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토요일 오전. 절친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그녀는 심리학을 좋아했다. 소속만 심리학과일 뿐 여기저기 쏘다니는 나와는 달리, K는 수업 시간에 배운 이론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즐겼다. 기본적으로 우울한 성격에 과도한 예민함, 거기에 시니컬한 말투까지. 심리학자 외에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졸업 후에 대학원에 들어가서, 박사과정까지 밟아 교수가 될 줄 알았다. 이제는 한국에도 심리학의 새로운 학파를 만들 때가 되지 않았나 - 그렇다면 K가 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라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뛰어넘는 심오한 세계관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평범한 길을 걸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한 상담소에 간사로 취직하더니, 돈 빡쎄게 모아 3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시가에 폐백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녀를 보며 착잡한 심경에 빠졌다. 이제 K도 만나면 남편 욕, 시월드 욕 삼매경에 빠지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면 어쩌지.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해석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던 예민한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는 걸까. 달력마다 결혼식 날짜로 빼곡한 2013년, 여자 나이 스물 여덟. 우리는 이렇게 현실과 타협하며 꿈을 잃어가도 좋은 것인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날 저녁, 어쩌다 보니 <에바로드> 비공식 상영회에 가게 됐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몸은 피곤한데 왠지 엄청나게 놀고 싶었다. 오전의 울적함을 술로 달래고 싶었나 보다. 마침 잉집장(월간 <잉여> 편집장)이 격하게 꼬시길래 못 이기는 척 상수역으로 향했다. 뭐 이리 뭐냐고 궁시렁거리며 길을 더듬기를 10여 분, 한 작은 카페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스무명 쯤 되는 사람들이 어두컴컴한 공간에 앉아 벽에 쏘아진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에바로드 상영회였다. 들어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따뜻한 웃음소리가 너무 생경했기 때문이다. 낯 모르는 사람 몇백 명이 앉아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웃음소리, 짜인 각본에 따라 의도적으로 삽입되는 예능 프로그램 방청객들의 웃음소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 웃음소리는 작가에 대한 애정과 작품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에반게리온 한 편 본 적 없고, 오로지 월간잉여에 소개된 글로만 에바로드를 접했던 나로서는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웃음소리에 못 섞이면 어떡하지? 몇 분을 고민하다가 나는 잉집장을 구하는 마음으로 용감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서 잠깐, 에바로드를 설명한다. 2012년 6월, <에반게리온 Q>의 개봉을 앞두고 4개국에 흩어져 있는 에반게리온 스탬프를 지정된 기간 내에 모아오면 상품을 준다는 이벤트에 참가를 결심한 두 남자는 사비를 탈탈털어 비행기에 올랐다. 뭐라도 생산적인 걸 남기고 싶어, 중고 핸디캠을 구입해 이 여정을 영상으로 남기기로 했단다. 그 여정에 대한 기록이 바로 에바로드다.
극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에반게리온 4개국 스탬프 릴레이에 참여한 두 덕후(오타쿠)는 이미 프랑스, 미국, 중국을 찍고 일본에서 마지막 호갱짓을 하고(상점에 들르고) 있었다. 스탬프를 찍어주는 상점에서조차 이들을 대단한 덕후로 칭송하며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는 일본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다녔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과정에서 나누는 대화들에 공감이 갔다.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나'하는 류의 현실적인 멘트와 '우리가 안 하면 이걸 누가하냐'는 빠심(열정) 어린 멘트 사이에서 그들은 방황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당첨자 발표를 기다렸다. 1등은 에바로드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보름 안에 4개국을 찍은 사람들이 어디 흔하겠냐고. 비행기 티켓값만 합쳐도 둘이 합치면 천만 원을 들었을 성 싶다. 그 후의 선택이 더 기가 막힌다. 가이낙스가 공개한 상품은 ① 4개국 항공권과 숙박권 ② 작가가 그린 원화 일러스트. 설마? 설마?!! 그렇다. 이들이 택한 것은 2번이었다. 가이낙스 측도 당황했나 보다. 아직도 상품은 도착하지 않았다고. 박현복씨는 아직도 투덜거린다.
"아, 내 교복 마리!!" 믿을 수 없는 두 오덕(오타쿠 청년)의 이야기. 나는 덕후도 아니고, 에반게리온 팬도 아니지만, 에바로드와 사랑에 빠졌다. 대가 없이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에너지. 이 에너지가 결국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게 아닐까? 얼마를 주면 뭘 받을 수 있는 등가교환과 쓸모 있음을 중시하는 효율성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기계처럼 움직이기 쉽다. 그날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두 덕후의 고등학교 친구, 회사 사람들, 록 페스티벌 만난 친구 등이 모여서 에바로드를 응원하고 있었다. 음악, 영상, 그림, 만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관심사는 달라도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위안을 얻고 있었다. 어느덧 그들 틈에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가려는데 현복씨가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에바로드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와 직접 작곡한 '에바로드 OST' CD가 들어있었다. 영화 보는 내내 "함께 가자, 에바로드~" 라는 가사가 좋아서 흥얼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티셔츠도 공들인 티가 났다. 마무리 부분에 형광 연두색 스티치까지, 집에서만 입기에는 아까운 디자인이었다. 스탬프 릴레이에 참여한 것도 대단한데 이걸 영상으로 찍어서 상영회를 하고, 거기에 음반과 티셔츠 제작까지. 에반게리온에 대한 열정은 무한대로 팽창하며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덕질(오타쿠 짓)에는 어떤 숭고함이 서려 있었다.
생각해보면 돈 안 되는 모든 취미는 덕질이다. 그게 글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간에 그렇다. 덕질이 과해지면 본인이 직접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좋아하는 일로 돈 벌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취미는 적당히 즐기겠다면서 가슴속에 묻어두고, 먹고 살기에 바쁜 나날들을 보낸다. 나는 믿는다. 다들 마음 속에 남들과는 다른 무시무시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다만, 취향없는 평범함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유행에 따르기를 강요하는 환경에 휩싸여 깨닫고 있지 못할 뿐이라고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에바로드 OST를 재생했다. "함께 가자, 에바로드~ 우린 이미 이 길 위에~" 가사에 나오는 목적지는 에바로드지만, 내 귀에는 유토피아로 들린다. 쓸모없을지도 모르지만 니가 좋아하는 거 끝까지 해보지 않으련? 그게 바로 에바로드의 길이란다. 나는 이런 덕질도 했으니 당신의 덕질도 응원할게.
일주일 후면 K는 신혼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것이다. 그녀는 과연 자신의 심리 덕후 기질을 감추고 잘 살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하든 방어기제와,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와, 내적인 두려움과 욕망과 연결시켜서 질문하던 그녀. K와 함께 에바로드를 보러 가고 싶다. 덕질의 숭고함에 감동 받아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게 뭔지 되돌아보게 하고 싶다. 아줌마면 어떠랴. 무언가를 이유 없이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에바로드를 갈 수 있어야 한다.
문득 이런 장면을 상상해본다. 에바로드 티셔츠를 각양각색으로 리폼해서 입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함께 가자, 에바로드~" 노래를 부르면서 걷는 모습을.
4월 7일 일요일 오후 세시,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무료 상영회가 열린다. 함께 가지 않을래요, 에바로드?
자세한 사항은 (
http://www.evaroad.so/notice.php?ntNo=8) 참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잉여> 블로그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