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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찾아온 3월의 주말. 상견례는 오후 5시부터였지만 부모님은 낮 12시도 안 돼 서울역에 도착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엄마의 빨간 재킷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아빠의 낡은 양복도.

일주일 전, 점심을 먹고 교보문고를 한 바퀴 돌고 있는데 남자친구 '곰씨'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 상견례 때 양복에 넥타이 매고 오신대?"
"몰라. 왜?"
"그럼 아빠도 옷 사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한 번 여쭤봐."

상견례는 어른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숙제인가 보다. 곰씨네 부모님은 상견례 날짜가 잡히고 나서 이런 저런 걱정에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부산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빠 상견례 때 양복 입고 오나?"
"양복 입어야지."
"접 때는 봄 잠바 입고 온다매? 그냥 깔끔하게 입으면 안 되나?" 
"야, 사람들이 암만 그래도 상견롄데 양복 입어야 된다 카더라."  

평소 양복을 입을 일이 없는 아빠는 정장이 단 한 벌이다. 명절이나, 제사를 지낼 때면 늘 입는 양복. '그 옷을 입느니 차라리 그냥 다른 옷을 입지'라는 생각도 잠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아빠에게 옷 한 벌 사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결혼할 때 아빠 양복은 잘 해줘야지.

"내가 다 떨린다, 누나야" 캐나다에서 온 문자

 막돼먹은 영애씨는 결혼할 수 있을까? 산호 부모님과 상견례하는 영애씨네 가족.
막돼먹은 영애씨는 결혼할 수 있을까? 산호 부모님과 상견례하는 영애씨네 가족. ⓒ tvN

덕수궁 근처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고, 경복궁과 인사동을 거닐었다. 노란 산수유 앞에서 엄마, 아빠, 나, 그리고 곰씨 넷이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가족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상견례를 한다고 하자, 워킹홀리데이로 캐나다에 있는 남동생은 아침부터 '내가 다 떨린다, 누나야'라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난 안 떨리는데'. 애써 쿨한 척 했지만 속은 아니었다. 곰씨네 부모님이 우리가 원하는 결혼식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 어쩌지. 다른 결혼식장을 알아봐야 하는 건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날은 흐리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어 상견례 장소에 도착했다. 이어 곰씨네 어머니, 아버지가 도착하고, 두 가족은 나란히 마주보고 앉았다. 어색한 웃음과 적막이 오갔다. 곰씨 아버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현진이랑 곰씨랑 어릴 때부터 만나서 언젠가는 결혼하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할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우리 곰씨가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연애 8년. 곰씨와 나 모두 서로의 부모님을 여러 번 만났다. 곰씨 부모님을 처음 만나고 돌아오던 날, 나는 버스에서 펑펑 울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줄 수도 있구나'.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하고 애정표현에 서툰 가정에서 자란 내게 곰씨네 가족 분위기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나는 또 다시 코끝이 찡해졌다.

그러자 아빠의 대답.

"이미 뭐, 마음에 들고 말고는 우리 손을 떠난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아빠는 늘 곰씨가 마음에 든다고 했었는데. 곰씨 어머니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아빠, 와 이라노.

"일반 결혼식장에서 안 하는 게 제일 마음에 드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곰씨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가 생각하고 있는 결혼식장이, 서초동 고속버스 터미널 옆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이에요. 대관료는 6만 원이고, 결혼식은 하루 한 쌍만 해요. 결혼식장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고, 밥은 옆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뷔페를 해줘요. 가격은 3만 원 정도. 지난주에 음식을 먹어보고 왔는데 깔끔하더라고요. 그런데 작은 결혼식장이라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200~250명 정도 돼요. 밥은 최대 220인분 정도? 혹시 너무 수용인원이 적다, 싶으시면 다른 곳으로 바꿀 수도 있고요. 의견을 말씀해주세요. 부모님 손님도 있고, 친척들도 있으니까요."

곰씨의 말이 끝나자, 곰씨 아버지는 "200명 정도면 충분하다"면서 "일반 예식장에서 안 하는 게 제일 마음에 든다"고 반색했다. 엄마도 "우리는 부산에서 오기 때문에 어차피 차 한 대 정도, 40~50명밖에 못 온다"며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어서 곰씨와 나는 예단과 예물도 최대한 간소하게, 허례허식은 최대한 생략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고 양가 부모님 모두 이에 동의했다. 예단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집안에서 각각 챙기기로 했고, 예물은 곰씨 어머니가 결혼할 때 받았던 예물을 물려받기로 했다. 함 같은 절차도 모두 생략하기로 했다.

곰씨 어머니가 "서운하시지 않으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엄마는 "전혀 그런 것 없다"면서 "애들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말했다. 이는 곰씨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잃지 않을까... 나는 결혼이 두려웠다

부모님들이 이렇게 우리 생각을 흔쾌히 받아들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부모님과 신뢰관계가 있었고, 우리 집의 경우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뇌(?)'의 결과랄까.

예전부터 나는 '결혼하지 않겠다',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었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내게는 '굴레'처럼 느껴졌었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곰씨와 나의 관계가 개인과 개인이 아닌,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 속에서 내가, 나와 곰씨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우리'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직도 이 고민은 유효하다. 하지만 곰씨, 그리고 곰씨 가족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엄마가 "결혼도 안 하고, 결혼식도 안 하겠다고 했던 애가 결혼식은 하겠다고 하니까 우리는 다 괜찮다"고 말한 건 그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늘 내 판단을 존중해줬다. 서울로 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겠다고 했을 때도, 작은 언론사 기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늘 내 행복이 먼저였다. 이번 '소박한 결혼 프로젝트' 기사도 이미 친척들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부모님의 '동의'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이래라 저래라 하기 미안하다'는 것. 평생을 키워놓고도 '해줄 게 없어서 미안하다'니… 곰씨와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결혼 준비 비용은 통장을 만들어서 반반씩 돈을 모으고 있고요. 집은 저희가 대출을 받아서 작은 빌라나 오피스텔 같은 곳을 알아보려고 해요. 둘 다 직장생활하고 있고, 아직 젊으니까 벌어서 갚으면 되죠. 대신, 도움 주시면 거절은 안 하겠습니다(웃음)."

폐백은 집안의 어른인 곰씨 친할머니 의견을 묻기로 했다(우리 친가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 보통 결혼식이 끝나면, 하객들은 식사를 다 끝내고도 신랑신부가 폐백을 마치고 올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는 그 시간을 아껴서 하객들과 인사도 나누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곰씨 아버지는 "우리는 다 이해하지만 할머니가 서운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다"면서 "다음번에 현진이랑 곰씨가 내려와서 할머니한테 오늘 했던 이야기를 하면 아마 다 이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님 연애이야기, 집안 '흑역사' 오고 간 3시간

보통 상견례라고 하면 불편하고 냉랭한 분위기를 떠올리지만, 이날 상견례는 3시간 동안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술도 몇 병이나 비웠다. 곰씨네 부모님 연애하던 시절 이야기도 듣고, 각 집안의 '흑역사'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아빠는 계속 나를 가리키며 "쟤는 내 딸이지만 참 문제가 많다"면서 "고집도 세고 게으르고 지(자기) 하는 일만 열심히 한다"고 폭로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엄마는 "애가 무뚝뚝하고 살갑지 못해서 어떡하냐"며 거들었다. 나중에 이를 들은 한 선배는 "딸 시집 보내는 입장이라 그런 것 아닐까"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걸까(부산에 가면 상견례 후일담을 꼭 들어봐야겠다). 이에 곰씨 부모님은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무조건 좋다"면서 "딸 하나 생겼다 생각하고, 부족한 부분은 맞춰 가면 된다"고 웃어보였다.

'그래도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아마 양가 부모님 모두 말씀은 안 했지만 서운한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우리의 생각을 최대한 존중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 큰 산을 넘은 기분이다. 부모님들 다음 모임은 서울을 떠나 공기 좋은 곳에서 해야겠다.


#결혼#소박한 결혼#상견례#작은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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