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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코리아연구원과 공동으로 2회에 걸쳐서 미국 빙행턴 대학교의 이윤경 교수와 캔사스대학교의 김창환 교수가 참여하는 '재미학자가 바라본 한국사회 진단'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첫번째로 이윤경 교수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말]
한국 국민은 한국 정치 제도에 대한 불신이 깊다. 민주화를 성취한 지 23년,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룩해 왔음에도 상당히 자기 비판적이다. 한국인의 정치 제도에 대해 회의적 시각은 세계의식 조사(World Values Survey)나 아시아 바로미터 조사(AsianBarometer Survey)와 같은 국제 비교 자료에서도 잘 나타난다. 반면, 필자가 일하고 있는 미국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국의 정치 제도에 대한 신뢰가 과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국민의 기대감에 벗어나 있는 한국의 정치 현실

그러나 정치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 정도가 그 제도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민의 높은 신뢰를 받는다고 해서 미국의 정치 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에드워드 스노든이 내부 고발한 내용처럼 미 국가안보국이 개인 간 이메일 및 전화 교신 내용을 수집하고 감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미국과 한국, 둘 다 나름의 문제가 있어도 국민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는 지점이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즉, 한국 국민이 정치 제도를 강하게 불신한다는 것은, 한국의 정치 제도가 국제적 비교에서 최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정치 현실이 국민의 높은 정치의식과 기대감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관련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의 국가 기관과 국민의 정치의식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정치 제도라 하더라도 문제가 있을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한다면 넘어서는 안 되는 기본선이 있다.

 지난 6월 24일 오후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 여야 의원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제작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의 표지.
지난 6월 24일 오후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 여야 의원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제작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의 표지. ⓒ 권우성

공명선거와 국가기관의 정치 행동 금지

민주주의의 기본은 국민이 선거를 통해 통치기구를 구성하고, 통치기구의 절대 권력화를 막기 위해 권력 분리와 견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꽃인 선거의 공정한 수행을 위해 국정원을 비롯한 일부 국가 기관에 대해 정치 개입 및 정파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본이 위배된 것이다. 그것도 국가의 최고 기관들과 거기에 몸담은 정치 엘리트들의 조직적 담합에 의해.

국가정보원의 웹사이트(http://www.nis.go.kr)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은 국가 안보와 국익 증진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며 "안보와 국익을 저해하는 어떠한 위협에도 대한민국이 세계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일하는 기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위한 정보 수집에 집중해야 할 국정원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불법적 행동을 일삼았고, 이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문제의 핵심은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공개라는 두 가지 사건이다. 먼저 사실관계부터 정리해 보자.

# 사건 1. 국정원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2010년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시 국정원 원장 원세훈은 내부 인트라넷에 "지방선거에서 좌파들과 확실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경향신문 6월 28일 보도). 국정원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전후 박원순 (현) 서울 시장에 대한 사찰을 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정원 요원 9명이 5천 건 이상의 인터넷 댓글 달기를 하면서 선거 여론을 조작했다(국정원 여직원 사건). 선거 개입을 지시한 혐의로 원세훈 국정원 전 원장이 기소된 상태이다. 국정원 선거 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본인은 아는 바가 없다고 대응했다.

# 사건2. 국정원이 2007년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판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원문을 왜곡 짜깁기한) 발췌 본을 제작하여 2010년에는 청와대에 제공했고, 2013년 1월에는 검찰에 제공했다. 같은 발췌 본을 2013년 6월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열람하도록 했다.

문제가 되자 정상회담 회의록 전체를 정보위원회 국회의원들과 언론에 배포했다. 그리고 국정원의 권한 밖의 일임에도 정상회담 회의록을 대통령 지정 기록물에서 일반 기록물로 재분류했다.

문제의 본질은 국가기관의 정치 중립 위반

정상회담 회의록은 수십 년 정도 비공개하는 것이 외교가의 관례라고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대통령 기록물법에 따라 대통령 지정 기록 관리물로 분리되어 있어 적법한 절차 없이 공개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2013년 6월 25일 기록관리 전문가 단체 기자 회견문). 기록물의 분류를 변경하는 것도 국정원의 권한이 아니다.

국정원이 벌인 사건 1과 사건 2의 핵심은 정치적 중립을 벗어난 행위를 했다는 것, 그것도 법을 어기면서 행했다는 것이다. 선거 기간 중 일상적으로 하는 정보 수집 행위였다는 주장이나, 고 노무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 (NLL)에 대해 특정 발언을 했다는 주장 등은 문제의 핵심이 전혀 아니다.

국민이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과 대통령 기록물의 불법적 공개를 지켜보면서 분노하는 이유는 민주주의 하에서 지켜져야 할 기본 절차가 위반되었기 때문이다. 2008년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때도 비교적 참여가 적었던 대학생들이 이번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촛불 시위에 참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져야 할 선거에 국가의 정보 기관이 개입했다. 이런 일은 박정희, 전두환 치하 독재 시대에나 있던 일이다. 1987년 이후 민주적 선거 26년의 경험이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도 국정원이라는 조직의 일부가 우연히 벌인 일이 아니다. 국정원의 수뇌부가 주도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이 단독적으로 벌인 일로 보이지도 않는다. 새누리당 정치인들과 검찰 수뇌부의 이름들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여기에 사건 1과 2을 연결하는 핵심적 사건 3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긴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새누리당 정치인들과 검찰, 국정원의 수뇌부가 서로 계획적으로 모의하고 공조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의하고 공조한 것이 인터넷 댓글 달기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불법 누설이 전부일까? 그들이 그런 사이라면 과연 검찰은 원세훈 전 원장의 범죄 사실을 샅샅이 조사하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을까? 현재 진행형인 국정원의 정상회담 회의록 불법 배포는 과연 누가 조사하고 처벌할 수 있을까?

불안한 한국의 민주주의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릴 예정인 지난 6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민들이 국정원 직원이 불법으로 여론조작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릴 예정인 지난 6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민들이 국정원 직원이 불법으로 여론조작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국가 기관이 스스로 법을 어길 때, 국익이 아닌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때,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다 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정치 제도는 더 이상 '제도'가 아닌 것이 된다. 국가 기관은 더 이상 국가 기관이 아닌 정파 조직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번에는 보수 세력이 권력을 잡았으니 '좌파들을 척결하기 위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 그렇다면 다음 선거에서 진보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면 '우파들을 척결하기 위해' 국정원을 동원해도 되는 것일까?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민의 비판과 저항 그리고 참여를 통해 만들어졌다. 부정한 권력을 끌어내렸고 새로운 정치 제도를 스스로 힘으로 만들어 온 경험이 있다. 그래서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의식과 자부심이 높다. 정치 엘리트들이 이런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고 스스로 민주적 정치 제도를 파괴할 때, 국가 기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깊어갈 수밖에 없다.

국가 기관이 특정 정파 기관으로 전락한다면, 국민은 왜 세금을 내고 통치 권한을 부여해야 하는지 회의하게 된다. 국민이 불신하는 제도는 밑으로부터 흔들린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매우 불안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윤경 교수는 미국 빙햄턴대학교에서 정치사회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게재될 예정입니다.



#공명선거#정치불신#국정원#정치중립#민주주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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