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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유리 지갑으로 사는 도시의 삶이지만, 이것만은 누리며 살고 싶다는 '나만의 작은 사치'가 다들 한 가지씩은 있는 듯하다. 외제차를 수집하는 재벌이 있는가 하면, 흥미롭게 읽은 책 <시인의 사물들>에 나오는 어느 시인은 째깍재깍 소리 내는 아날로그 시계들로 자기만의 은밀한 사치를 즐긴다 한다.

라면이나 김밥,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울지언정 뮤지컬이나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다는 어떤 친구를 보면 사치란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사치가 있다.

바로 다양한 금속말을 타고 즐기는 느긋한, 때론 짜릿한 출퇴근 시간. 사치에도 종류가 있다면 생활 밀착형 사치라고 할까. 일부러 자전거를 수집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자전거 타는 게 좋아 일상에서 즐기다 보니 어느새 서너 대의 애마가 생겼다.

[봄] 미니멀한 금속말을 타고 여유로운 자출

 작지만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미니벨로 자전거.
작지만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미니벨로 자전거. ⓒ 김종성

수년 전 자전거에 푹 빠진 지인으로부터 작은 바퀴의 미니멀한 디자인을 한 '미니벨로' 자전거를 알게 돼 나도 그처럼 '자출'(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했다. 작은 몸체에 <트랜스포머>처럼 착착 접히고 펴지며 따로 자전거 복장을 갖추지 않아도 부담이 없고, 접이식이라 보관도 쉬웠다. 여러 장점이 많은 폴딩 미니벨로 바이크(접이식 미니 자전거)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내 인터넷 프로필이 '금속말을 타고 다니는 도시의 유목민'이 되기에 이르렀다.

날이 화창한 요즘, 이 작은 금속말과 함께 집과 사무실을 나선다. 일반 자전거에 비해 바퀴가 작아서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길섶에 피어난 색색의 꽃들과 강변 자전거 도로의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달릴 수 있다. 특히 괜히 몸이 찌뿌드하고 기분 꿀꿀한 월요일의 출근길을 기운나게 해준다. 야근이나 약속이 있는 퇴근길에도 유용하다. 접이식 자전거이니 전철을 이용해도 된다.

무엇보다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풍경과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기 좋다. 큰 부리로 막 물고기를 낚아챈 하천변의 왜가리, 귀여운 애완동물을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는 아저씨, 도로변을 달리다가 삐끗해 쓰러진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워주는 착한 학생들···. 자전거 탄 채 멈추어 서서 카메라에 담아낸 찰나의 순간들은 소중하고 귀한 나만의 '자출 다큐멘터리'가 된다. 

[여름] 바람소리를 즐기며 로드 바이크 자출

 차량들의 정체로 꽉막힌 도심속을 바람처럼 달려갈때의 통쾌함이란.
차량들의 정체로 꽉막힌 도심속을 바람처럼 달려갈때의 통쾌함이란. ⓒ 김종성

얼마 전 금속말 식구에 '로드 바이크(혹은 사이클)'가 추가되었다. 이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리면 귀에 꽂은 이어폰의 음악이 무용할 정도로 바람소리가 록 음악처럼 미친 듯이 뺨과 귀를 두드린다. 인간이 만들어낸 탈 것 가운데 가장 에너지 효율이 좋은 것이 자전거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제일 효율이 뛰어난 것, 다시 말해 가장 빨리, 멀리 달릴 수 있는 자전거가 바로 '로드 바이크(Road Bike)'다.

허리를 둥글게 말아 앞으로 숙인 멋진 자세로 꽉 막힌 도심 차량들 사이를 바람처럼 가볍게 스쳐 지나갈 때의 통쾌함이란. 상습 정체로 악명 높은 뉴욕의 도심 속을 거침없이 헤집고 달려가는 자전거 메신저(자전거 택배)들의 이야기를 담은 재미있고 스릴 넘치는 영화 <퀵실버(1986)> <프리미엄 러쉬(2012)>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특히 금요일엔 꼭 로드 바이크를 타고 집을 나선다. 퇴근 후 바로 귀가하지 않고 무념무상의 페달질로 강변 자전거도로 위를 달리기 위해서다. 심장을 불태워 버릴 듯이 달리는 자전거 '불금(불타는 금요일)'이다. 습하고 후끈한 여름날에도 상쾌한 기분이 드는 바람의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엔진이 향상됨(체력이 좋아진다는 자전거 용어)은 물론이고, 일주일간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 자잘한 스트레스들이 모두 사라진다.

[가을] 클래식 자전거를 타고 분위기 있는 자출

 클래식 바이크와 나름 깔맞춤한 옷을 입고 나서는 출퇴근길.
클래식 바이크와 나름 깔맞춤한 옷을 입고 나서는 출퇴근길. ⓒ 김종성

자동차나 오디오처럼 자전거에도 클래식한 제품이 있다. 실용성이나 속도와는 거리가 있지만 왠지 가을에 어울리는 클래식 바이크. 이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설 때는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된다. 이때만은 나도 사토리얼리스트(Satorialist. 자기만의 개성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표현하는 사람들)가 되어 자전거용 복장이나 헬멧을 쓰지 않는다. 클래식 자전거와 어울리는 나름 '깔마춤한 복장'을 하고 나선다.

출퇴근 코스 또한 한강 자전거도로가 아니다. 일부러 복잡한 도심 속으로 보란 듯이 달려간다. 나만의 사치 시간이 최고조에 오르는 순간이다. '때르릉 때르릉~' 소리만으로도 옛 추억이 떠오르는 투박한 벨을 종종 일없이 누르기도 하며 허리를 곧추 세우고 달리다 보면 흡사 근대 시절로 돌아가 '모던 보이'가 된 기분이 든다.

[겨울] 눈 내린 슬로시티를 훈훈하게

 추운 겨울날 자출길에 나서게 해주는 눈꽃송이.
추운 겨울날 자출길에 나서게 해주는 눈꽃송이. ⓒ 김종성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날, 도시는 그만 '슬로 시티'로 바뀐다. 자칭 만물의 영장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은 하늘하늘 쌓이는 하얀 눈에 굴복하고 만다.

매서운 추위의 겨울엔 웬만하면 자출을 하지 않는데 예외인 경우가 바로 눈 내리는 겨울날이다. 삭막한 겨울을 환하게 밝혀주는 눈꽃송이 덕분에 길 위의 겨울이 덜 춥게 느껴져서다.

눈소식이 있는 날씨의 자출길엔 꼭 한강변을 달린다. 차도보다 안전하기도 하고 강변 곳곳에 편의점이 있어 짬짬이 쉬며 눈 구경하기 좋아서다. 특히 퇴근길엔 한강다리들 위에 있는 간이역같은 아담한 카페에 꼭 들려야 한다. 하얀 눈이 내린 한강의 겨울 풍경을 감상보며 커피 한 잔을 하다보면 겨울 자출길에 얼었던 몸이 어느 새 스르르 녹아버리고 마음마저 훈훈하게 된다.

 일상에서 부대끼다 날카로워진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자전거 출퇴근.
일상에서 부대끼다 날카로워진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자전거 출퇴근. ⓒ 김종성

'촤르륵 촤르륵' 돌아가는 익숙하고 친밀한 자전거 체인 소리를 들으며 출퇴근하다 보면, 문득 자전거는 내게 일종의 종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티베트 사람들의 오체투지 정도는 아니지만 두 다리로 페달을 돌리는 단순한 운동을 무한 반복하다 보면, 일상에서 부대끼느라 날카로워졌던 마음이 어느새 부드러워진다. 어느 땐 풀리지 않던 사안의 실마리가 풀리기도 한다. 퇴근길에 마주치는, 도시와 강변을 붉게 물들이며 저무는 아름다운 석양도 한 몫 한다.

인간적인 발명품 자전거는 부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치품이기도 하다. 16인치 바퀴의 작은 미니벨로 자전거, 클래식한 분위기 자전거에서 경주마를 연상케 하는 26인치 바퀴의 로드 바이크까지···. 수집 취미도 없는 내가 가장 공들여 장만한 애마들이 집안에서 혹은 대문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서 있는 걸 보면 흐뭇하기도 하고, 소박하게 살고픈 내 삶에 이만한 사치도 없겠구나 싶기도 하다.

이 사치가 자본주의 세상의 흔한 소비나 낭비가 아니라 좀 더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길 바란다. 노동과 삶을 두 바퀴로 이어주며 일상의 친구가 된 애마 자전거, 타면 탈수록 심신의 건강에 좋고 대기오염을 일으키는 차를 안 타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사치다.

덧붙이는 글 | <출퇴근길의 추억> 공모글입니다.



#자전거 출퇴근#미니벨로#로드 바이크 #클래식 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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