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화와 문학의 자유는 불온에서 나옵니다. 불온은 주류와 지배자들을 불편하게 하지만 세상을 역동적으로 휘젓습니다. 사회는 그 불온을 꿈꾸는 이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질서에 도전하고 혁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세상은 바뀌어 나갑니다. 삶의 비참과 옹졸함 속에서도 진정한 자유와 불온을 꿈꾸었던 김수영 시인이 다시금 강력하게 조명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학으로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일이 아직도 여전히 필요하고 유효하다는 생각을, 시편으로 보는 김수영의 생애에 관한 일련의 글을 통해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려 합니다. - 기자 말

廟廷(묘정)의 노래
1

南廟(남묘) 문고리 굳은 쇠문고리
기어코 바람이 열고
열사흘 달빛은
이미 寡婦(과부)의 靑裳(청상)이어라

날아가던 朱雀星(주작성)
깃들인 矢箭(시전)
붉은 柱礎(주초)에 꽂혀 있는
半(반)절이 過(과)하도다

아아 어인 일이냐
너 주작의 星火(성화)
서리 앉은 胡弓(호궁)에
피어 사위도 스럽구나

寒鴉(한아)가 와서
그날을 울더라
밤을 반이나 울더라
사람은 영영 잠귀를 잃었더라


2

白花(백화)의 意匠(의장)
萬華(만화)의 거동이
지금 고요히 잠드는 얼을 흔드며
關公(관공)의 色帶(색대)로 감도는
香爐(향로)의 餘烟(여연)이 신비한데

어드메에 담기려고
漆黑(칠흑)의 壁板(벽판) 위로
香煙(향연)을 찍어
白蓮(백련)을 무늬 놓는
이 밤 畵工(화공)의 소맷자락 무거이 적셔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


이 시는 수영의 시 전집(1981, 민음사) 첫 자리에 있는 작품입니다. 수영은 해방 직후 좌우익 예술인들의 대립 구도 속에서 자신의 진로를 암중 모색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때 수영은 스물 대여섯 살의 박인환을 처음 만나지요. 박인환은 훗날 '목마(木馬)와 숙녀(淑女)'라는 애수 가득한 시편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수영은 임화(林和, 1908~1953, 시인이자 평론가)가 청량리에 연 사무실에도 드나들면서 그와 관계를 맺습니다. 임화는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릴 만큼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을 뿐더러 아는 것도 많아 금방 수영을 매료시키지요.

그는 그 사무실을 오가면서 외국 신문이나 잡지 등을 번역하는 일에 손을 댑니다. 하지만 곧 그 이유는 뚜렷하지 않지만, 이 일을 접고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할 결심을 하게 되지요. 이 작품은, 그렇게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 수영이 세상에 처음으로 발표한 시입니다. 1945년, 바로 해방이 있던 해였습니다. 영원하고 완벽한 자유를 추구했던 수영이 해방과 더불어 시작 활동을 시작한 점이 결코 우연으로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보수 잡지 <예술부락>에 실렸지만, 모더니스트 박인환은 인정하지 않았다

'묘정의 노래'는 조연현이 주간한 보수적인 잡지 <예술부락>에 실렸습니다. '마리서사'를 운영하고 있던 모더니스트 박인환은 이 잡지에 실린 시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요. 작품들이 낡았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김수영의 이 작품도 시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실상 수영 자신도 이 시를 습작 수준의 졸작으로 여기기는 마찬가지였지요.

그는 연극을 그만 둔 뒤 집에서 쓴 20여 편의 시를 조연현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현대성과도 거리가 멀고 수준이 낮은 '묘정의 노래'가 뽑혔다고 불평한 바 있지요. 수영은 '묘정의 노래' 덕분(?)에 박인환을 비롯한 모더니스트 시인들에게서 혹독한 비판과 수모를 당했습니다(이러한 사실들은 수영의 산문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 - 나의 처녀작>(1965)이라는 글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묘정의 노래'에는 <삼국지(三國志)>의 고풍스러운 영웅인 '관우'가 깊이 개입해 있습니다. 수영은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을 따라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 이 시의 공간인 '남묘'의 모티프가 됨)에 참배를 다녔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성지"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수영은 그곳에 있던 거대한 관우 입상에서 외경과 공포를 느꼈던 모양입니다.

수영은 그 외경과 공포의 정서를 바닥에 깐 채 불길하고 기괴한 곡성이 배음(背音)으로 흐르는 작품을 창조해낸 것이지요. 그는 이 작품을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능변(能辯; 말을 능숙하게 잘함)'으로 보고, 자신의 작품 목록에서 지워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망신을 위한 참고"나 "'의미가 없는' 시를 썼다는 증거'와 같이 말하면서 스스로 혹독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지요.

이 작품의 2연 4행에 등장하는 '관공'은 '관우'를 가리키는 또다른 호칭어입니다. 그러니 이 작품의 제목인 '묘정의 노래'는 '관우 귀신을 위한 노래'로 이해해도 될 듯합니다. 그 비운의 중국 영웅은 우리의 전통 무속에 깊이 관여해 있지요. '관군묘'니 '관군제당'이니 하는 게 다 그와 관련됩니다.

첨단의 현대주의자였던 박인환이 왜 이 시를 낡았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만하지요. 고풍스러운 한자어로 점철된 시구의 문체와 소재들의 성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실상 수영은 많은 시를 (한자어 중심의) 일본어로 썼습니다. 여기에는 1941년부터 2년여 간 이어진 일본 유학 경험이 그 배경으로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다만 이 작품에서 반복되는 '울음'의 이미지, 곧 1연의 '한아'(까마귀류)의 울음과 2연의 '우는 짐승(사람)' 등은 묘한 울림을 자아냅니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를 온몸으로 보낸 수영의 삶과 겹쳐지기 때문이지요. 음울한 이미지를 주조로 하는 까마귀가 쓰인 까닭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런지요.

그러고 보니 고색 창연한 관군묘 안팎의 풍경도 스산하면서 고풍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화려하지만 애틋하고, 천박함 속에 애잔함을 담고 있는 그 풍경들 말이지요. 그 풍경들 속에서 수영의 훗날 거작(巨作)인 <거대한 뿌리>(1964)의 전조를 보는 이가 저뿐일런지요. 그곳에서 수영은 이렇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비숍女史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進步主義者(진보주의자)와 / 社會主義者(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統一(통일)도 中立(중립)도 개좆이다 / 隱密(은밀)도 深奧(심오)도 學究(학구)도 體面(체면)도 因習(인습)도 治安局(치안국) / 으로 가라 東洋拓植會社(동양척식회사), 日本領事館(일본영사관), 大韓民國官吏(대한민국관리), /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무식)쟁이, / 이 모든 無數(무수)한 反動(반동)이 좋다" - '거대한 뿌리' 중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수영, #<묘정의 노래>, #영원한 자유, #불온 시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