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안철수는 이번 대선 과정을 거쳐 기득권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안철수가 보여준 정치실험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안철수현상'이라는 말을 남기며 그는 정치에 뛰어들기 이전부터 안풍을 일으켰다. 문재인과의 단일화 과정에서 기성정치구조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도중하차, 그 대신 단일화 파트너였던 문재인의 당선을 위한 유세를 벌였는데 그 유세가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 유세는 지금까지 정치인들이 보여준 방식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안철수식 유세를 사람들은 '소리통 유세'라고 부른다. 처음 '소리통 유세'를 시작할 당시에 선거 비용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진면목이 드러났다.

안철수가 유세하기 위해 떳다 하면 보통 작게는 500여 명, 많게는 수천 명이 모였다.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해 사전에 군중을 동원하거나 미리 광고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스마트폰으로 안철수가 어디에 뜬다고 하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일찍이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정치인의 연설을 듣기 위해 그렇게 모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였다.

안철수는 과거의 정치 유세처럼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저 국민들을 만난다.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안철수의 음성이 군중 속에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안철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시민들이 복창하는 방식이 생겨났다.

안철수가 군중 앞에 나타나면 먼저 하트 모양을 그리며 포즈를 취해준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다투어 사진 촬영하기에 바쁘다. 이런 식의 모임을 지속하다가 차츰 진화하여 일산과 명동, 강남 사거리 유세에서 안철수식 소리통 유세가 자리 잡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안철수가 한 마디 한 마디 하면 운집한 사람들이 따라 복창하는 모습은 같다. 그러나 마지막 강남 사거리 유세는 좀 달랐다. 안철수가 미리 메모한 내용 6가지를 소리치면 국민들도 따라 부르게 한 소리통 유세였는데 그 6가지는 그가 정치 참여를 하게 된 그의 생각을 요약한 것 같았다. 그것을 '새 정치 소리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가 앞으로 실현해야 할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새 정치 소리통'은 모두 '상식입니다'를 후렴처럼 달고 있어 '상식의 소리통'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6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민주주의는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게 상식입니다.
2. 기득권이 특권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게 상식입니다.
3. 경제민주화는 우리 경제의 체력을 강화한다는 게 상식입니다.
4. 언론이 정권과 한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상식입니다.
5. 정치는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있다는 게 상식입니다.
6. 상식을 지켜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나는 위의 6가지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광경을 보면서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상식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식을 저버린 사람들이 정권을 대물림하는 나라 안에서 살고,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살게 되니 이게 십자가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암담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민들과 함께 이 '상식의 소리통'을 외치고 난 다음에 더욱 재미있는 정치 놀이가 시작된다. 즉 "새 정치는 — 이다"라는 틀에 맞추어 군중 가운데 아무나 나와서 외치게 하는 방식이다. 이때부터 간단한 무대가 마련된다. 안철수가 서 있는 곳이 바로 무대인데, 그 무대라야 겨우 3-4명 정도 올라설 수 있는 공간이다. 무대랄 것도 없이 그저 안철수가 있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가 중심이다. 그 무대로 나가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한 마디씩 외친다. 그러고 나면 안철수와 포옹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렇게 외치는 국민의 소리 가운데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간절한 것들이 많다. 가감 없이 터져 나오는 국민의 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부인은 "새 정치는 우리 아이의 미래이다"라고 외친다. 어떤 남녀 커플은 "새 정치는 마음 놓고 결혼하는 것이다"라고 외치기도 한다. 어떤 60대 할머니는 "새 정치는 우리가 두 다리 뻗고 사는 것이다"라고 하고, 어떤 벤처 기업 팀장이라고 하는 분은 "새 정치는 이 시대를 바꾸는 것이다"라고 외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마음껏 외치도록 멍석을 깔아놓으니 초등학교 학생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생으로부터 사회 각 층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외침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정치를 멀리 두고 있지 않고 자기 문제로 생각하며 생활 속의 정치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대가 없는 무대, 우리의 전통문화의 방식에 연결한다면 마당놀이나 판소리에 가까운 무대처럼 보인다. 판소리는 무대가 없다. 그냥 멍석 하나 깔아놓은 곳에 소리꾼 하나가 나와 노래하면 거기가 바로 무대가 된다. 종래의 무대는 연기자와 관객을 분리하여 연기자는 높은 무대에서 준비된 내용을 관중을 위해 보여주고, 관중은 그냥 연기자의 연기를 바라보며 각자 감상한다. 무대와 관중석 사이, 연기자와 관중 사에는 뚜렷한 분리가 있다. 그런데 판소리에는 그런 분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철수의 소리통은 판소리의 소리꾼과 유사하다. 안철수는 노래를 부르는 대신 국민과 소통한다. 소리꾼이 노래를 하면서 관중과 소통하는 방식과 같다. 판소리가 노래를 매개로 하여 관중의 엉킨 감정을 풀고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안철수는 국민들의 엉킨 감정을 풀면서 소통한다. 다만 안철수는 더 많은 국민들이 자기 소리로 외치게 하기 위해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공유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국민들 각자가 나와서 자기 목소리로 한껏 외치고 나면 안철수는 "잘했어요, 잘했어" 하는 표정으로 박수를 쳐주고 그를 포옹하고 나란히 기념촬영을 해준다. 운 좋게 그 간이 무대에 선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안철수와 사진을 찍는 행운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는다. 날씨가 추워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밤에도 추위를 잊으며 서로 하나가 되어 함성을 질러댄다.

이와 같은 소리통 행사가 끝나갈 무렵, 끝마무리로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노래가사에 '생일'이라는 단어 대신 '투표'라는 단어를 넣어 "투표합니다"라고 하며 투표할 것을 고무한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안철수 진심캠프에 속한 임원들을 소개하고, 또 사진 촬영한다.

이렇게 공식 행사는 끝나고 난 다음, 안철수는 이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불러주는 것처럼 한사람 한 사람 악수하는 광경은 옆에서 보기에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하늘같이 모신다는 말을 많이 한다.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웅변학원에 다니며 웅변연습도 했다는 사람도 있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장광설을 늘어놓기 일쑤이고, 통합의 정치를 부르짖으나 실제로 하는 짓은 자기 휘하에 여러 정치세력들을 불러 모은다. 즉 자기의 힘을 확대시키기 위해 여러 세력들을 자기 발아래 두는 것이다.

즉 조직폭력배가 여러 어깨들을 자기 휘하에 두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국민들은 은연중 피치자이고,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 봉건적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로는 국민을 섬겨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하는 짓은 정반대로 국민 위에 군림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평소에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다가 선거 때만 되면 허리를 굽히고, 그 선거가 끝나면 일제히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새 정부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다면 안철수가 외친 소리통 6가지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새 정부가 통합의 정치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국민이 바라는 저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안철수#소리통#유세#새정치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9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