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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공자)의 生活難(생활난)

꽃이 열매의 上部(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작란)을 한다


나는 發散(발산)한 形象(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作戰(작전)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伊太利語(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事物(사물)과 사물의 生理(생리)와
사물의 數量(수량)과 限度(한도)와
사물의 愚昧(우매)와 사물의 明晳性(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무척 난해해 보입니다. '열매의 상부에 피'(1연 1행)어 있는 '꽃'(1연 1행)과 '줄넘기 작란'(1연 2행)은 무엇일까요. '꽃'과 '열매'가 병존하는 상황도 상식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줄 있는 것은 아니지요. 화자 '나'가 '구하'려고 하는 '발산한 형상'(2연 1행)은 또 무엇일까요. 이 모든 것들에 일일이 집착하다 보면, 왜 이 시가 현대시문학사에서 난해한 현대 모더니즘 시의 전형으로 평가받는지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하고 소박한 한 문장 속에 있습니다. 4연 1행의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가 바로 그것이지요.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이 곧거나 반듯하게 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영이 그렇게 스스로 '바로 보마'고 다짐하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는 '사물'과, 그에 관련된 이런저런 것들입니다. 예의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에 이어지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 등이 그것이지요. 그것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수영은 눈앞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꼭 보아야 하는 것들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똑바로 보면서 언명합니다. 말로 명확하게 밝혀야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난해한 시... 핵심은 단순하고 소박한 한 문장 속에

'사물'은 눈에 보이므로 '바로 보기'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사태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그것으로만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보는 '사물(사태)'의 겉모습은, 그 겉모습과 전혀 다른 속내를 감추기 위해 위장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사물의 생리'와 '한도'와 '우매'와 '명석성' 등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종합할 때, 어떤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을는지요.

'바로' 봄으로써 본질을 캐보려는 수영의 몸부림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강렬합니다. 어찌보면 집요하리만큼 간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5연의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가 바로 그 근거이지요. 이 구절은 일찍이 공자가 말한 "朝聞道(조문도)면 夕死可矣(석사가의)라", 곧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가히 죽으리라"는 명구(名句)에 담긴 뜻과도 상통합니다. 다만 수영과 공자의 차이점은 그 '도'가 무엇이냐에 달려 있지요.

수영의 '도'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바로 '생활의 도'였습니다. 수영은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 모진 생활난을 겪습니다.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고투의 나날이었지요. 하지만 수영은 그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옛 현인의 도도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생활의 도'를 깨달음으로써 그 생활을 이겨내는 방식이랄까요.

사실 처절한 가난으로 점철된 현실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활에 결코 끌려다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현실을 조롱을 하듯이 대한 면도 있지요. 1946년에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미국의 대외 원조 기관)의 통역관으로 출근하다가 갑작스레 그만둔 것도 그렇고,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박일영과 함께 뜬금없이 간판을 그리러 다닌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정 체제에서 통역관으로 일한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해방 직후의 남한은 모든 힘과 물자가 미군을 통해 배분되던 시절이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당시에는 통역 자리도 무척 귀했습니다. 하지만 수영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좋은(?) 자리를 기꺼이 차버리지요.

예나 지금이나 생활은 중요합니다. 생활을 통해야 생존이 가능할 테니까요. 생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골방에 박혀 살아가는 '히키코모리(hikikomoli; 은둔형 외톨이)'에게도 생활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살아 있음'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이 보증해줍니다.

생활의 표면과 이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하지만 생활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삶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생활이 삶의 중심에 서 있게 될 때, 우리의 깊은 머릿속에 담긴 꿈과 이상은 점점 그 빛을 잃게 되어서지요. 그것들은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자유와 공존을 위한 싸움도 생활을 핑계로 회피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생활과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비생활 사이에 팽팽한 대립과 긴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생활과 비생활 간의 미묘한 경계를 늘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수영이 '바로 보마'고 몸부림을 친 배경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겠지요. 생활에 끌려가지 않는 것, 자신의 줏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것, 아마 이런 생각들이 수영의 머릿속에서 용틈임을 하고 있지 않았을런지요. 그러므로 수영에게 중요한 것은 생활을 박차버리느냐 끌려가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훗날 그 자신이 한 말을 인용해 표현하면, 생활은 '뚫고 나가는 것'*임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공자의 생활난>은 말 그대로의 '생활의 어려움'을 그린 시가 아닙니다. 물론 앞에서 본 것처럼, 수영에게 액면 그대로의 '생활난'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작 다른 데 있지 않았을는지요. '생활의 어려움'이 아니라 생활의 표면과 이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그래서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것과 같은 것 말입니다.

그 일이야말로 수영에게는 진정으로 풀기 어려운 '생활난'이었던 것이지요.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이 '이제 나는 바로 보마'를 김수영의 모든 시를 관통하는 정신으로 본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 1953년경, 수영이 군산으로 문학 강연을 다녀온 후에 쓴 일기장의 메모에 있는 구절입니다. 그 메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독서와 생활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전자는 받아들이는 것이고 후자는 뚫고 나가는 것이다.
② 확대경을 쓰고 생활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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