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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합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4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간 첫 번째 지역은 강원도입니다. [편집자말]
1989년 고한읍 시가지 풍경.
 1989년 고한읍 시가지 풍경.
ⓒ 고한초등학교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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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나에겐 잊을 수 없는 마을이다. 내 공무원 생활 첫 발령지가 그곳이기 때문이다.

1989년 2월. 공무원시험 공고가 났다. 살펴보니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이 40명을 뽑는다고 했다. 많은 인원을 뽑는 곳에 지원하는 게 유리해 보였다. 태백은 탄광촌이기 때문에 일단은 패스. 정선군으로 결정했다. 정선을 농촌마을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운인지 실력인지, 어쨌든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정선군 고한읍. 이런, 전국에서 탄광이 제일 활성화된 지역이었다! 뭐 피하려다 뭐 밟은 꼴이다. 일단 근무를 조금 하다가 그만둘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출장을 한 번 다녀오면 흰색 셔츠는 까만색으로 바뀌고 얼굴에는 석탄 먼지가 덕지덕지 앉았다. 아마 그 시기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시골마을 공무원 사회의 이상한 인사제도

첫 발령지인 고한읍 사무소. 내 담당업무는 지역 동향관리였다.
 첫 발령지인 고한읍 사무소. 내 담당업무는 지역 동향관리였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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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이나 시청 단위는 과(課)라는 부서가 있었지만, 읍 단위 기관에 과(課)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당시 정부에서 읍면 단위 인구가 4만 명을 넘으면 과(課)를 조직할 수 있도록 법제화 했기 때문이다.

군과 읍면 단위 계장들의 직급은 6급이다. 그런데 과장도 6급이란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군청 근무자 중 소위 '끝발' 있는 부서 직원이 7급에서 6급으로 진급하면서 과장으로 내려왔다. 그런 이상한 제도 때문에 고참 계장들과 마찰도 많았다. 군청에서 초임 6급을 과장으로 내려 보낸 게 문제였다.

'군씨'가 따로 있고 '읍면씨'가 따로 있다는 말도 이 시기에 나왔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엔) 읍면 계장들은 몇십 년이 지나도 군청으로 들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 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군청으로 발령받는 게 마치 큰 벼슬 같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 시골마을은 다 비슷했다.

신규 발령 이후 2년 반이 지난 어느 날, 9급에서 8급으로의 진급자 명단이 발표됐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내 이름이 없었다. 40명 동기 중 36명이 8급으로 진급을 하고 4명이 누락됐다. 그 4명을 보니 동해, 원주, 춘천, 화천 등 모두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누구를 탓하겠나. 고향으로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인 강원도 화천으로 오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천진난만하던 그 아이는 지금 뭐하고 살까

당시 고한읍 풍경. 석탄먼지 때문에 출장을 한번 다녀오는 날이면 흰 셔츠는 까맣게 변하곤 했다.
 당시 고한읍 풍경. 석탄먼지 때문에 출장을 한번 다녀오는 날이면 흰 셔츠는 까맣게 변하곤 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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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꿈이 뭐니?"
"난 다음에 커서 술집여자가 될 거예요."

그 시기에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린이 놀이터를 찾았다. 다섯 살 남짓한 여자아이 혼자 그네 타는 게 눈에 띄었다. 얼굴은 땟국물로 얼룩졌고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가늠키 어려웠다. 당시 탄광마을 아이들의 부모는 대체로 맞벌이였다. 아버지는 탄광 막장에 들어가고, 어머니는 밖에서 탄을 고르는 채탄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오갈 데 없이 놀이터나 공터를 배회하는 아이들이 흔했다.

"너도 나만큼 심란하겠구나"하는 생각에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꿈이 뭔지를 물었는데, 뜻밖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어른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 탄광촌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다보니 아이에게 많은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한 번도 도시에 나가보지 못했다는 그 아이에게 화장을 진하게 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술집 여성들이 천사처럼 보였나보다. 아이가 하도 진지하게 말했기에 웃을 수도 없었다.

탄광촌에는 유독 술집이 많았다. '인생 막장'까지 왔다는 생각에 일 마치고 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는 광부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우후죽순처럼 술집들이 생겼고, 업소에서는 경쟁적으로 여성들을 채용했다. 아이들에게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익숙한 존재였다. 

아내에게 '스파이' 일을 시키다니

고백하자면, 당시 내 담당업무는 탄광 노동자 동향파악이었다. 광부들의 농성에 대비해 사전에 동향을 파악해 군청에 보고하는 게 내 업무였다. 1980년대 말 당시, 각급 도청에는 지방과가 있었고 시-군에는 내무과라는 부서가 있었다. 이들 부서의 업무 중 동향파악은 그 비중이 컸다.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농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게 당시 정부의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동향파악 업무는 담당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상부의 수직적 명령에 의해 담당자가 정해졌다. 그 일이 내게 주어졌다. 결국 인쇄소에 들러 유인물을 수거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게 내 일이었다. 위험인물로 분류된 사람들의 집 앞에 몰래 숨어 있다가 그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보고하는 것 또한 내 일이었다. 광부들의 파업 등 농성이 있기 전에 관련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면 상부로부터 심한 욕설과 무능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스파이'를 하나 만들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행히 지금의 아내가 당시 큰 탄광회사 전산실에 다녔다. 슬쩍 제안했다.

"버스 타고 출퇴근 하면서, 광부 아저씨들이 하는 말 메모했다가 나한테 알려줄래?"

아내는 죽기보다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다.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예상동향'를 만들어 보고했다. 몇 번 적중했고, 장관 표창 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 이제 이런 거 안 할래!"

자신이 내게 언급한 사람이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는 "도저히 이런 거 못하겠다"고 울먹였다. "내가 대체 뭔 짓을 하는 건가"라는 회의가 일었던 게 그 시기였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란 생각을 할 즈음 화천군으로 발령이 났다.

집에서 쫓겨난 처남, 그 이유가...

"매형, 나 고한에 살 때 집에서 쫓겨난 거 아세요?"

몇년 전, 처남은 묻지도 않은 말을 말했다. 이야기는 그의 중학교 2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어머니(지금 내 장모님)는 그에게 200여 장의 연탄을 부엌으로 옮겨달라고 말했다. 집이 골목길 안쪽에 있기에 500여 미터 떨어진 큰길에 쌓인 연탄을 나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남은 5000원을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어머니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2시간 동안 그 많은 연탄을 집으로 다 나른 뒤 처남은 어머니에게 당당히 5000원을 요구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따가 줄게"를 되풀이하며 돈을 주지 않았다. 화가 난 처남은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집에 옮겨놓은 연탄을 다시 500여 미터 떨어진 큰길가로 옮겼다. 결국 처남은 집에서 쫓겨나 3일 동안 친구들 집을 전전해야 했단다.

처남은 친구들 부모님이 눈치준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귀가했다. 장모님의 귀가 조건은 5000원 포기였다.

"하긴 연탄을 다시 길에다 옮겨 놓았으니 맞아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죠."

상전벽해, 그 많은 광부는 어디로 갔을까

현재 고한읍 시가지 풍경. 변해도 너무 변했다.
 현재 고한읍 시가지 풍경. 변해도 너무 변했다.
ⓒ 고한초등학교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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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탄광은 1989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석탄 합리화(?) 정책으로 축소하기 시작했다. 많은 주민이 졸지에 직장을 잃었다. 광부 등 많은 노동자들이 정부에 먹고 살 길을 열어달라고 숱하게 건의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길거리로 나서 농성도 했다. 결국 정선에 카지노가 들어섰다. 살길이 막힌 사람들에게 얼마나 보탬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카지노는 지금 성업중이다.

얼마 전 정선군 고한읍을 다시 찾았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있었다. 과거 탄광 경기가 최고로 활성화 됐을 때 고한에서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카지노 가려는 사람들이 고한을 많이 찾는다.

개가 돈을 물고 다닐 정도는 아니겠지만, 카지노에선 많은 돈이 오가는 듯하다. 더는 석탄가루 탓에 흰 옷이 검게 변할 일도 없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할까?

그나저나, 고한에 그 많던 광부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놀이터에서 나와 짧은 대화를 나눈 그 여자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정선 고한에 갈 때면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관광기획 담당입니다.



태그:#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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