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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장면①] 가끔 소방훈련을 한다. 그리고 훈련 개시 전에 각자 해야 할 매뉴얼이 돈다. 들어온지 한 달 밖에 안된 신참의 이름도 명기된 이 매뉴얼에는 고참인 내 이름이 아예 없다. 그래서 회의할 때 우스개로 말했다.

"내가 명단에 없으니 유령인간 같아요! 못 들어서 소방훈련이 되움이 안 되지만 붕대를 감고 화상 입은 환자 역할은 할 수 있으니 명단에 넣어주세요."

[장면②] 최근 나는 OO미술대전 심사를 하고 왔다. 경력이나 이력으로 하자면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했어야 할 과정이었는데, 단지 못 듣는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러다 작년에는 내가 직접 입을 열고 주최 측에 말했다.

"제가 못 듣지만 비장애인 회사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하고 비장애인들을 교육하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선정한 작가인데 대체 작품심사에 그게 무슨 걸림돌이 된다고 배제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촉망받던 작가였던 난 왜 다른 길을 택했나

 간혹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장애인을 한 번 더 실망시키기도 한다.
간혹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장애인을 한 번 더 실망시키기도 한다. ⓒ sxc

우리 사회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표현을 해야만 최소한의 존재감이 인정된다. 소수를 배려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이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일 뿐이다. 대다수는 살기 바빠서, 자신이 또는 자신의 가족이나 절친이 차별받지 않으면 차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은연중에 자신도 차별하는 집단의 하나가 되고 만다.

난 39살 때까지만 해도 붓을 잡고 줄기차게 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20여 년간 연구실을 운영해 문하생도 제법 많았고 예술의 전당을 빌려 성대하게 개인전도 치렀다. 한 해에 세 개의 도시에서 대상 시상식이 진행됐는데, 시상식 날짜가 같아 엄마와 언니가 각각 대리수상을 한 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개인전 이후 내가 해마다 본격적이고 왕성한 작품들을 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개인전 이후 나는 10년 가까이 개인전을 하지 않았다. 내 길을 멈추게 만든 새로운 세상에 풍덩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그냥 두고 지나치면 다른 사람이 넘어질 큰 돌일 수도 있고 구덩이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세상을 그냥 두고 지나치면, 자꾸 뒤돌아보게 될 것 같은 불편함이 들었다. 그때는 그 구덩이에 계속 빠질 여성이나 장애인들을 생각했었겠지만 지금 뒤돌아 보니, 내 마음에 앙금을 남기지 않기 위한,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느낀다.

그 세상에 들어가서 활동하며 내가 들은 차별의 소리는 두 가지였다. 비장애인 세상에서는 "왜 비장애인 작가로 활동하면 되는데 굳이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러지? 봉이 되고 싶은건가?" 장애인계에서는 " 대체 저 사람은 우리 쪽에 속한 사람이야? 아니면 일반사람이야?" 등등.

내가 받았던 차별은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학원에 컴퓨터를 한 대 갖다 놓고 회원들을 조직하고 비영리민간단체 창립을 위해 일하면서 컴퓨터 전공을 한 간사를 구했는데, 간사는 컴퓨터의 귀재였다. 출중한 미모의 그녀가 괜찮은 봉급을 주는 회사를 마다하고 내 손을 잡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녀가 다니던 회사 사람들이나 회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척추측만, 후만증이 있는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곤 했다. 그녀는 매일 시선차별을 받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해 일하고 싶었단다.

말 없는 차별 시선은 화살이고 비어와 속어가 들어간 시선은 독화살이다. 어느 것이든 그녀는 깊게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비영리민간단체를 법인으로 키워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단체를 한창 운영했을 때 그녀와 비슷한 척추측만증과 골형성 부전승으로 양목발을 짚는 아이 엄마가 울면서 찾아왔다. 자기 아이와 유치원 소풍을 갔는데, 다른 아이가 자기모녀를 보더니 "엄마! 저 사람들은 사람이야? 동물이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 엄마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쳐다보지 말고 그냥 가자!"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고 한다.

원하지 않았던 장애를 입었지만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던 그녀는 졸지에 사람인지 동물인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자존감이 흔들렸고 자신감에 상처 입었다. 그 이후 성폭력상담도 하던 우리 단체는 청주시내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상대로 장애인식개선운동을 했다.

내가 청각장애로서 받았던 차별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또는 단체운영을 할 때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지금이나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고의적인 차별보다 임의적으로 순간 발생하는 차별이 더 많고 그것은 차별이라기보다 그냥 서로의 다름과 차이에서 생긴다. 이는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학습을 서로가 미리 준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지공공기관도 비장애인을 먼저 뽑는 게 현실

ⓒ sxc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공공기관도 직원을 채용할 때는 서비스를 할 때 지장이 없는 심신건강한 자와 여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우선 뽑는다. 반면 하루에 한 마디도 할 필요 없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회사들이나 전자파가 많이 발생하는 전자제품 생산업체 같은 경우 장애인들을 많이 뽑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혹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장애인을 한 번 더 실망시키기도 한다. 이는 겉치레이 집중하는, 본질의 알참보다 성과위주의 속도경쟁의 벌이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발생한다.

가령 고속도로 요금소나 중소기업에서 장애인할당고용율을 채우기 위해 여성장애인을 급하게 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늘진 얼굴로 되돌아온다. 고속도로 요금소에선 장애인을 구하되 겉으로 장애인 표시가 안 나는 사람을 구하고, 중소기업은 순발력있고 회의할 때 지장이 없는 장애인들을 구한다.

이것은 '나' 중심의 우리 사회 흐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우리사회는 이 차별이란 괴물을 점점 더 거대하게 키우고 있다. 이 괴물은  나나 내 가족이 사고를 당했을 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위협을 할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차별'이란 괴물이 점점 작아져, 아예 없어지는 날이 오길 기다려본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의 '혐오' 나의 '차별' 응모기사입니다.



#차별과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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