로서 심판하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심판하지요? 농협은 협동조합이고, 협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들이에요.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그들의 역량을 따지고 개혁을 하니 마니 말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지요."

최 대표는 이번에 장터 유세단으로 길을 떠나면서 그동안 전농에서 맡고 있던 간부직을 모두 내려놓았다. 앉은 자리에 안주해 있으면 변화할 수 없다. 2014년 정당공천이 폐지되면 농민이 지방농정의 주인으로 나서야 한다, 2015년 전국 조합장 동시선거에서 농협개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할 참이다. 농민의 생활적인 요구와 다양한 농업의제를 가지고 더 많은 농민들과 함께해야 할 때니까. 기사를 마칠 때쯤 최 대표와 한 번 더 통화를 했다. 전남 함평에 내려가 있다는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따뜻한 남쪽 나라라더니 겨울인데도 정말 여기는 따뜻하네. 오늘 장에서 사람들 많이 만났어. 이명박 대통령은 식량 위기를 해외 농업 개발로 해결하자고 하지만, 우리는 식량자급률 50%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을 뽑자고 연설했지. 농협을 개혁하고 농민이 농협의 주인으로 나서자고 말이야. 나랑 규태형, 현곤이 다 즐겁고 건강해. 내일은 영천으로 이동할거야."


#희망먹거리#국민과함께하는농민운동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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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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