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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춰라, 생각하라> 겉표지
 <멈춰라, 생각하라> 겉표지
ⓒ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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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통념은 질기다. 이들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머릿속에 자리잡는다. 우리가 그 폐해를 깨달아 멀리 버리려고 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그 바탕에 깔린 사고와 논리를 뒤집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그 전복(뒤집기)의 과정에 나름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 무작정 뒤집어서는 바보 취급을 받는다. 전복된 사고는 역설적이지만 상식과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서도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 당사자는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나 얼빠진 미치광이로 대접받는다.

여기 하나의 멋진 사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평범한 상식과 통념을 벗어나되, 위에서 말한 사고 뒤집기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정연한 논리를 따라 나온 그 전복된 사고는 우리의 상식과 통념에 부합한다. 요컨대 그것은 이런 것이다.

철수라는 아이가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가 자연을 죽이고 있어요. 이건 참상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도시가 커지지 않도록 해야 해요."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통념이고 상식이다. 여기에 한 생태학자가 철수의 말을 거들고 나선다. "맞아요. 우리는 보다 자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숲 가까이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또한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훌륭한 통념 중 하나다. 그런데 한 철학자가 이들의 통념을 단번에 뒤집는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방식은 생태적으로 완전한 재앙이에요. 반면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생태적으로 오염되고 더러워진 대도시는 사실상 역설적으로 자연에게는 최선입니다. 태양열을 이용한 작은 자가 발전식 집에서 사는 생태적인 삶을 봅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집은 더 많아질 것이고, 그에 반해 원래의 숲은 점점 사라지게 되지 않겠어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논리가 탄탄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통념과 상식에도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태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버리고 대도시에서 살자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그가 비록 오늘날의 생태학적 경향, 즉 '자연으로 돌아가자' 등의 자연주의에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실상 이 사례는 지젝이 '공동선(Common Good)'에 관한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우리가 '최고의 선'으로 이야기하는 고차원적인 공동선이 우리의 어떤 은밀한 목적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위의 사례는 바로 그 과정에서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생태적인 삶'을 공동선으로 말하는 이는 그 생태적인 삶이 주는 특권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지젝에게 공동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언급한 한 철학자는 누구일까. 그는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며 세계적인 철학자 반열에 오른 슬라보예 지젝이다. 위에서 소개한 내용은 대안적인 공부 공동체 인디고 연구소의 젊은이들이 그와 대담한 결과를 묶은 책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소개돼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소개할 책 <멈춰라, 생각하라>는 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매료된 내가 구입한 지젝의 책 두 권 중 하나다.

대안 떠올리는 게 가능해졌느냐

지젝은 이 책에서 전세계적인 격변기였던 2011년과 2012년의 정치 사회적인 사건들을 특유의 전복적인 어법과 선동적인 문체로 파헤친다. 미국 월가 시위가 한창이던 2011년 10월 9일,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지젝이 행한 연설의 일부를 통해 그 일단을 살펴보자.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우리는 여기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축제는 싸구려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상 생활로 돌아간 그 다음날이다. 그때에도 변화가 있을까? 나는 여러분이 오늘을 회상하며, '그래, 우리는 젊었지. 아름다운 날이었어'라고 말하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대안을 생각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것임을 기억하라….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량)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한 가짜 친구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디카페인' 시위로 말이다. (중략)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되도록 내버려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더 높은 생활수준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생활수준을 원한다….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혹자들은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고들 말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허상에 불과하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고리타분한 정치·경제의 탈을 벗어버린 지 오래다. 대신 그것은 우리의 내밀한 욕망과 보이지 않는 의식·생활 속의 사소한 문화라는 외피를 걸친 채 자본주의적 지배-피지배 구조를 고착화하고 있다.

지젝은 지난 두 해 동안 일어난 전 지구적인 사건들을 통해 그와 같은 현실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 이면에서 음험하게 이뤄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작업들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의 좌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 제목으로 쓰인 '멈춰라, 생각하라'라는 말은 그러한 지젝의 의도를 가장 간명하면서도 정확하게 전달한다.

왜 가난한 이는 부자를 위해 투표할까

'계급 배반 투표'가 있다. 한 마디로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부자 정당과 가진 자 편에 서는 투표 행태를 말한다. '강남'을 부유하고 세련된 좌파 진보주의자의 '성지(?)'처럼 묘사하는 '강남 좌파'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 서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 강남 좌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은 투표에서 자신들의 계급(경제적인 부유 계층)을 배반해도 자신들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들은 정녕 노회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헌신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회적 명망이라는 사적 이익을 계속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삐딱한' 분석은, 정작 노회해 보이는 '강남 우파'가 철저하게 계급 투표를 하는 점을 고려할 때, 나름대로 신빙성이 없지 않다.

역시 문제가 되는 이들은 경제적·사회적으로 하층에 있는 계급(계층)이다. 이들의 계급 배반 투표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지젝이 인용하는 토마스 프랭크(Thomas Frank·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의 분석을 따라가 보자(이 책의 67~68쪽에 관련 내용이 있다.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미국의 상황을 우리나라의 현실로 바꿔 기술했음을 밝힌다).

"하층 계급의 배반 투표는 역설적이다. 이것의 기본 전제는 경제적 이해 관계와 도덕적 문제의 간극이다. 바꿔 말하면 경제적 계급 대립(가난한 농민이나 건설 일용직에 종사하는 육체 노동자 대 부유한 사업가와 변호사·공무원 등의 화이트칼라 노동자)이 적당한 애국심과 시민 질서 의식으로 무장한 보통의 성실한 한국인과, 카페라테나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고 4기통의 유려한 SUV를 몰며 낙태 합법화나 동성애자 등의 소수자 인권을 옹호하는 데카당스적인 진보 자유주의자의 대립으로 변환하거나 코드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도출된다. 부유하지 않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55세의 중소기업 직장인 '김평범'씨는, 그 자신이 국가가 관리하는 국민 연금에 꼬박꼬박 돈을 내고, 병원 진료비를 수납할 때 국가(공단)가 책임지는 비용이 너무 낮다고 불평하면서도 강력한 국가나 정부를 반대하는 보수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에게 표를 찍는다.

국민 연금이든 의료 보험이든 이것들은 모두 국민 세금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전례를 볼 때) 다시 과거와 같이 '세금 폭탄' 운운하면서 세금 감소니 기업 규제 완화니 하는 것들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게 뻔하다. 그러나 '김평범'씨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알량거리는 젊은 것들, 훤칠하게 잘 차려 입고 다니는 부유한 진보주의자가 눈에 거슬릴 뿐이다. 그러니 나는 그들이 찍는 표와 반대로만 찍으면 된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우리의 보통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김평범'씨의 선택은 모순적이다. 지젝 식으로 말하면, '김평범'씨는 자신의 경제적 파멸에 투표하고 있는 것이다. 감세와 탈규제는 가난한 농민이나 평범한 월급쟁이들에게는 독이다. 그것은 그들을 파산 은행이나 거리로 내몰 수 있는 거대 기업에 더 많은 자유를 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지젝은 이를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1941~·일본 문예 비평가이자 사상가)의 주장을 인용해 '꿈 작업(dream-work)'으로 설명한다. '꿈 작업'에서 그들 자신의 실제 계급적 이해 관계는 중요치가 않다. 자신들의 사회·경제적인 정체성은 고려 사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계급적 무의식이 압축되고 바꿔가는 것이다. 대체 이것은 무슨 말일까.

이쯤에서 지젝이 강조한 문화나 생활 양식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젝은 문화 전쟁이 곧 '전치(轉置)된 양식의 계급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문화는 우리가 실제로 믿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박정희는 우리를 굶주리지 않고 먹고 살게 해줬다거나 성적을 높이려면 학교든 학원이든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한다는 것 등 말이다.

문화 전쟁은 바로 이런 것들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문화 전쟁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계급 전쟁을 대체한다는 것이 지젝 주장의 핵심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사소하지만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그 모든 생각과 행동들, 곧 (지젝적인 의미에서의) 문화적인 것이 중요하다.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2주가 지났다. 이번 선거 결과에 큰 충격을 받은 이들은 이제 서서히 '멘붕 모드'에서 벗어나 그 패인을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는 중이다. 기존의 지역별 투표에 세대별 투표 행태가 더 심해졌다느니, 프레임 싸움에서 밀렸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50대의 전무후무한 투표 행태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50대는 기존 선거판에서 '캐스팅 보트'의 대표 주자로 성가를 날린 '40대'를 대체하면서 앞으로 상당 기간 대한민국 선거 산업의 '효자 상품'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급변하는 인구 구성 비율과 고령화는 이들의 존재를 더욱 탄탄히 만들 외적 배경이 될 것이다.

아직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

우리는 대체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까. 지젝은 이 책의 제9장 '시기와 분노를 넘어서'에서 '진정한 혁명가의 모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의를 위해 인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일을 하는 데 창의적으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껴 희생적인 마조히즘의 모든 흔적을 털어내는 사람."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된 대한민국의 현실은 너무나 처절하다. 2012년 12월 19일 이후에 절망에 빠져 숨을 거둔 노동자가 벌써 몇 명인가. 꿈은 사라지고 열정은 메말랐다. 죽어가는 진보의 숨통은 가느다란 숨 한 번을 쉬는 것조차 버겁다. 혁명가에 관한 지젝의 말이 조금 공허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하지만 '독재자의 딸'을 찍지 않은 48%의 좌절과 분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아니, 그 좌절과 분노의 목소리는 곳곳에서 뜨거운 불길처럼 일어나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국민 방송 설립 캠페인과 KBS 수신료 납부 거부 운동에서 보이는 열기를 눈여겨 보자. 일상 속의 자생적인 협동 조합이 급속하게 퍼지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가치가 널리 확산되고 있는 것에도 눈길을 돌려 보자. 그 모든 것을 통해 지금 우리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꽃이 피어난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슬라보예 지젝이 <멈춰라, 생각하라>에서 말한 고갱이를 다음과 같이 내 식으로 바꿔 표현하고 싶다.

"또아리를 튼 채 머리를 치켜든 뱀처럼 현실을 직시하라. 포효하는 사자가 돼 내일로 돌진하라."

덧붙이는 글 | <멈춰라, 생각하라> (슬라보예 지젝 씀 | 주성우 옮김 | 2012.12 | 1만4000원)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http://blog.ohmynews.com/saesil/489694)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와이즈베리(2012)


#슬라보예 지젝#<멈춰라, 생각하라>#동구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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