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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생님은 잘 가르친다. 훌륭한 선생님은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선생님은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영국의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앨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가 한 말이다. 나는 이들 중 과연 어떤 선생님에 속할까. 대체 나는 아이들에게 몇 점짜리 교사일까.

 모든 아이들과 한 번씩은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아이들 모두의 이름을 외워 부른다.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서 상호 작용을 가질 때 나타나는 효과는 정말 각별하다. 사진은 영화 <완득이> 한장면.
 모든 아이들과 한 번씩은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아이들 모두의 이름을 외워 부른다.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서 상호 작용을 가질 때 나타나는 효과는 정말 각별하다. 사진은 영화 <완득이> 한장면.
ⓒ 영화 <완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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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3학년 담임 모임을 가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2차로 맥주 한 잔을 가볍게 나누는 자리에서였다. 서로 어지럽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평상시 '형님'으로도 부르며 친밀하게 지내는 선배 교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가 대뜸 내게 우리 반 아이들을 좀 더 '신경' 써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방과후 보충 때 아이들이 많이 빠져 나가서 교실이 휑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말을 내게 해주었다.

순간 울컥 하는 마음이 솟았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루 일곱 시간 정규 수업으로도 모자라 방과후에도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자리에 앉아 보충 수업을 받으라는 말 아닌가.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나는 솔직히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방과후 시간에 수업을 하지 않고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선배 교사는 사뭇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따지는 듯한 되물음이 내게 전해졌다. 교사가 기본은 해야 하는 게 아니냐. '기본'이라는 말은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그것은 상당히 많은 경우 '적당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로 기분 나쁘지 않게 '적당히' 관계를 맺으니 서로에게 그 얼마나 좋은가.

혼자만이라도 '기본'에서 좀 떨어져 있게 놔두시라

하지만 나는 그런 '기본'이 싫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지금 3학년 선생님들 모두 그 '기본'을 잘 지키고 있으니 나 혼자만이라도 '기본'에서 좀 떨어져 있게 놔두시라. 나는 혼자 아니냐. 그러니 제발 좀 가만 내버려 두시라. 형님이 생각하는 그 '기본'은 못 되더라도 나도 내 나름대로는 하고 있다. 나는 그런 말들을 줄줄이 쏟아냈다.

선배 교사는 몇 마디 말을 조금 더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단호한 내 표정과 말을 보고 듣고는 더 이상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 사이에는 거대하고 두터운 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교육 철학에 관한 한, 그와 나는 합의점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물론 나는 그의 의도를 잘 안다. 학급에 '무심'하다는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꼬투리를 잡혀서는 안 되니 좀더 신경을 쓰라는 취지였을 게다. 그걸 왜 모르겠는가. 그래서 나도 평상시에 내 나름으로 아이들을 유심히 본다. 그를 포함한 다른 선생님들의 눈에는 그것이 잘 안 보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좋거나 훌륭하고 위대한 선생님은 못될지라도 '나쁜' 선생은 되고 싶지 않다. 나쁜 선생은 아이들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다. 나쁜 선생이 관심을 갖는 아이들은 일부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는 녀석들에 국한될 때가 많다. 나머지는 '그밖'에 속해 있는 아이들이다. 당연히 그 아이들과 친밀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수업 시간에 별다른 대화를 나누거나 눈을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들 간의 관계는 철저하게 익명적이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

나는 적어도 모든 아이들과 한 번씩은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아이들 모두의 이름을 외워 부른다.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서 상호 작용을 가질 때 나타나는 효과는 정말 각별하다. 마음을 닫은 아이들이 내게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가슴 속에 담아 둔 말들을 흔연히 내놓는다. 이름 부르기로 자연스러운 신뢰 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이들에게 '꼰대' 같이 까탈을 부리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들 곁에 있어주는 교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쁜 선생은 아이들을 옥죄기만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쁜 선생은 아이들을 옥죄기만 한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놔두는 일은 위험하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와도 같이 많은 교사의 머릿속에 아주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나쁜 선생들이 철저한 통제와 정숙, 일사불란함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이에 반하는 아이들은 '공동체'를 해하는 나쁜 부류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가차없이 응징을 당하거나 반에서 배제당한다. 합법적 따돌림으로 부를 만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실제 그렇지 않은가.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수업 시간에 '땡땡이'를 치며,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무단으로 이탈하는 아이들은 반에서 교사가 가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배척한다. 그럴 때 대다수 아이는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담임도 손을 놓았으니 너는 이제 우리 밥"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퍼지지 않을까.

화이트헤드와 같은 세계적인 학자의 머릿속에는 '위대한 스승'이 되고 싶은 욕심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이나 영향력으로 보아 실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스승'의 반열에 올라 있을 것이다. 나 같은 범속한 교사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자리에 말이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그들에게 멋진 본을 보여주며,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좋고 훌륭하고 위대한 교사는 당장 내 몫이 되기는 힘들다. 대체 잘 가르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 '멋진 본'이라는 건 또 무엇이며,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나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한다'는 논리로 내 의도를 행동에 옮겨서도 안 될 것

좋고 훌륭하며 위대한 선생님?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위에서 말한 '나쁜' 선생은 결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아이들을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대접하고,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리라. 내 생각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들을 '위한다'는 논리로 내 의도를 함부로 행동에 옮겨서도 안 될 것이다. 때로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힘과 용기가 진정으로 중요할 때도 있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세종이 이 땅에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스승의 날에는 겨레의 '큰스승'인 세종의 뜻을 기리고 받들자는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세종 같은 큰 스승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교사인 우리 모두가 각자 선 자리에서 조그만 참스승이 되기 위한 성찰의 시간을 짧게라도 가져봄직하지 않은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경구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지 않는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스승의 날#성찰#교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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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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