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가 안 되네...'
대선,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간 주변에서 '괜찮다'고 '정의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며 위로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눈물이 마르질 않는다. 그간의 경험상 이정도 아팠으면 회복돼야 하는데 이번에는 다르다. 도통 치유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나만 이런 줄 알았다. 혼자만 끙끙 앓다 친구에게 "너는 괜찮냐?"고 물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들 많이 아팠나 보다. "여전히 힘들다"는 짧은 답을 받았다. 그래서 모였다.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우리끼리라도 모여 서로를 위로해 보자고 했다. 단 우리 방식대로 우리의 상처를 보듬기로 했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을 함께 읽기로 한 이유다. 물론 선배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
왜 웹툰 <미생>이냐고? 내게 [미생]을 추천해 준 선배, 많이 아파 본 사람이다. 97학번 서른 일곱. 스무살 이후 재수, IMF, 학자금 대출, 구직난, 이직, 해고, 창업, 파산까지. 옆에서 지켜봐도 어느 것 하나 마음처럼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주 한 잔 나누며 하는 말이 "작가 윤태호 이 양반 대단해, 정말 많이 아팠는데 요즘 <미생> 때문에 좋아지고 있어. 꼭 치유 받는 느낌이야. 읽어봐. 고마울 거야"라며 만화 하나를 추천했다. 그것이 바로 <미생>이다.
윤태호 작가의 작품 <미생>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장그래는 어릴 적부터 바둑에 소질을 보여 프로바둑기사의 꿈을 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다.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도전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지인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인턴 사원의 기회를 얻게 됐고, 새로이 '상사맨'이 되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런데 이 만화 입소문이 예사롭지 않다. 세대를 뛰어 넘어 작품을 접한 많은 이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이미 2012 대한민국 만화 대상도 받았다. <미생>의 작가 윤태호 역시 작품을 통해 이 땅의 취업준비생, 신입사원, 태풍의 한 가운데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 포기하지 말라고 다시 기회가 온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한다. 그래서 함께 읽었다. '대선 패배'를 이유로 지워지지 않는 아픔, 웹툰 <미생>을 통해 치유받기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들의 이야기, 대선때문에 '멘붕'을 겪고 있던 2030세대 5인이 모여 자유롭게 진행했다. 아래 내용은 <미생>을 통해 느낀 솔직한 생각들을 '대화'로 정리한 것이다. 본격적인 말을 나누자 서로에게 느껴진다.
'우리 정말로 많이 아팠구나. 그리고 지금도 많이 아프구나.' 2012년 대선, 마치 '미생'같다김종훈(30·이하 종훈) : "다들 괜찮은지? 나는 이상하게 계속 아프다. 실제로 선거 후 몸살이 나기도 했지만 치유가 잘 안 된다. 어떻게들 극복하고 있나?"
박수민(25·이하 수민) : "아쉬워 미치겠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아직도 패배가 믿기지를 않는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박근혜를 찍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심지어 충청도에 계시는 부모님조차 박근혜를 찍지 않았다. 그런데 졌다."
임규희(24·이하 규희) : "동의한다. 하지만 '20대 66%, 50대 90%'의 투표율은 현실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이 마치 '미생' 같다. 아직 완전하지 못해 제대로 살아있지 못한 모습."
최의정(31·이하 의정) : "'니가 뭔데?' <미생>의 도입부에 나오는 이 한마디가 우리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다. 바꾸려 했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니가 뭔데'라 말하고 있다. 이번 대선, 부족함을 느꼈다."
박다린(24·이하 다린) : "진심에서 승부가 갈렸다고 본다. 간절했지만 한 쪽의 진심이 완전히 전달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미생>을 봤다면 그 방법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종훈 :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웹툰 [미생]에서 발견한 '힐링법'은 무엇이었나?"
수민 : "힐링 이전에 제대로 된 진단이 우선 돼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투표독려'였다. 물론 옳은 말이다. 다만 투표율을 높여야 한다는 과정이 마치 '선과 악'의 대결처럼 포장됐다. 투표가 곧 진보의 '정의'이자 '승리'처럼 표현됐다. 과연 이를 바라보는 '보수'의 심정은 어땠을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의정 : "공감한다. 이번에 크게 느낀 부분이 진보가 무조건 옳다는 전제 하에 보수를 가르치려 했다는 점이다. 보수의 선택에 대한 배려 없이 '너흰 틀렸다'고 너무 성급하게 몰아 세웠다."
규희 : "나 역시 한 가지 깨달은 부분이 있다. <미생>에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즉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라는 의미다. 이해심이 부족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본디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풀어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다린 : "그래서 힐링의 출발점은 여기서부터 아닌가 싶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는 <미생>의 말에 공감한다."
종훈 : "다시 <미생>으로 돌아오자. 작품은 어머니가 '고봉밥'을 눌러 담은 것처럼 많은 부분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장면이 인상적이었나?"
의정 : "<미생> 22화에서, 유치원에 돌아온 아이의 가방 속에 그림 하나가 있다. 가족이었는데 아빠는 소파위에 가로누워 뒤통수만 보인다. 엄마는 아예 얼굴이 없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부부가 아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정작 아이와는 멀어진다. 가족이 함께 있을 시간 자체가 없다."
수민 : "내 어릴 적 경험이 그대로다. 두 분 부모님이 바쁘셔서 유치원 '종일반'에 있었다. 그 때 오지 않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여러 사람 눈치 보며 자랐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10년이 지났는데도 지금 아이들의 환경,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규희 :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1~2세 정도의 유아기 때 부모 중 한 명은 의무적으로 유급휴가를 줘야 한다고 본다. 사회의 책임이 필요한 부분이다. 최소 1년은 보장해야 한다고 본다."
다린 : "그래서 더욱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이 생각난다. 현실적으로 최소한 대기업부터 사내 육아방을 만들어 아이들과 부모의 접촉 빈도를 높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일까 싶다. 의지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부모가 일을 해도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의정 : "다만 여기서 생각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육아방을 만들어도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차별하는 구조. 아마 우리나라, 없어도 만들 것이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말했던 보편적 복지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자신감 부족이다'종훈 : "<미생> 24화에서 재밌는 장면이 나온다. 인턴 면접에서 몇몇 참가 팀이 꼼수를 부린다. 면접관들이 요구하는 부분이 분명한데도 자꾸 꼼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규희 - "자신감 부족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대로 보였다. 양쪽 모두 자신이 없으니까 미래를 보여줘야 하는데 서로의 뒤꽁무니만 쫓았다."
의정 - "특히 안철수 사퇴 이후, 문재인이 안철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신선함과 비전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안했다. 아니 냉철하게 말하면 못했다. 아마 민주당이 능력이 없었거나 자신감이 부족해서였을 거다."
다린 - "중요한 것은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다. 면접장이든 대선이든 나름의 현장 분위기가 있다. 여기서 제대로 선택을 해야 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는 안 된다. 그런데 민주당은 환호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만족했다. 그 반대 진영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다."
종훈 : "<미생> 87화에서 오차장이 말한다. '죄를 처벌했고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야 마땅한가?' 이 부분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의정 : "호남과 광주, 이번에도 90% 이상의 몰표가 나왔다. 그런데 나는 이해가 간다.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건 절대 욕먹을 짓이 아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광주의 역사가 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이것이 광주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두의 역사다. 일부에서는 '분열'이라고 말하지만 잊지말자는 '항변'에 가깝다."
수민 : "그래서 박근혜의 5년이 더 걱정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고 싶은 과거만 부각하며 정권을 이어나갈 것이 눈에 선하다. 물론 반대하면 그때마다 51%의 '동의'를 강조할 것이다. 앞으로 5년이 걱정되는 이유다."
규희 : "하지만 분열이라는 것, 우리가 너무 영남과 호남, 5060 세대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 싶다. 서로간에 애써 민감한 역사를 피했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이런 말도 들었다. 한국에서 친해지려면 '정치, 종교, 섹스'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다린 : "맞는 말이다. 유신과 광주, 둘 다 5060세대가 직접 겪은 역사인데, 2030이 너무 텍스트에 나온 이야기만 강조한 것은 아닌가 싶다. 함께 치유하려는 노력이 전무 했다. 어쩌면 그런 시도조차 못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우리만의 문제로 생각한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치유'종훈 : "개인적으로 <미생>에서 가장 공감가고 슬펐던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 장그래를 포함 입사한 신입 사원들이 선배들에게 '검은 넥타이'를 선물로 받았다. 이유가 있다. 시청역 2번 출구 덕수궁 대한문 앞, 그곳에 쌍용차 분양소가 있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 어렵게 취업했지만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쌍용차'가 과연 전적으로 남의 이야기일까. 우리들의 삶이 되진 않을까. 앞으로의 5년. 과연 얼마나 변화할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패배가 치유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의정 : "그래서 더욱 포기해선 안 된다. 포기하는 순간, 또 진다. 여전히 유성기업을 비롯해 한진, 현대, 쌍용. 해결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 이 부분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것이 치유법이다. 피해서는 안 된다."
수민 :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바꾸려 노력해도 잘 안되는 게 있다. 이번 대선이 그러지 않았나 싶다. 세대 간의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진영 내에서 우리만 바꾸려 했지 진영 밖은 바꾸지 못했다. 노력 끝에 우리 세대는 변화를 이끌었지만 진영 밖은 여전히 강고하다는 걸 느꼈다."
규희 : "생각해 보면 이번 대선에서도 진보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욕망'을 이길 수 있다 했지만 결과적으로 졌다. 이제는 진보도 '욕망'에 대해 좀 더 솔직해 져야 할 시간이 아닌가 한다.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인물과 정당. 이것이 출발이다. 새로운 판을 짜고 준비해야 한다. 힐링은 새로운 판에 참여함으로써 자연스레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다"돌아보면 지난 일주일 다들 많이 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패배가 믿기지 않아 눈물이 멈추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모였다. 모두가 '아직 살아있지 못한 미생'이기에, 이렇게라도 모여 서로를 치유하고자 했던 거다. 상처를 드러내고 우리 나름의 해법을 찾기 위해 고민한 것이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다시 출발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이정도로 마치자고 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말자고. 다시 희망으로 5년을 준비하자고. 서로가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자고. 앞으로의 5년을 다같이 준비하자고.'다짐했다.
중요한 건 우리는 지금 '미생'이지만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덧붙이는 글 | 33%의 보수와 66%의 진보, 이 땅의 2030에게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