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2012년 5월 9일, 결선투표 끝에 6표 차로 승리한 그는 "(여야 관계를) K1 격투기가 아닌 1등을 겨루는 육상경기로 생각하면 된다, 국가 비전과 정책의 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활발히 토론하려 한다"고 다짐했다. '박심(朴心 :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 논란에 대해 "박근혜 위원장(당시 비상대책위원장)과 정말 잘 통하지만 절대로 계파활동은 하지 않았다, 속칭 친이파 의원들과도 친하고 쇄신파 의원들의 얘기도 경청한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최대 화두로 떠오른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도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대한 신뢰를 매우 강하게 갖고 있지만 '오리지널 자본주의'가 아니라 도덕·상생·환경·박애 자본주의 등 새로운 조류를 선호한다"며 경제민주화 정강·정책 추진을 약속했다. 또 "재벌의 일감몰아주기 문제를 최초 제기한 사람은 민주당이나 진보당이 아닌 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바로, 오는 15일 자리에서 물러나는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다. 그는 딱 1년 전 기자간담회를 통해 '상생의 정치'와 '경제민주화의 흔들림 없는 추진'을 약속했다. 그러나 차기 원내대표 경선을 일주일 앞둔 9일 현재, 이 발언은 여전히 유효한 과제로 남아있다. 이 원내대표가 자신의 '약속'을 못 지켰기 때문이다.
'독설가' 면모 뽐내다 "여야 '갑을관계'로 착각하나" 비판도"이한구 원내대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독특한 자기 세계가 있다. 한술 더 떠서 보수의 시각을 원내로 끌고 들어와서 협상에 임하기 때문에 이 원내대표가 없는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이 소망이라는 얘기가 있다." 신경민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과 한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했다. '협상 파트너'였던 이 원내대표에 대한 야당의 보편적 시각인 셈이다. 지난해 대권을 놓고 여야 간 일척간두의 싸움이 벌어졌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원내대표가 대야 관계에서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이 원내대표는 취임 10일 만에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비하하는 트위터 글을 리트윗(재전송)해 논란을 빚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서 "이석기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당선자가 참여정부 시절 두번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과 특별복권을 받았다"는 내용을 리트윗하면서 "이러니 노무현 개XX지. 잘 XX다"는 한 트위터리언의 원색적 표현의 글까지 리트윗했다.
당시 야당은 "최소한의 양식마저 의심케 하는 막장 표현을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을 대표하는 원내대표라는 분이 했다니 더욱 충격이다, 국민 앞에 사죄하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력 반발했다.
그 외에도 이 원내대표의 '설화'는 계속 이어졌다. "간첩출신까지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국민분열, 불만만 키우는 민주당의 구태정치는 나꼼수나 SNS 저질행태, 심지어 학교폭력이나 묻지마 살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주장해, 야당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야당과 상호협력하며 원내를 진두지휘해야 할 사령탑이 오히려 여야 갈등만 조성한 셈이다.
대선 후 새로 출범한 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축하인사를 전하면서도 그의 독설은 빠지지 않았다. 그는 지난 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이 과거의 사고 방식에 매달리는 과격주의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믿을 수 있는 정당이 되길 바란다"며 "김한길 신임 당대표가 '원칙 없는 포퓰리즘'과 '탈레반'들을 배척하겠다고 말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민주당은 "상호존중과 협력의 여야 관계를 뒤흔드는 이 원내대표의 발언이 행여 여야관계를 '갑을관계'로 착각하는 비뚤어진 우월주의 탓은 아닌지 걱정(박용진 대변인)"이라며 사과를 촉구했다.
'김종인 태클'에 '죽어도 못한다'로 귀결, 경제민주화 후퇴 공헌?
실종된 '상생의 정치' 못지않게,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던 '경제민주화'도 흔들렸다. 이 원내대표는 비상대책위를 거쳐,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대선공약으로 떠올랐던 경제민주화에 종종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 때문에 이 원내대표는 지난해 대선 국면에서 경제민주화의 대부격인 김종인 전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도 잦은 갈등을 빚었다.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김 위원장은 이 원내대표를 향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당 지도부에) 있는 한 경제민주화가 될 것 같지 않다"면서 박 대통령에게 자신과 이 원내대표 간 양자택일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상돈·김세연·주광덕·이준석 등 전 비상대책위원들도 같은 시기 긴급 회동을 갖고 "후보의 경제민주화를 백안시하고 국민의 눈높이와 합치하지 않는 발언을 일삼은 이 원내대표의 책임이 크다"며 이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진통 끝에 상황은 이 원내대표가 박근혜 캠프 선대위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봉합됐다. "원내사령탑으로서 국정감사와 향후 예결위를 포함한 막중한 국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렇게 됐다(이정현 당시 공보단장)"는 게 이유였지만, 김 위원장과 갈등을 고려한 결정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대선 이후 판세는 뒤집혔다. 이 원내대표는 대선 이후에도 "정치민주화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우리 사회가 아무 데나 '민주화'를 붙여 놔, 이제는 매우 무책임한 인기주의 형태의 많은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4월 22일 최고위원회의)", "기업들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덜 갖도록 노력하겠다(4월 29일, 경제5단체 면담)" 등 경제민주화 속도조절론에 힘을 보탰다.
이 원내대표의 이 같은 입장은 입법 상황에 반영됐다. 4월 국회에서 불법 하도급 거래행위 규제를 위한 하도급법 개정안을 제외한 나머지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들은 6월 정기국회로 미뤄졌다. 이 원내대표는 지난 7일 열린 여야 원내대표 회동에서 "'특정금융거래정보보고·이용법안(이하 FIU법안)'과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2개를 분리 처리하자"는 요구에 "죽어도 못한다"고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감 포기 제안에 '나홀로 이동흡 비호'까지... 당내 반발 자초한 '박근혜 도우미''청와대 거수기 논란'도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정부조직개편 협상 지연과 연이은 청와대의 인사실패 과정을 겪으면서 당내에서는 당 지도부의 무기력함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 원내대표는 이 같은 논란의 전면에 있었다.
이 원내대표는 특정업무경비 유용 의혹으로 낙마한 이동흡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를 홀로 비호하는가 하면, 인사청문회 제도 개선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특히, 지난 2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는 '국회 국정감사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헌법에 보장된 입법부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자는 제안을 한 셈이다.
여야 간 정부조직개편 협상이 장기간 표류하면서 이 원내대표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물음표가 찍혔다.
이 원내대표는 협상 장기화로 '출구'가 보이지 않자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등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헌법소원 검토 의사까지 밝혀 당내 반발을 초래했다. 당초 국회선진화법은 2012년 5월 새누리당 주도로 기존 국회법을 개정해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일보>마저 사설을 통해, "대통령의 지침만 받들어 모시면서 무조건 여당안을 수락하라고 야당을 밀어붙이기만 했다, 당대표가 내놓은 협상안을 원내대표가 이끄는 협상 실무팀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중지란'까지 노출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내 불만도 고조됐다. "청와대의 눈치만 보면 국민에게 버림받을 것(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라는 당내 중진들의 지도부 비판이 시작됐다. 정부조직협상 개편 표류 당시 초선 의원들이 당 지도부의 입장을 대변한 집단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동원'된 것을 두고도 "기사 한 줄도 안 나는 일에 왜 초선들을 동원하는지 모르겠다"는 자탄도 나왔다.
민생입법 처리를 명분으로 구성한 '여야 6인 협의체'에 대해서도 이 원내대표의 '소통부재'에 대한 불만이 표출됐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새누리당 간사인 김성태 의원은 지난달 16일 확대 원내대책회의에서 "6인 협의체에서 세부적으로 법률안 처리 방안을 합의한 것은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심각히 침해하는 처사"라며 "소관 상임위의 의견도 묻지 않고 83개를 합의하는 지도부가 어디에 있느냐"고 공개적으로 따지기도 했다.
'도돌이표' 되버린 이한구의 약속들, 차기 원내사령탑 다를까?결국, 이 원내대표가 남긴 '미완의 과제'들은 차기 원내대표 후보들이 짊어지고 있다.
현재 원내대표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 이주영(4선. 경남 창원 마산합포)·최경환(3선. 경북 경산·청도) 의원 모두 ▲ 소통·상생의 여야 관계 ▲ 강한 리더십 ▲ 경제민주화 공약 실천 ▲ 상임위 중심주의 등 초선 의정활동 참여 확대 등을 약속하고 있다.
특히, 두 후보가 강한 리더십과 초선 의정활동 참여 확대를 약속한 것은 이 원내대표 탓이 크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당이 청와대의 들러리를 서고 있다는 비판과 여야 6인 협의체 등 원내지도부 중심으로 국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불만을 두루두루 감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원내대표 임기도 이 원내대표와 같이 1년이다. 1년 뒤, 새로운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이한구 원내대표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