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국가에 있어서 법률은 모든 국가작용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법률의 제·개정 및 폐지는 국회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권한이다. 19대 국회의원들이 지난 1년 동안 발의한 법안 4622건 중 295건만 가결됐다. 철회·폐기된 것을 제외한 나머지 3869건 중 상당수도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들 중에서 "제법이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실생활 속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을 바로잡는 ‘제대로 된 법안'들을 찾아내서 생생한 현장과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
"우리나라에서 여기만큼 심한 '갑을' 관계는 없을 거예요."방송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연기자는 "논란이 되고 있는 남양유업이나 편의점 업계 갑을 관계의 경우, 한계가 있긴 하지만 가맹사업법('프랜차이즈법')이 존재하고, 또 현재 개정안이 통과되면 대리점주에 대한 보호가 더 강화될 수 있다"면서 "하지만 방송산업에 종사하는 제작자와 연기자들을 '슈퍼갑'인 방송사로부터 보호하는 법은 전무하다"고 말했다.
최근 이들 연기자들을 보호하는 법안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방송계 갑을 관계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바로 박창식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대중문화예술산업 발전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다. 이 법안에는 스태프(제작자)와 연기자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표준계약서 제정 근거 조항이 담겼다. 문화부는 표준계약서 초안을 마련했지만, 방송사의 반대가 심한 상황이다.
이 법안은 연예계의 대표적인 병폐인 연예기획사의 횡포를 막는 장치도 마련했다. 연예기획사 등록제를 통해 무분별한 연계기획사의 설립을 막아 연예인 지망생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법은 또 성매매를 알선·권유하거나 유인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제2의 '장자연 사건'을 막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표준계약서 제정] "'인간 바리케이드' 뒤에서 소변... 이제 바뀌나"출연료 미지급, 쪽대본, 밤샘촬영, 사고방지….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제작진과 연기자들이 겪는 문제다. 오래전부터 관행이 이어져왔지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기자는 "한국의 드라마는 내용이 막장이기에 앞서 제작 여건이 막장"이라고 말했다.
"제대로 준비가 되지 못한 상황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다보니, 연기자들은 자기가 뭘 찍는지도 모른 채 연기를 한다. 부족한 제작비로 연기자들을 많이 쓰지 못해, 드라마 내용에 결손가정이나 이혼가정이 많이 나온다.세계 유일의 드라마 제작 현장일 것이다. 생활도 막장이다. 생활 연기자들은 빚내서 기름값, 식대, 숙소비용을 충당한다. 하지만 출연료 미지급으로 돈을 못받으면, 가정 불화가 생길수밖에 없다."또한 문제갑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정책위의장은 "화려한 한류 드라마 뒤에는 화장실도 없는 촬영 현장에서 일하는 연기자들이 있다, 동료들을 바리케이드 삼아 소변을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악한 제작 환경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 의장의 말이다.
"방송사는 외주제작사에 실제비용의 절반가량의 비용으로 드라마를 만들도록 한다. 2억 원 정도의 제작비가 필요하다면, 1억 원 이하로 제작하라고 하는 식이다. 편성권을 가지고 있는 방송사가 '1억 원으로 드라마 만들래, 말래?'라고 하면, 외주제작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다. 방송사는 폭리를 취하고 외주제작사는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제작진과 연기자들에게 갈 수박에 없다."한 외주제작사 프로듀서도 거들었다. 그는 "드라마 1회 당 TV광고수입만 3억 원 수준이다, 하지만 방송사는 외주제작사에 1억2000만~1억3000만 원만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간다"며 "또한 외주제작사가 드라마를 만들어도 해외 판권 등이 포함된 저작권은 방송국이 가져간다, 방송국은 앉아서 배만 채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그나마 계약서가 없는 곳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드라마 제작 환경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면, 외주제작사는 일주일에 72분짜리 드라마 2회를 만든다. 한 외주제작사 프로듀서는 "일주일에 보통 영화 한 편을 만든다고 보면 된다, 일하는 제작진과 연기자들은 어떤 상황이겠느냐, 밤새 일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의 공정한 수익 배분이 이뤄지면 제작진과 연기자들의 열악한 대우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간의 공정거래를 담보하기 위한 표준 계약서를 제정하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진행돼왔다. 박창식 의원이 표준계약서 제정 근거 조항을 담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지원법안을 내자, 문화부에서는 표준계약서 제정하기 위한 의견수렴에 나섰다. 그 결과물이 '방송프로그램 제작 표준계약서'와 '방송출연 표준계약서'다.
방송사-외주제작사의 제작 표준계약서는 방송사가 일방적으로 저작권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제작사와 방송사가 부담하는 제작비 세부 내용을 공개하도록 해, 방송사의 일방적인 '제작비 후려치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출연 표준계약서에는 15일 내 출연료 지급, 최대촬영시간 제한, 휴식시설 제공 등 연기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다른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표준계약서가 제정되면 캐스팅이나 제작비는 생각하지 않고 '이번 작품도 저번 작품 가격에 맞춰라'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방송사와 제작사가 예산을 합의하고 그에 따라 권리를 배분한다면 '윈윈'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제작비 부족으로 출연료 미지급 사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꼭 익명으로 해주세요"... '을의 반란' 포기한 연기자·제작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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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기자는 드라마 막장 제작 현장을 찾을 계획을 세웠다. 현장에서 스태프(제작자)와 연기자들의 고충을 듣기 위해서였다. 노조, 연기자협회, 제작사협회 등 여러 방법으로 섭외를 요청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취재해주는 것은 고마운데, 인터뷰는 어렵다"는 것이다. 방송사의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불합리한 '갑을(甲乙)'관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상황에서, 이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오판이었다던 셈이다. 업계에서 방송사는 '슈퍼갑'이다. "찍히면 죽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대리점주들처럼 '을의 반란'을 꿈꿀 수 없는 여건이다.
한 연기자는 "방송사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당장 제작현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며 "방송사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방송연기자협회 관계자 역시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러 차례 작심발언을 했다가 일거리가 크게 줄어서 어렵게 살고 있다"며 "최근에야 겨우 작은 배역 하나를 얻었는데, 업계와 관련된 얘기를 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밝혔다.
취재 일주일동안 가까스로 연기자와 외주제작사 프로듀서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었다. 이들은 말미에 이런 얘기를 했다. "꼭 익명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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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기획사 등록제] 연예지망생 성폭행 사건, 없어질 수 있을까?
올해 상반기 연예계를 다룬 뜨거운 이슈는 바로 성범죄다. 인기 그룹 <룰라> 출신의 가수 고영욱씨는 지난 4월 미성년자 성폭행·강제 추행 혐의로 징역 5년의 실형을 받았다. 전자 발찌 10년 부착 명령도 받았다. 고씨는 이들에게 "음악 프로듀서다, 연예인 시켜주겠다"고 속여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기 배우 박시후씨도 성범죄 사건에 휘말렸다. 박씨는 지난 2월 후배 소개로 만난 연예인지망생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피소를 당했다. 5월 이 여성은 박씨에 대한 고소를 취하면서, 박씨는 가까스로 '성폭행 혐의'에서 벗어났다. 지난 2월에는 연예인 지망생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장석우 오픈월드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항소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지난 2009년 신인 여배우 장자연씨가 성접대 의혹 속에서 자살한 이후, 여성 연예인 지망생이나 신인 여배우에 대한 성범죄가 근절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장자연 사건 이후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연예기획사 등록제를 마련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18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낸 나경원·최문순 전 의원이 선출직에 나서는 바람에, 법안은 더 논의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박창식 의원 발의 법안에 연예계가 적잖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법안에는 연예기획사의 문화체육관광부 등록제를 규정하고 있다. 등록된 정보를 바탕으로 종합정보시스템을 마련해, 연예인 지망생들에게 쉽게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성매매를 알선하거나 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김길호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 사무국장은 "누군가가 사무실도 그럴듯하고 만들어놓고 '나는 유명 연예인 매니저'라고 하면, 연예인 지망생들은 확인할 길이 없다"면서 "등록제가 이뤄져 기획사의 정보가 공개된다면, 지금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100%는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예인들도 기획사 등록제를 역설했다. 아이돌그룹 SS501 출신의 가수·연기자 김형준씨도 지난 2일 공청회에 참석해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창식 의원은 "(연예계 성범죄 사건은)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것 아니냐"면서 "기획사의 연습생과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불법행위 등을 근절하기 위한 법제도적 기반이 매우 허약한 실정인 만큼, 법안이 통과되면 연예기획사의 횡포가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과 문화부는 올 연말까지 법안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대중문화발전법 주요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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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지원법은 연예인이나 연예인 지망생에 대한 연예기획사의 횡포 방지, 방송국와 외주제작사 간의 공정한 거래 확립, 방송 스태프(제작진)과 연기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방송국 프로듀서(PD) 출신으로 외주제작사 김종학 프로덕션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던 박창식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8월 발의했다. 법안의 주요 내용이 다음과 같다.
8조 : 대중문화예술산업의 공정한 영업질서 확립을 위하여 표준계약서를 마련하여 사용을 권장할 수 있다.
17조 1항 : 대중문화예술사업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여 대중문화예술인에게 대중문화예술용역과 관련된 이익의 제공이나 불이익의 위협을 통하여 성매매 등을 알선-권유하지 못하도록 한다.
18조 :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대중문화예술인, 대중문화예술제작물스태프 및 대중문화예술 기획업 종사자의 권익보호를 위한 지원센터를 실립할 수 있다.
19조 :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대중문화예술산업의 공정한 거래질서의확립을 위한 정책의 수립-시행을 위하여 대중문화예술산업 및 대중문화예술산업 종사자에게 대한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27조 :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을 하려는 자는 일정한 자격, 등록 요건을 갖춰어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등록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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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발전법②] "드라마 스태프 혹사... 외국이면 구속감"[대중문화발전법③] "장자연 다룬 <노리개> 씁쓸... 언제든 재발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