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현재, 한국에서는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안으로 '마을공동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선언하고, 밀고, 짓는 토건국가'가 아닌, '소통하면서 서로를 살리는 마을을 만드는 돌봄사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마을의 귀환' 기획은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면서 지난해 8월 시작됐습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한국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생생하게 조명하면서, '마을공동체가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했습니다. '마을의 귀환' 기획팀은 <오마이뉴스> 창간 13주년을 맞아 민관이 협력해 '지속가능한 마을만들기'를 진행하고 있는 영국식 마을공동체 만들기 모델을 찾아갑니다. [편집자말] |
[특별취재팀: 글 홍현진·강민수 사진 유성호]
흰 종이에 질문이 적혀 있다.
"날마다 들어가는 비용은 어떻게 마련할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한다. 한 사람이 종이와 펜을 들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적는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들의 '브레인스토밍'은 어느새 두번째 페이지로 넘어간다. 답변은 쉬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기부금을 받는다""모임 장소로 빌려준다""음식을 제공한다""연극 공연을 한다"13일 오후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Wembley Stadium) 역 인근의 '커밍순 클럽
(The Coming Soon Club)'.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20여 명의 사람이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파란 눈을 가진 백인, 레게머리를 한 흑인 그리고 네팔에서 온 이민자. 워크숍에 참석한 이들은 겉모습만큼이나 직업도 예술가, 자선단체 활동가, 요리사 등 다양했다.
커밍순 클럽에 모인 각양각색 사람들이 아이디어 쏟아내다
이날 워크숍은 오는 8월 웸블리 스타디움 근처에 완성될 '팝 다운 스퀘어(Pop Down Square)'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위해 열렸다. 프로젝트 이름은 'Make your idea happen here competition(당신의 아이디어를 이곳에서 실현하는 경쟁)'.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웸블리가 속해있는 브렌트 구청에서 초기 비용 2만 5000파운드(19일 외환은행 공시기준, 약 4185만 원)를 지원받아 '팝 다운 스퀘어' 공간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뽑힐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함께 팀을 구성해서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다. 아이디어는 3월까지 받는다.
1996년부터 웸블리 지역에 살았다는 그레이스(Grace·54)는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있다. 그레이스는 "이 공간도 교육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네팔에서 온 산토쉬(Santosh·30)는 웸블리가 '축구의 고장'이라는데 착안해 "웸블리의 문화와 예술을 접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루니(잉글랜드 국가대표 축구 선수) 그리기 대회를 제안한다"며 "축구를 좋아하고 그림에 관심이 있는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워크숍은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참가자들은 먼저 돌아가면서 1:1로 자신을 소개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이야기한다. 또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겪게될 어려움을 생각해보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고민해 본다. 브레인스토밍은 그러한 과정의 일부다. 참가자들은 4~5명씩 그룹을 이루어 '사람들 간의 관계', '관료제'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그 내용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유했다.
디자인은 24살 대학생이, 운영은 주민이
팝 다운 스퀘어가 들어설 '웸블리 스타디움' 역 입구 1230㎡(약 372평) 부지는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인 황량한 벌판이다. 울타리 너머로 이름 모를 풀들과 버려진 쓰레기가 보인다. 5년 후 재개발이 진행될 이 땅은 런던 시청과 퀸테인(Quintain)이라는 부동산개발회사 소유다. 브렌트 구청은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땅을 공짜로 빌리기로 했다.
민간기업인 퀸테인이 임대에 찬성한 이유는 두 가지다. 웸블리 곳곳에 재개발 예정부지를 가진 퀸테인 입장에서는 당장은 쓸모없는 땅을 누군가 사용해 이 지역이 활성화된다면 그들에게도 이익이다. 한시적인 기간이지만, 지역사회를 위해 땅을 빌려줌으로써 기업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퀸테인 외에도 한 건축회사가 시공을 해주고, 한 목재회사가 자재를 기부하기로 했다. 알렉스는 이러한 일이 가능한 또 하나의 이유로 "구청이 기업들과 관계를 잘 유지해왔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팝 다운 스퀘어를 디자인한 사람은 놀랍게도 24살의 대학생이다. 브렌트 구청은 영국 왕립 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RCA)와 제휴를 맺고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다. 그 결과 마이크(Mike)의 디자인이 1등을 차지했다. '팝 다운'은 접었다 펼 수 있는 스크린을 말한다. 스크린은 영화 보는 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활동을 알리는 광고판으로도 쓰일 수 있다. 스크린을 접으면, 그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다. 스크린 아래에는 115㎡(약 35평) 규모의 실내 공간이 마련돼 주민 커뮤니티 활동을 벌일 수 있다. 마이크는 "팝 다운 스퀘어가 커뮤니티에 공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몇 명인지는 상관없어요. 한 명이라도 끝까지 프로젝트를 책임지길 원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주민이 함께 할 수 있을지, 그리고 5년 동안 지속 가능한지에 달려 있어요."워크숍을 시작하기 전, 브렌트 구청 도시재생팀 직원 알렉스(Alex)는 참가자들과 함께 스퀘어가 들어설 부지를 먼저 돌아보았다. 청바지 차림으로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는 공무원이라기보다는 시민단체 활동가처럼 보였다.
"너무 상업적인 아이디어라면 채택되지 않을 거예요. 예를 들어 카페나 레스토랑은 인근 가게와 경쟁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죠.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아이디어를 내주세요.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단지 공간뿐이지만 과소평가하지는 마세요. 빈공간을 통해서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어요."참가자들은 알렉스에게 임시로 짓는 건물이 안전한지, 스크린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주차는 어디에 하는지, 화장실을 만드는지, 방음은 되는지 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빈공간을 숨은 보물로... '민와일 프로젝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용경기장인 웸블리 스타디움(9만 명 수용)은 웸블리에 있다. 1년 365일 가운데 경기가 열리는 60일에는 인파가 물밀듯 밀려오지만, 경기가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웸블리가 경기가 있는 날 뿐만 아니라 300일 가까운 시간을 일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브렌트 구청 직원 알렉스의 바람이다.
또 하나. 재개발 예정 지역인 이곳 웸블리에는 빈공간이 많다. 영국에서는 재개발이 진행되는 데 10~15년이 걸린다. 브렌트 구청은 그 기간 동안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4월, 이 지역에 '커밍순 클럽'이 들어선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날 워크숍이 열린 커밍순 클럽 공간은 전면이 넓은 유리창으로 탁 트여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밖에서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클럽 외벽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Do you need access to low risk space?(위험부담이 적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나요?)" "Do you have an idea/project business?(아이디어나 사업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Come in speak to us?(들어와서 말해줄래요?)"
커밍순 클럽은 공동체 이익회사(CIC, Community Interest Company)인 민와일 스페이스(
Meanwhile Space)가 웸블리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이름이다. 공동체 이익회사는 사회적 기업의 한 형태로, 특정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인 회사다. 주식을 발행할 수 없는 자선단체와는 달리 공동체 이익회사는 배당액의 제한이 있는 주식을 발행해 커뮤니티에 공헌할 수 있다.
2009년 설립된 민와일 스페이스는 정부나 지자체, 민간으로부터 비어있는 공간을 빌려서 공동체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한다. 일종의 에셋 매니지먼트(Asset Management)다. 영국에서는 주민 중심의 마을만들기 사업체가 이런 방식으로 자산을 이전받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민와일 스페이스는 그 기간이 일시적이다. 'Meanwhile'이란, 빈 곳이 주인 또는 세입자를 찾게 되는 '그동안'을 뜻한다. 민와일 스페이스는 빈 곳이 왜 사용되지 않는지, 어떻게 하면 사용될 수 있을지, 소유주와 인근 주민과 만나 함께 고민한다.
브렌트 구청 관할 지역에서는 사무실을 빌려 청소년들에게 음악, 사진, 건축 등의 수업을 진행하는 '사우스 킬번 스튜디오(South Kilburn Studio)', 빈 펍(영국식 맥주집)과 빈 사회복지센터를 이용해 주민들의 춤·연극 연습 공간을 만들고 있는 '알버트(Albert)', 빈 가게를 주민들의 공동 작업소로 만든 '뉴 윈도우즈 온 윌즈덴 그린(New Windows On Willesden Green)' 등의 '민와일 스페이스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커밍순 클럽은 세입자를 찾지 못해 10년 가까이 비어있던 공간을 임대했다. 임대료는 공짜다. 전기세, 난방비 등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만 부담하면 된다. 커밍순 클럽 매니저인 알리슨(Alison)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건물 주인은 빈 공간을 빌려주는 대신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어요. 클럽의 200㎡(약 60평) 공간에 대한 1년 세금만 2만파운드(19일 외환은행 공시기준, 약 3348만 원)지만, 공동체 이익회사와 같은 단체가 빌리면 80%까지 세금을 깎을 수 있어요. 또 3, 4년씩 가게 비어 있으면 건물 가치가 떨어지지만, 이 공간에 사람이 드나들어 활기가 생기면 저절로 땅값 하락을 막을 수 있는 효과도 얻을 수 있죠."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루니 그리기 대회가 열린다?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지 않고, 지역 공동체에 공헌할 수 있다면, 주민의 아이디어는 이곳 커밍순 클럽에서 언제든 실현될 수 있다. 축구 클럽, 수공예 모임, 사진 전시, 영화 상영, 뮤직비디오 촬영 등등. 지난 1년 간 커밍순 클럽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민은 짧게는 하루, 길게는 한 달 동안 이 공간을 빌릴 수 있다.
프로젝트를 통해 가게를 얻게 된 주민도 있다. 커밍순 클럽 옆에 있는 모자 가게 주인 도린다(Dorinda·63)가 그 주인공. 도린다는 커밍순 클럽에서 자신이 만든 모자를 전시했고, 주민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가게를 열 수 있었다. 예식용 모자를 파는 가게에는 손으로 직접 만든 모자들이 모양과 크기를 달리한 채 진열돼 있었다.
이 모자 가게는 클럽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12월 문을 열었다. 이곳 역시 빈 공간을 임시로 임대한 것. 월세는 없다. 커밍순 클럽은 가게 홍보는 물론이고 컨설팅도 해준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들었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만든 모자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했죠. 다른 사람들에게도 꼭 추천해주고 싶어요."알리슨은 커밍순 클럽 맞은 편 가게들을 가리켰다.
"지난해 커밍순 클럽이 들어온 이후 저 앞에 있는 가게도 문을 열었고, 저기 있는 가게도 문을 열었어요.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이 지역이 활성화돼서 이 건물에도 세입자가 들어온다면 커밍순 클럽의 역할은 끝난 거죠."오후에 시작된 워크숍은 밖이 어둑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여름, 팝 다운 스퀘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인 루니 그리기 대회가 국가대표팀 축구 경기만큼 웸블리의 대표 행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