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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인민군의 첫 교전

개전 후 인민군은 서울을 사흘 만에 점령했지만 미처 예상치 못한 국군의 한강다리 폭파로 남진 속도가 주춤하였다. 그들은 서울에서 사흘간 머물면서 전황을 관망한 뒤 곧 한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7월 3일에는 국군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했다. 그와 동시에 그날 수원과 인천도 점령했다. 인민군이 이들 도시에 진주했을 때는 유령의 도시처럼 텅 비어 있었다.

국군은 전 지역에서 남침하는 인민군에게 제대로 대항치 못한 채 후퇴하기 바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 수뇌부가 북한 인민군에 대한 정보와 실상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국군 수뇌부는 인민군이 감히 전면으로 남침해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오산에서 최초로 교전한 미군 스미스부대는 애초부터 인민군을 '농민군' 정도로 형편없이 깔보았다. 그들은 인민군이 전선에서 미군을 보기만 하면 지레 겁먹고 도망갈 것으로 착각했다. 그 무렵 미군은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독일군과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이제 그들이 세계 최강이라는 자만심에 한껏 빠져 있었다.

7월 1일 미 제24사단 스미스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은 일본 후쿠오카에서 C-54 수송기로 부산에 도착한 뒤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는 전투에 앞서 큰소리를 쳤다.

"북한군 따위는 문제도 안 된다. 오늘 밤(7월 5일)에 수원까지 진격하겠다."

하지만 스미스부대는 단 한 차례 전투에서 540명 병력 가운데 15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박격포 등 주요 공용화기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과 인민군의 첫 전투는 미군의 참패로 끝났다. 이는 마치 미꾸라지에게 좆 물린 꼴로 세계인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웃음거리를 제공했다.

한국으로 급파된 미군이 부산항 부두로 상륙하고 있다(1950. 8. 6.).
 한국으로 급파된 미군이 부산항 부두로 상륙하고 있다(1950. 8. 6.).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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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작전권

미군의 이런 졸전은 오히려 인민군들의 사기만 높여주었다. 이 전투로 인민군은 미군에 대한 공포감에서 말끔히 벗어났다. 그때부터 인민군은 국군에 이어 미군도 우습게 여겼다. 피차 상대를 깔보는 교만은 곧 재앙을 몰고 오기 마련이다.

첫 교전에 망신을 당한 미국은 그제야 비로소 인민군에 대한 전력을 제대로 파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6일과 28일에 긴급 소집된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7월 7일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유엔군사령관에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임명되었다. 곧이어 자유진영 연합국의 병력이 속속 도착하여 마침내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호주·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영국… 등 16개국 군대가 참가했다. 유엔군은 공군의 98퍼센트, 해군의 83퍼센트, 지상군의 88퍼센트가 미군이었다. 무늬는 유엔군이지만 사실은 미군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엔안보리에서 한국 원조안을 가결하고 있다(1950. 6. 28.)
 유엔안보리에서 한국 원조안을 가결하고 있다(1950. 6. 28.)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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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제외한 다른 참전국 병력은 유엔군에 배속되면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지휘를 받았다. 7월 16일, 국군이 계속 인민군에게 밀려 지리멸열 후퇴를 거듭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권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겼다.

7월 20일, 호남과 영남으로 갈리는 교통의 요충도시인 대전이 인민군에게 맥없이 함락되었다. 대전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에게는 뼈저린 패배였다. 대전전투에 참가한 미 제24사단 3900여 명 가운데 1100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대부분 군장비도 빼앗겼다. 더욱이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마저도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인민군은 대전을 점령한 뒤 다시 파죽지세로 남하를 계속하여, 7월 말에는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만 조금 남겨두고 남한의 전 지역을 점령했다.

제공권

그 무렵 한반도 지상은 인민군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과 바다의 사정은 달랐다. 미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실하게 쥐고 있었다. 개전 초기부터 미 폭격기들은 한반도 전역을 자기네 안방처럼 누볐다.

미군 폭격기들은 전투지역뿐 아니라, 후방 깊숙한 북한의 흥남비료공장, 평양철교를 비롯한 철도시설, 원산, 함흥 등지의 공장 및 항만시설들을 무차별 폭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에서 낙동강에 이르는 300여 킬로미터의 인민군 병참선을 끊다시피 하늘을 휘젓고 다녔다.

미군 폭격기의 공습으로 초토화된 흥남 공장지대(1950. 11. 6.)
 미군 폭격기의 공습으로 초토화된 흥남 공장지대(1950. 11. 6.)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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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는 인민군 신병교육대에서 기초 전투교육을 받았다. 그는 기초 전투교육이 끝나자 주특기 심사 분류에서 나이도 어리고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위생병 병과를 배정받았다. 다시 1주간 단기 주특기 위생병교육을 별도로 받았다. 이들 교육 훈련이 모두 끝나자 다른 병과 신병들과 함께 그날 밤 전선부대로 떠났다.

그들은 미군 폭격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주로 야간에만 이동했다. 오백여명 신병들이 대전에 이른 것은 7월 31일 새벽이었다. 대전에 있었던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신병 가운데 사백 명을 주공격선인 낙동강전선에 투입했고, 나머지 일백 명은 호남 쪽으로 진격 중인 인민군 제4사단과 제6사단으로각각  배치했다.

마두영 상사

대전역 이남은 철도 파괴가 심한 탓에 전선으로 가는 신병들은 8월 1일 밤 황간까지는 트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황간에서부터는 야간 트럭 이동조차도 위험하다고 한밤중 행군으로 남하했다. 신병들은 밤을 새워 행군한 끝에 추풍령을 넘어 이튿날 새벽녘 김천에 닿았다.

김천 시가지 밖 한 중학교에는 그 무렵 인민군 임시전선보충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병들은 그 보충대에서 이른 아침밥을 먹은 뒤 각 교실로 흩어져 밤샌 행군으로 못 잔 잠을 보충했다. 그날(8월 2일) 낮 11시 30분에 기상하여 곧장 점심을 먹은 뒤 신병들은 다시 배치받은 각자 전선부대로 출발했다.

임시전선보충대에서 상주 방면의 제13사단, 선산 해평 방면의 제15사단으로 각각 120명씩 배치되었고, 남은 160여 명은 가장 병력 손실이 많았던 낙동강 최전선 왜관 다부동에서 전투 중인 제3사단으로 배치되었다. 김준기는 제3사단 야전병원에 배치되었다.

제3사단 신병들은 병력을 보충 받고자 대기 중인 제3사단본부 인사 담당관 마두영 상사(북한군 하사관계급)에게 인계되었다.

"동무들, 요기(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수. 요기서 대구와 부산은 기러케(그렇게) 멀디 않아. 동무들이 대구와 부산을 해방시키는데 영광스런 선발대가 되라우…."

마 상사가 일장 훈시를 했다. 그런 뒤 그는 신병을 인솔하여 앞장서고는 곧장 전방부대로 떠났다. 신병들은 행군 중 낯선 전방 접적지역이라 긴장했는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미군 폭격기들이 인민군 진지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1951. 1.).
 미군 폭격기들이 인민군 진지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1951. 1.).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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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 속의 행군

1950년 여름은 30년만의 더위라고 했다.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뙤약볕 열기로 김천시가지를 벗어나자 곧 신병들은 등허리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마 상사는 한 시간 정도 행군한 뒤 인솔 전사들을 길섶에서 쉬게 했다. 그러면서 그는 휴식시간에 온몸을 위장하라고 지시했다.

"미제 조종사 아새기들은 솔개 눈깔인지 하늘에서두 용케 인민군복을 알아봐 야. 솔개란 놈은 하늘을 날면서도 쪼그만 눈으로 땅 위의 쥐도 잡고 심지어 땅바닥을 기는 뱀까지도 잡는대서. 동무들이 미제 쌕쌕이에 살아남으라믄 아무튼 철저히 위장하라 야! 기러치 안으믄 옆 동무까디 피해를 주디."
"네, 알갓습네다!!!"

신병들은 그 말에 도로 가까운 산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워낙 메마른 산이라 위장할 풋나무도 마땅치 않아 야트막한 산을 한참 헤맨 뒤에야 칡넝쿨을 구해 온몸을 칭칭 감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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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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