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옛날 아이들이 경제적 궁핍 때문에 보릿고개를 겪으며 성장했다면, 요즘 아이들은 정서적 궁핍 때문에 마음의 보릿고개를 겪으며 성장한다. 한류의 주역인 월드스타를 배출해내는데 우리나라 십대들의 소비문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중스타에 열광하는 우리의 십대들은 정작 학업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자신과 주변을 들여다 볼 여유와 진지함을 갖지 못한 채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호기(好奇)에만 열을 올린다. 최근 청소년들의 독서 경향 역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판타지 소설에 대한 편식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논술과 입시를 위한 독서를 강요당하고(?) 있거나.

성인과 아동 사이에 낀 중간자로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못하는 불안정한 시기를 건너가고 있는 청소년들. 그들이 독서와 문학과 더 가까워지기 어려운 현실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병폐다. 이렇다 할 청소년 소설이 주목받지 못하던 출판 현실에서 성장소설인<완득이>가 이룬 성과는 하나의 커다란 기폭제가 되어주었고, 성공 가능성을 보게 된 출판사들은 하나둘씩 청소년들을 공략하기 위한 문학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분명 청소년들의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더불어 공감할 거리들을 찾으려 애쓴다는 점에서 그 시도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이라 하겠다. 과연 이것이 얼마나 청소년들에게 호응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인지, 그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고라도 말이다. 

서순희 소설 『순비기꽃 언덕에서』 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서순희 소설가의『순비기꽃 언덕에서』역시 청소년들을 위한 문학 시리즈 중 하나다.
▲ 서순희 소설 『순비기꽃 언덕에서』 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서순희 소설가의『순비기꽃 언덕에서』역시 청소년들을 위한 문학 시리즈 중 하나다.
ⓒ 국은정

관련사진보기

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서순희 소설가의『순비기꽃 언덕에서>역시 청소년들을 위한 문학 시리즈 중 하나다. 도시에서만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갯벌'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눈물겨운 성장기를 진솔하게 담아냄으로써 시골 특유의 정서를 경험한 적이 없는 청소년들에게도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흡입력을 지녔다.

술술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속도감과 함께 '문학'이라는 장르가 가진 무게와 밀도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소금기 가득한 갯마을 사람들의 일상들이 맛깔스러운 사투리와 만나 빚어내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호기심을 빨아들인다.

한승원의 소설이 남해 바닷가의 풍경을 그곳의 언어로 재현해낸 것이라면, 서순희의 소설은 서해 바닷가의 풍경을 그곳의 언어로 구사해 생명력을 얻은 작품이다.

소아마비에 걸린 주인공 봉희는 치료를 받을 시기를 놓쳐 평생 두 발로 걸을 수 없는 잔인한 운명에 놓이지만, 숨겨진 태생의 비극으로 아픔을 겪고 성장해가는 삼촌과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꿋꿋이 성장해 나간다. 비록 아버지는 불구가 된 딸의 아픔을 외면한 채 어린 딸의 슬픔을 보듬지 못하고 오히려 그 상처를 덧나게 할 만큼 매정한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장애아를 둔 가정에서 겪을 수 있는 갈등의 양상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처한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어느 비 오는 날, 우리는 몸을 꼭 붙이고 옴팡집 마루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세찬 비바람이 해당화 꽃잎을 때리는 걸 나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경자가, 앙칼지게 소리 질렀다.
"비야, 막 쏟아져라! 세상이 다 떠내려가게, 몽땅 망해버리게……!"
경자는 연방 무슨 욕설 같은 걸 악써가면서 내뱉었는데,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경자의 그런 행동은, 마치 실성한 것처럼 섬뜩하였다.
나는 경자와 나란히 누워 있는 게 싫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 내가 경자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경자를 거북하게 여겼던 일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82p

우리 삶의 부조리들을 애써 포장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려나가는 작가의 필체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숨겨져 있다. 우리의 현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아름답고 기쁜 일보다 슬프고 힘든 일들이 더 많지 않던가. 그중에서도 문둥병에 걸려 강제로 소록도로 쫓겨 가야 했던 작은할머니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 성장을 마치기도 전에 숨을 거둔 경자의 사연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다.

척박한 모래땅 위에서 모진 바닷바람과 싸우면서도 아름다운 보라색 꽃송이를 피워 올리는 순비기 꽃처럼 봉희 가족들을 둘러싼 수청구지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갈등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이어나간다. 할머니는 꽃을 기르는 것으로, 봉희는 수놓기와 독서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줄여 나갔고, 고모는 공부와 꾸미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것으로 자신에게 대물림 될 가난을 조금이라도 모면하고자 했다.

아버지는 홀로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현실과 맞서보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지금 희망이라고 붙잡은 그 어떤 것에도 불안을 동반하지 않은 것들은 없어 보였다. 

서순희『순비기꽃 언덕에서』삽화  일러스트 김다정 씨의 삽화. 소설 속 장면들과 잘 어우러진 삽화는 읽는 재미와 정서를 훨씬 더 배가시킨다.
▲ 서순희『순비기꽃 언덕에서』삽화 일러스트 김다정 씨의 삽화. 소설 속 장면들과 잘 어우러진 삽화는 읽는 재미와 정서를 훨씬 더 배가시킨다.
ⓒ 김다정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수청구지 마을에 불어 닥친 보다 큰 시련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정부가 강제적으로 추진한 화력발전소 건립 문제가 도화선이 되었다. 발전과 보존, 그 두 개의 갈림길에서 마을 사람들의 갈등의 골은 나날이 깊어갔다. 의견이 엇갈린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비방하다 못해 죽음을 무릅쓴 혈투를 벌이게 된다.

그야말로 '뻘밭에 빠진 사람들'인 셈이다. 6,70년대 이후 가속화된 산업화 바람이 어떻게 농촌 공동체를 해체시켜 나갔는지 실감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또한 성장제일주의가 만들어낸 우리사회 곳곳의 여타 갈등과 반목의 현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미군기지 건립을 위해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던 평택 대추리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제주 강정마을 사람들…

"너야 첨버텀 크게 반대를 안 했응께 그렇겄다먼…… 동네 사람들이 뻔히 보구 있넌디, 네가 보상비를 타먼 워떨라나 물르겄다. 그렇잖어두 네 작은아버지가 보상비 많이 탈라구 남의 헌 배까지 사들인다구 소문이 나뿐디……" -189p

고향에 남겨진 사람들과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슬픔이 교차되는 가운데 주인공 봉희는 도시 노동자가 된 아버지의 부름을 받는다. 집을 뛰쳐나가 소식이 끊긴 삼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봉희와 가족들은 끝까지 고향을 지키겠다는 할머니에게 이별을 고하며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기차에 오른다. 봉희는 이제 열여섯 살이 되었고, 이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서순희 소설가  1959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소설집 『대천동 영번지』 『낯선 길목에서』등을 펴냈으며 현재 보령에서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 서순희 소설가 1959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소설집 『대천동 영번지』 『낯선 길목에서』등을 펴냈으며 현재 보령에서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 서순희

관련사진보기

산업화 이후 지금까지 이뤄온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우리는 어쩌면 산업화 이전보다 더 배가 고픈지도 모른다. 오로지 경제 성장만을 위해 달려오는 동안 정작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몽땅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고, 남보다 더 가졌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덜 가졌기 때문에 울상을 짓고 있다. 구제하기 힘든 정신의 빈곤에 시달리는 우리들은 도대체 얼마나 더 가져야 비로소 행복을 말하게 될까.

"가난하지만 한데 뭉쳐 서로 돕던 그때. 이웃과 가족들의 끈끈한 사랑으로 지내던 어렸을 적 시골의 정취를 그리워하면서 매일매일 조금씩 이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고, 머리를 울린다.

'어울려 산다'는 말의 의미가 점점 더 퇴색되어가는 요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정신의 빈곤 그 중심에서 가장 큰 파도를 타며 흔들리고 있을 청소년들에게 잃어버린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이 한권의 책으로 대신해 들려주면 어떨까. 기껏해야 지루하고 재미없는 흘러간 옛 이야기로, 혹은 잔소리쯤으로 여길 아이들이 있을까봐 조금은 겁이 난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게 더 낫겠어!"라고 말할 아이들에게 진정한 세상 공부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건네 줄만한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순비기꽃 언덕에서> 서순희 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2년 11월 30일, 232쪽 , 10000원



순비기꽃 언덕에서

서순희 지음, 문학과지성사(2012)


#서순희 소설가#순비기꽃 언덕에서 #성장소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