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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끝나고 보름이 지났다. 이번 대선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최후 승자인 박근혜 당선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호사가들의 입을 즐겁게 해준 이들이 있다. 90%를 육박하는 압도적인 투표율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를 던진 50대가 바로 그들이다. 50대가 박근혜 당선의 일등 공신이었다는 말이 당연한 사실처럼 돼버린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의 유례 없는 투표 양상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나는 평소 '배가 불룩 나온 시커먼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를 향한 이른바 '젊은 것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마뜩찮게 생각하곤 했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 자신이 40대 중반의 남성이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모든 세대는 그 세대 나름의 어떤 특별한 문화나 분위기·취향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걸 서로 존중하자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젊은 세대가 중장년, 나아가 노년층에 대해서 삐딱하게 생각한다(또 당연히, 이와는 반대로 많은 중장년층이나 노년층 또한 젊은 세대를 '사시'로 본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꼰대'라는 말이 쓰이는 맥락을 떠올려 보자. 지난해 문학 수업 중에 실시한 글 이어쓰기 활동에서, 몇몇 아이가 40대 이상의 '아저씨'를 매우 문제적이고 음험한 인물의 전범으로 묘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던 중에 인터넷에서 '나꼼수는 몰랐다 늘어난 50대 싸늘한 시선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스치듯 지나치면서 불현듯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떠올랐다. 50대가 끼리끼리 모여 열광하는 '나꼼수' 지지자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냉소를 날렸을까(참고로, 이 기사의 취지는 그 제목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고 보니 교무실에서 30대 후반의 후배 교사와 '나꼼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다른 때 같으면 분명히 우리가 나누는 대화 중간에 끼어들기도 하는 50대 중반의 나름 친한 선생님 한 분이, 단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던 기억도 새삼스러웠다.

대선 전 '나꼼수' 지지자들은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을까? 정권 교체의 열정과 희망, 그리고 의지(?)로 충분한 그들에게 어떤 오류나 문제는 없었을까? 나 자신은 '나꼼수'의 열광적인 팬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선 전만 하더라도 예의 후배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분명히 어떤 메시지가 세상에 전해질 거라 믿었다. 그리고 '독재자의 딸' 따위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2002년의 17대 대선에서 그들이 이회창보다 노무현을 더 많이 찍었으므로) 우리가 숨어 있는 우군으로 보았던 그 50대가 '싸늘한 시선'만 보내고 있었다?

'나꼼수'는 분명히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원래의 내 생각(젊은 세대의 삐딱한 시선에 대한 마땅찮음)으로 인해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다가 50대가 역습하는 거 아냐?' 이건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가 1차 토론회에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를 언급할 때 느꼈던 불안감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강상중의 책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으면서 50대의 그 '싸늘한 시선'의 메커니즘을 알게 되었다.

"베버(Max Weber·1864~1920·독일의 정치학자·사회학자)나 소세키(夏目潄石·1867~1916·일본 근대의 소설가·영문학자)는 혁명이라는 광적인 소동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베버 시대의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뒤의 혼란 속에서 시대를 바꿔 보려는 젊은이들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베버는 그것을 '카니발'이라 갈파했습니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1871~1919)나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1871~1919) 같은 사람들(이들은 모두 혁명가였습니다)을 '이런 놀이를 하면 반드시 반동의 시대가 온다는 걸 모르는가' 하며 철저하게 깎아내렸습니다. 베버는 낭만주의적 반항은 결국 자본주의의 반석에 부딪혀 분쇄될 뿐임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대로 됩니다."(본문 102쪽)

자,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대선 기간 내내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에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박근혜의 태생적인 한계에 도취된 나머지 정권 교체를 위한 혁명의 열기, 베버가 말한 한바탕의 '카니발'에 휩싸여 놀아났다는 말인가? 50대 '배불뚝이 아저씨들' 에게 '나꼼수'는 정말 한 줌도 안되는 '젊은 것들'이었을까?

위 인용문은, 과학으로 무장한 극단의 합리주의나 변형된 자본주의로 인한 사회의 어두운 앞날을 미리 내다본 베버와 소세키의 예지를 설명하는 부분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 대목은 놀랍게도, '나꼼수'의 '혁명적인' 등장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귀결된 보수의 공고화를 설명하는 데 어떤 논리적인 구멍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고 나니 도대체 우리는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무망해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진짜 문제는 그 '앞으로'다. 우리에게 '앞으로', 달리 '미래'는 없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과 '과거'다. 미래는 보이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과거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다. 내가 매 순간 겪은 '지금'이 축적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는 과거로소이다'(167쪽)인 것이다. 좋은 미래를 살자는 우리의 통념적인 바람과 달리, 현재를 잘 살아서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평범한 행복'이라는 개념, 이를 위한 '발명된 행복 방정식'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우리에게는 돈·애정·건강·가족·노후·직장 등과 관련해서 이 정도면 행복하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어떤 기준 같은 것을 갖고 있다. '행복의 합격 기준'이자 '행복의 발명'이다.

그런데 그 발병된 행복을 위한 방정식이 갈수록 복잡해져서 그것을 해결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평범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특권'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비정규직과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정리해고, 자살자와 우울증 환자의 꾸준한 증가 등이 그 살아 있는 증거들이다.

액체 근대-고대 근대란?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현재,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의 개념들이다. '액체 근대'는 가볍고 불안정하며 통제가 불가능하고 국가 초월적인 권력과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세계를 말하고, '고체 근대'는 그와 반대로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고 정치와 권력이 함께하는 세계를 가리킨다. 자본주의의 초기를 고체 근대로 본다면,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최근의 자본주의는 액체 근대와 관련된다.
지금은 비상 사태의 시기다. 불안의 시대다. 세상은, 극한에 달한 자본주의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전인미답의 시간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유동하는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의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행복'이나 '행복 방정식'은 '고체 근대(solid modernity)'의 시대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행복에 관한 기존의 인식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관한 상식적인 질문도 바꾸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사람은 왜 고독한가, 삶과 세상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의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해 나난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고민하는 인간(Homo patiens)'이라는 개념은 전작인 <고민하는 힘>에 이어서 이 책에서도 핵심적인 열쇳말 구실을 한다.

우리가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몇 가지 환경적인 이유가 있다. 먼저 악마적인 카지노 자본주의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1723~1790)가 살았던 18세기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행위자 사이의 신뢰 관계에 바탕을 둔 '순수한'(?) 모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이 돈을 부르고, 돈이 없는 사람은 타자로서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일탈과 변형의 시스템으로 바뀌어버렸다. 2008년의 미국 금융 위기 이후 전 세계적인 경제 불안을 가져오고 있는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으로 근대의 도래와 함께 인간 사이의 연결이 끊어져 흩어져 버린 각 개인들. 이 불특정 다수의 흩어진 개인은 사회 변동기에는 급진화하고, 안정기에는 '사적인 세계'에 틀어박히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그 수많은 '노사모' 회원과 '나꼼수' 지지자들을 떠올렸다. 그 많던 이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그 시간들을 그저 '소비'함으로써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만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흩어진 개인이 만들어내는 '직접 접근형 사회'.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1931~)가 쓴 이 말은, 가족이나 친족·지역·학교와 같은 작은 공동체의 매개 없이 개인이 직접 큰 사회에 접근하는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보 통신의 혁명으로 네트워크가 발달한 오늘날에 이러한 현실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포퓰리즘적인' 정책이나 의견이 순식간에 권위를 갖게 되는 상황도, 흩어진 개인이 사회에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직접 접근형 사회의 한 단면이다. 저자는 정부와 정당 등 공공 영역이 갈수록 축소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부드러운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저자는 이를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일부를 인용하면서(①), 다음과 같이 설명(②)한다.

①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단체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뭐가 뭐지 도통 모르겠다."(본문 87~88쪽)

②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모두가 그렇다고 하면 정답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면 이상한 놈이라고 하면서 묵살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부드러운 전체주의가 우리 사회를 뒤덮게 되는 걸까요. 고민이 깊어지겠지요."(본문 88쪽)

이명박 대통령과 2007년 대선 당시 그를 따른 1149만 표의 주인들이 말한 '정답'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독재자의 딸'과 2009년에 그녀를 따른 1577만 표의 주인들이 앞으로 말할 '정답'을 상상해 보자. 그 '부드러운 전체주의' 사회는 과연 누가, 어떻게 제어해야 할까?

고민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각의 방향은 책 후반부에 있는 네 개의 장(6~9장)에 제시돼 있다. 여러 가지가 나타난다. 과학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그것을 반성하기, 거듭나기(깊은 마음의 병을 앓고 난 후 세계의 새로운 가치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하는 것), 믿을 수 있는 그 어떤 것(종교를 포함해서)을 갖기 등이 바로 그것.

그런데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는 이들 내용에 대한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거듭나기나 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갖는 것에 대한 저자의 제안에 그다지 공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진지함'에 관한 부분에서 가슴이 크게 울리는 경험을 했다. 경박한 웃음이 넘쳐나고, 웃기는 것을 능력과 미덕으로 여기는 세태 때문일까. 저자가 인용하는 소세키 소설이 길고 깊은 여운을 남겨 주었다.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신용하고 죽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되어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진지합니까"(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147쪽)

덧붙이는 글 |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 씀 |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11 | 1만1500원)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http://blog.ohmynews.com/saesil/490125)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사계절(2012)


#<살아야 하는 이유>#강상중#나꼼수#50대#나쓰메 소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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