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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중 한산한 서울거리(1951. 4. 29. 시청 앞 태평로)
한국전쟁 중 한산한 서울거리(1951. 4. 29. 시청 앞 태평로) ⓒ NARA

입대지원서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한 며칠 뒤인 7월 초순 어느 날, 최순희는 학교에서 비상연락을 받고 등교했다. 그날은 수업을 전폐하고 강당에서 미 제국주의와 매국역적 리승만 괴뢰도당 규탄대회가 열렸다. 강당 이곳 저곳에는 벌써 대회명과 이런저런 붉은 구호 등을 쓴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그날 학교강당을 메운 학생들 사이에 새로 생겨난 여맹 산하 세포위원과 그새 인민위원회에 포섭된 몇 선생님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서성거렸다. 강당에서 규탄대회가 시작되자 완장을 두른 이들이 번갈아 등단하여 외쳤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우리는 악랄한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인 매국역적 리승만 괴뢰도당들을 쳐부숴야 합니다!"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전선으로 나가는 영광스러운 인민의용군 대열에 우리도 동참합시다!"
"미제와 그 앞잡이 주구들을 이 땅에서 몰아냅시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일제의 홍보로 '귀축영미(鬼畜英米)'라고 부르던 미국(米國)을 해방이 되자, '해방의 은인'이라는 최대의 찬사와 함께 쌀 '미(米)' 대신 아름다울 '미(美)'로 바꿔 미국(美國)으로 불렀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하자 순식간에 붉은 완장을 두른 이들이 '미제' '강도 미제국주의' '침략자 미제' 등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매국역적 괴뢰 리승만'으로 부르는 등, 가장 험악하고 야비한 말로 서슴없이 그들을 퍼부었다.

대부분 시민들은 조변석개한 염량세태에 얼떨떨하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다만 변함없는 북한산을 쳐다 보며 시절을 한탄했다. 그야말로 두보의 시구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였다. 하지만 총구 앞에 목숨을 부지하고자 그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물들어 가거나, 평소 그들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에 동조하는  등, 그때 인민군이 진주한 서울은 온통 붉은 물감으로 물들고 있었다. 참 더럽고 치사하고 간사한 게 사람들의 삶이요, 마음이었다.

그날 단상의 붉은 완장들은 '강도 미제', '매국 역적', '괴뢰 도당', '영용한 조선인민군' 등 이런 말들을 거침없이 뱉으며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곧 장내 분위기가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이때 단상에서 붉은 완장을 두른 이가 부르짖었다.

"우리 모두 조국 해방전쟁을 수행하는 용감무쌍한 인민의용군 대열에 지원합시다!"

단하에서는 그 선동에 호응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주로 세포위원이거나 이미 그들에게 포섭된 이들이었다.

"찬성이요, 찬성!"
"찬성이오!"

그러자 붉은 완장을 두른 이는 인민의용군 입대지원서를 쳐들고 외쳤다.

"그럼, 찬성하는 사람은 여기 나와 입대지원서에 서명하시오. 적집자간호학교 학생들은 총을 들고 싸우는 게 아니라 전후방 병원에서 영용한 우리 조선인민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일을 합니다. 이는 적십자정신에 부합하는 일로 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된 일입니까? 우리는 조국해방전선에 간호전사로 동참합시다!"

한 학생이 앞에 나가 연단 위에 놓인 인민의용군 입대지원서에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단상의 붉은 완장으로부터 그는 영용한 인민군 전사로 받들어졌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입대지원서를 쓰고자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원자가 점차 늘어났다. 곧 대열을 이루었다. 최순희도 그날 그 분위기에 휩싸여 인민의용군 입대지원서에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었다.

붉은 완장

서울시인민위원회에서는 다른 여학교 학생보다 부쩍 적십자간호학교 학생들의 인민의용군 입대를 더 독려했다. 이는 적십자간호학교 학생들은 간단한 교양교육 이수 후 별다른 주특기 교육 없이 곧바로 실전에 간호병으로 투입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이튿날 순희가 인민의용군 지원병 소집장소인 용산 집결지로 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굳이 따라나섰다. 순희는 절름거리는 아버지가 가여운 나머지 집 앞에서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했건만 부득불 안국동 전차정거장까지 따라왔다.

"내 이제까지 살아도 계집애가 군대 간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 얘, 순희야. 너 그만 주저앉으면 안 되니?"
"어머니, 해방된 인민공화국 세상은 남녀가 완전히 평등한 세상으로, 모든 일에 남녀가 따로 없대요."

"얘,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를 하니?"
"정말이에요."

"뭐?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세상이 온다고, 아이구 세상에 … 아무튼 천지개벽할 소리다."
"어머니, 정말이래요. 그리고 저는 전쟁터에 나가도 총 들고 싸우는 게 아니고, 부상당한 조선인민군 전사들을 치료하는 간호병으로 가요. 그래야 나중에 큰 병원에 취직도 할 수 있을 거예요."

"하긴 그렇다. 우리 같이 돈도 빽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아무 공도 없이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없을 거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어머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나 어머니 딸이잖아요. 그리고 이번 조국해방전쟁은 올 8월 15일 안으로 끝난대요."

"이것아. 아무튼 꼭 살아와야 해. 네가 우리 집안을 일으켜야 해. 네 동생들 까막눈을 네가 면해 줘야 해."
"알았어요. 어머니."

"아무 일에나 끼어들지 말고, 그저 높은 사람 말씀 잘 들어."
"아, 알았다니까요."

그새 동 인민위원으로 뽑혀 붉은 완장을 두른 아버지가 뒤따르며 말했다.

"얘, 순희야. 너 참 잘 생각했다. 이제 곧 우리 같이 가난하고 못 배운 노동자 농민의 세상이 온다고 한다. 나도 나이가 젊고, 이 몸이라도 인민군대에서 받아준다면 의용군에 나가 주먹밥이라도 만들고 싶다. … 아, 임자는 조국해방 전선으로 나가는 애한테 그 뭔 잔소리여."
"아버지는 역시 인민의 편이에요."

"그럼, 누구나 다 잘사는 평등한 세상이 온다는데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인민공화국에서는 그동안 소작하던 농사꾼들에게 땅도 거저 나눠준다고 하더구나. 우리나라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 아니냐? 이 얼마나 신나는 세상이냐?"
"여보! 적당히 좋아하시구려. 너무 좋은 일은 곧 화가 따르기 십상이라요."

"임자는 우리가 그동안 없다고 구박받고 살아온 게 억울치도 않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요. 아무튼 좀 더 두고 봐야지요. 그저 이 난리 통에는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게 상수라요."

 한국전쟁 중 서울 역(1951. 3. 19.)
한국전쟁 중 서울 역(1951. 3. 19.) ⓒ NARA

금가락지

"얘, 순희야. 너,  나 좀 보자."
"네, 어머니."

순희 어머니는 안국동 쪽 골목길로 순희를 끌고 가더니 속곳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내가 시집올 때 네 외할머니가 주신 거란다. 이 주머니 속에 쌍 금가락지가 들어있다. 이거 너 줄 테니 몸에 잘 지니고 있다가 네 목숨이 위태할 때 요긴하게 쓰라."
"어머니! 나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아니다. 내가 너보다 세상을 더 살았는데…. 잔말 말고 받아 잘 간수해라. 네 외할머니가 나 시집 올 때 이걸 나에게 주며 사람이 살다보면 죽을고비가 몇 차례 있다고 하였다. 그때 쓰라고 하더라. 다행히 나는 그런 고비를 잘 넘겨 여태 이걸 그대로 지니고 있다만, 네가 전쟁터로 간다니까 아무래도 너에게 그런 고비가 닥칠 듯싶다. '황금은 귀신을 부려서 맷돌도 돌린다'고 네 외할머니가 늘 그러셨다. 서양사람들도 '돈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면 굳게 닫힌 문도 활짝 열리게 마련이다'고 한다더라."
"아이, 어머니도…. 저는 간호병으로 나가는데, 저에게 그런 일은 없을 거야요."

"아니야. 이것아,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팔잔 겨. 전쟁 때는, 군인들이 총을 드밀면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다. 그래도 이 금붙이를 지니고 있으면 때로는 생명 줄이 될 수도 있을 거다. 더 이상 잔말 말고 가져 가."
"그렇다면 엄마가 더 필요할 거야요."

"아니야.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다. 그리고 말이다. 여자는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목숨이고, 그 다음은 정조다. 내가 무슨 말하는 줄 넌 알아들었지. 어떤 경우든 넌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다."

순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인민의용군 입대

순희 아버지 최두칠은 길가 전신주를 잡고 서서 역정을 냈다.

"아, 모녀간 내 모르는 뭔 밀담이 그렇게 길어!" 
"우리 여자끼리 나누는 얘기야요."

최두칠은 일제 말기 서울로 오기 전에 강원도 홍천에서 남의 집 머슴으로 살았다. 어느 날 순희 외할아버지 오칠복 구장이 이웃 마을 상갓집 문상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만취된 채 섶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헛 짚어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걸 최두칠이 건져준 인연으로 그만 그 집 사위가 되었다. 그 뒤 최두칠은 젊은 날 원주에서 중앙선 철도 놓은 일을 하다가 그만 비계목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서울로 온 뒤 일본인 이발사 밑에서 손님 머리를 감겨주며 이발 기술을 배운 뒤 원서동 문간방 곁에다가 무허가 간이이발소를 차렸다. 이발소가 허름한 탓으로 주로 가난한 주민들이나 행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얘, 순희야. 너 참 장하다. 어찌 이런 장한 일을 생각했니?"
"아버지, 저만 가는 게 아니라 저희 학교 학생 가운데 여러 명이 가요. 숙명, 진명, 이화 같은 여학교에서 수태 간대요."

"그래? 아무튼 너 잘 생각했다. 우리 딸 참 장하다. 어이 몸성히 다녀오너라. 너 덕분에 우리 집은 자랑스러운 인민의용군 용사의 집이 될 거다. 암, 큰 사람이 되려문 큰 물에서 놀아야지."

안국동로타리 전차 정거장에서 순희 어머니는 막 도착한 전차에 오르는 딸에게 새벽에 일어나 지은 찰밥을 싼 보따리를 건네주며 훌쩍거렸다.

"순희야, 아무튼 총알 요리조리 잘 피하고 몸 성히 돌아오너라."
"잘 알았어요, 어머니.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내 딸 최순희 만세다!"

최두칠은 안국동전차정류장에서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전차를 타고 떠나는 딸을 환송했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순희는 전차 안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1951년 5월, 중국군 춘계 공세로 폭파된 한강철교 아래 널빤지 부교를 만들어 3차 피난길에 떠나는 서울시민들(1951.5. 29. 한강).
1951년 5월, 중국군 춘계 공세로 폭파된 한강철교 아래 널빤지 부교를 만들어 3차 피난길에 떠나는 서울시민들(1951.5. 29. 한강). ⓒ NARA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알림] 저는 이 글을 연재하면서 양심에 따라 당시의 모습을 적확하게 그리고자 합니다. 그동안 작품의 배경을 현장 답사하거나, 관계 문헌을 뒤적이거나, 한국전쟁을 체험한 여러 어르신의 증언, 고증, 감수 받은 것을 바탕으로 심혈을 기울여 집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60년 전의 일들이라 독자 여러분의 체험이나 기억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 글을 읽으시다가 혹 그때의 사실과 전혀 다른 부분이 있다면 댓글이나 쪽지로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확인한 뒤 보완정정토록 하겠습니다. 저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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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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