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기는. 저쪽 색칠된 골목길 가봤지? 마을이 훤해지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아직 우리 집 앞에는 칠을 안 해서 언제 색 입히나 기다리고 있었어."
지난 13일 오전 11시 서울 염리동 서쪽 끝자락의 삼거리 언덕길. 햇볕이 내리 쬐는 좁은 골목길에 김순환(75)씨가 페인트 붓을 들고 서있다. 서울시 범죄예방디자인(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사업의 일환인 '내 집 앞 칠하기'에 동참하러 나온 길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모른 척해도 될 텐데, 일손을 보태고 싶다고 한다.
다니기 불안했던 달동네 화사하고 안전해져
'달동네'의 비중이 큰 마포구 염리동이 화사하게 변하고 있다. 서울시가 치안이 전반적으로 불안한 염리동을 2012년 범죄예방디자인(CPTED) 시범마을로 지정한 후 하루가 다르게 밝아지고 있다. 범죄예방디자인은 도시설계와 디자인으로 범죄유발 요소를 감소시키는 도시계획 기법.
우선 낙후된 주거환경 탓에 인적이 드물었던 마을 길을 1.7킬로미터(㎞)의 산책로로 만들고 '소금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소금을 나르는 부보상들이 머물러 '염리동'이라 불렸던 마을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염리동 주민자치위원회와 디자인 전문가들은 또 좁은 골목의 낡은 담벼락 마다 파랑 연두 보라 등 색을 입혀 '걷고 싶은 길'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동네 전봇대에는 1부터 69번까지 번호를 매기고 방범용 발광다이오드(LED) 번호 표시등을 설치했다. 밤길에 구조요청이 필요할 때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서울시는 또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안전지킴이 집' 6곳을 선정하고 그 부근 골목길에 인터넷으로 실시간 상황파악이 가능한 아이피(IP)카메라와 비상벨도 설치했다. 비상벨을 누르면 경보음이 울리고 안전지킴이 집과 용강지구대에 신고가 된다.
세 살 때부터 염리동에 살았다는 김예진(14·창천중)양은 "밤엔 무서웠는데 작년부터 골목이 알록달록하게 변하고 폐쇄회로 티비(CCTV)도 설치돼 어두워도 잘 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달 염리동 주민 37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소금길에 만족한다'는 의견이 83%, '범죄예방효과가 있다'는 의견이 73%로 나타났다. 경찰의 비공식집계에 따르면 지난 5개월간 해당 지구대에 신고된 강도, 절도, 성폭력 등의 범죄건수가 이전에 비해 30%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마을이 밝고 안전해지면서 환경에 무심했던 동네 사람들이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 마을이 깨끗해진 것도 큰 소득이다. 염리동 마을공동체 조용술(33) 사무국장은 지역경제가 활성화하는 효과도 있다고 평가했다.
"마을 구경 온 사람들이 시끄럽지 않냐고 물어보시는데 인적이 끊겼던 공간에 활기가 생겨 오히려 주민들이 좋아해요. 방문객들이 마을에서 음식을 사먹어 지역경제도 살아나고, 염리동에서 50년 정도 사신 분들이 관광가이드로 일해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습니다."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우리 동네 살리기'서울시가 범죄예방디자인을 염리동에 우선 도입하기로 한 것은 주민참여 공동체 활동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 디자인정책과 권은선 주무관은 "염리동은 주민자치단체 활동이 활발하고 커뮤니티 자원이 풍부해 (사업효과가 높을 것으로 보고) 범죄예방디자인 시범 마을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이 사업이 추진되기 전, 염리동에는 2008년부터 시작된 '창조마을 재생 사업'이 있었다. 몇몇 주민들이 '예술 창조활동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자'는 취지로 뭉쳤고, 염리동 마을음악회, 합창단, 연극단 등 주민 참여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이런 활동을 묶은 '소금마을 만들기'로 2011년 전국 주민자치 박람회 지역활성화 분야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조용술 사무국장은 "수상 이후 커뮤니티 활동이 소문 나면서 주민들의 참여가 더 활발해졌다"며 "현재는 양희봉 오케스트라, 연극하는 사람들, 마포 아트센터, 반찬봉사단 등 20여 공동체 기관이 마을에 들어왔고 염리창조마을축제 등 10여 개의 마을 박람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염리동주민센터 2층엔 마을문고와 '솔트카페'가 있다. 지난 2008년 개관한 마을문고는 주민들로부터 기증 받은 1만 여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올 들어 매주 토요일 염리동 아이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자들이 학습지도 등 멘토링을 해주는 '마미(마포의 미래)' 프로젝트 등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기업인 솔트카페는 커피 등 음료와 천일염 등을 판매하는 곳. 염리동에서 35년간 살았다는 이성재(59) 대표는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주민을 고용해 일자리를 제공하고 천일염도 판매해 지역 경제 활성화와 마을 홍보의 효과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반상회도 이 동네에선 부활했다. 요즘 염리동 반상회에선 마을 문화와 예술 사업을 묶어 소금을 상징화한 마을 축제 만들기를 구상 중이다. 이 축제에 관광객을 유치하면 수입 창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10년째 재개발 예정지... 불확실성 없애줘야 하지만 염리동에도 고민이 있다. 지난 2003년 재개발 예정지로 지정돼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는 방향만 나왔을 뿐 아직 아무 것도 확정된 게 없어 주민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주민 안아무개(78)씨는 "염리동이 밝아지고 깨끗해진 건 좋지만 디자인 작업보다 급한 건 재개발 여부를 빨리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오아무개(85)씨는 "세입자인 나 같은 사람은 (이사를 가야 할지) 어떻게 할지 몰라 난감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염리동 주민자치위원장 홍성택(55)씨는 "자본 논리에 얽매인 재개발 때문에 마을이 정체되면 안 된다"며 "설사 현재의 공동체 활동이나 디자인사업들이 재개발로 언젠가 (소용이) 없어지더라도 당장은 끈끈한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함께 사는 마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